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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알라모〉
알라모 요새의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특히 텍사스 독립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神話的인 이야기다. 이 전투는 텍사스의 샌안토니오 지역의 알라모 요새에서 민병대 187명이 멕시코의 산타 아나 장군이 이끄는 수천 명의 병력과 맞서 13일간의 사투를 벌이고 전원 전사했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전투를 지휘한 윌리엄 트래비스 대령, 민병대장 짐 보위, 그리고 테네시 주에서 달려와 합류한 데이비 크로켓 등 3인은 신화적 인물이 된다. 당연히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 고 무성영화 시절부터 영화화되어 왔는데 정작 거물급 감독이나 배우가 만든 메이저급 영화는 없었다.
사진, 왼쪽 데이비드 크로켓(존 웨인 분)
서부극의 대스타인 존 웨인은 10여 년간 공을 들이면서 이 알라모 전투의 영화화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이후 자신이 직접 제작, 감독, 주연까지 맡으면서 1960년에야 비로소 대작 영화 〈알라모〉가 탄생되었다. 앞에서 열거한 알라모의 3대 영웅 데이비드 크로켓, 짐 보위, 트래비스 중에서 존 웨인은 크로켓 역으로 출연했다. 짐 보위 역에는 찰턴 헤스턴에게 출연 제안을 했지만 결국은 리처드 위드마크에게 돌아갔다. 당시 헤스턴은 영화 〈벤허〉의 촬영이 막 끝났던 참이라 氣盡脈盡해서 사양했다는 후문이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짐 보위(리차드 위드마크 분)
트래비스 대령은 좀 의외의 캐스팅이라고 여겨졌는데, 서부극과는 인연이 없던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국 배우 로렌스 하비에게 돌아갔다. 존 웨인, 리처드 위드마크 등 이미 西部劇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배우들과 비교할 때 너무 젊은 영국 배우인 것이 의외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트래비스 대령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했다는 평이었다. 2시간 40분이 넘는 대작인 이 영화는 존 웨인이 제작비조차 미처 확보하지 못한 채 어렵사리 촬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멕시코를 촬영지로 모색하다가 영화의 상징성 때문에 결국 텍사스의 어느 목장 근처에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스튜디오 촬영이 전혀 없이 현지 세트에서만 촬영이 이루어졌다. 역사적인 알라모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은 2시간이 지난 후에나 나타나고, 존 웨인도 영화가 시작되고 20분이나 지나서야 등장한다. 전투 이전까지는 트래비스 대령, 짐 보위, 데이비 크로켓 등 알라모 영웅인 세 명의 인물들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후반부에 가면서 영화는 점차 스케일이 커진다. 민병대에게 지원군이 오는 것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숨기던 트래비스 대령은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과 이 병력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며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한다.
이 장면은 참으로 비장하다. 부하들을 데리고 떠날 듯 싶었던 짐 보위가 말에서 내려 트래비스 대령의 병력에 합류하고 이어서 차례차례 민병대들이 말에서 내려 합류하는 장면은 劇的이면서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미국 내에서는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했으나 해외에서의 흥행 실패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제작자인 존 웨인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TV 방영으로 어느 정도 적자를 회복했다.
아카데미 후보 일곱 개 부문에 올랐지만 딱 한 개만 수상했다. 그해 〈스팔타커스〉, 〈엘머 갠트리〉,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 수작 영화들과 맞서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영화였다. 한편 서부영화와 관련, 존 웨인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존 포드 감독이 촬영 현장에 자주 찾아왔다. 존 웨인은 자신의 은사인 존 포드를 많이 어려워했다. 그래서 촬영장에 찾아와 태연하게 감독석에 떡하니 앉아 있어도 찍소리 못했다고...실제로 존 포드가 몇 장면을 직접 촬영하며 지휘하기도 했다. 기대만큼의 흥행 성공이나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알라모〉가 존 웨인의 대표작이 된 것은 분명하다.
서부 영화 음악의 거장인 디미트리 티옴킨이 음악을 담당했다. 기마병 장면에서는 2,000마리가 넘는 말이 등장했고, 전투 장면 외에도 소떼의 이동 장면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한다. 찰턴 헤스턴이 연기할 뻔했던 짐 보위 역의 리처드 위드마크는 특유의 거칠고 힘 있는 연기로 꽤 적역이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세 명의 영웅 중 그가 제일 나중에 죽는 역할을 맡았다. 존 웨인의 아들인 패트릭 웨인도 출연하는데, 지원군이 못 오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알리는 장교 역할을 맡았다.
II. 서부극의 전설, 존 웨인
존 웨인은 150편에 달하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많은 서부극에 출연했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산(山)만한 덩치의 남자다운 풍모로 무수한 서부극에 출연하면서 웨스턴의 아이콘이 되었다. 서부극은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전통적인 영화 장르의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웨인은 클래식한 할리우드 남자배우들 중에서는 항상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배우였다.
웨인은 아이오와 주 윈터셋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매리언 로버트 모리슨이었다. 존 웨인이라는 이름은 1930년 <빅 트레일>에 출연하면서부터 사용했던 예명이다. 웨인은 듀크(공작)라는 애칭도 있었는데 그의 애완견의 이름이었다. 어려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로 이사한 그는 그곳 고등학교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미식축구 선수생활을 했다.
대학 졸업 후 할리우드를 기웃거리던 그는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소품담당 스태프로 일하다가 단역으로 영화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서부 영화 <빅 트레일>에 주연을 맡기도 했으나 잠깐이었다. 이후 10년간 계속 B급 서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싸구려 배우로 지내다가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로 대박을 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제작자 셀즈닉은 웨인의 링고 역으로 출연하는 것에 시큰둥했다. 그러나 포드는 셀즈닉에게 <역마차>는 그때까지 존 웨인이 출연했던 B급 영화와는 수준이 다른 서부극이 될 거라고 설득하면서 웨인의 출연을 강력히 요청했다. 웨인은 이후 포드의 웨스턴에 단골로 출연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굳히게 되며 두 사람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사진, <역마차>에서
<역마차> 이후 존 포드와 함께한 대표적인 서부영화는 <아파치 요새>·<수색자>·<황색 리본을 한 여자>·<리오 그란데>·<기병대> 등인데 웨인은 이 중에서 <수색자>와 <황색 리본을 한 여자>는 본인 스스로 최고의 영화로 손꼽기도 했다. 비서부극으로는 마찬가지로 포드의 <말없는 사나이(아일랜드의 연풍이라고도 한다)>를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았다. 서부극에 줄창 출연하는 웨인을 두고 당시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연기를 서부극만을 위한 스테레오 타이프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절제된 동작과 연기로 확고한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호의적인 평가도 없지 않았다.
또한 배우 그레고리 펙은 웨인이 연기를 잘하는 것은 150편에 달하는 서부극을 꾸준히 연기하면서 현실감이 흐르는 진솔한 캐릭터를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거의 20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면서 말년에 이른 웨인은 1969년에 한쪽 눈에 안대를 감은 루스터 역으로 출연한 서부극 <진정한 용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대중적 인기에 더해 비평가들의 인정까지 받았던 셈이다.
사진, <유황도의 모래>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주의자인 웨인은 애국을 부르짖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병역을 기피한 인물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징병 대상이었지만 연령과 부양가족 때문에 면제를 받았다.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자원입대를 공언했지만 영화 한 편만 더 찍고 입대하겠다며 한 편 한 편 미루다가 결국 전쟁이 끝나버렸다. 비슷한 나이에 자원입대한 헨리 폰다나 제임스 스튜어트와 비교하면 겉만 터프한 겁쟁이라고 할리우드에서 소문이 나기도 했다. 나중에 영화계의 은인이기도 한 존 포드와 영화 촬영을 하던 중 스태프들에게 껄떡거리다가 포드가 그의 군미필을 들먹이면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
포드는 50에 가까운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카메라를 들고 태평양 전선을 누비며 기록사진을 찍기도 했던 열혈남이었다. 포드와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었던 웨인은 포드한테만큼은 할리우드에서 웨인이 유일하게 꼼짝 못했던 사람이었다. 열성 공화당원인 웨인은 평생 동안 지독한 반공주의자이자 우파론자로 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정치적 견해는 약간은 온건해졌다. 흥미롭게도 1978년에는 파나마 운하 문제로 카터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그 운하를 파나마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III. 알라모 전투
알라모 전투의 전개
사진, 오늘날의 알라모 요새
알라모 전투는 미국 民兵隊와 멕시코 정규군과의 싸움이었다. 이야기는 18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군대가 텍사스를 떠난 뒤 대신 독립국가가 된 멕시코가 텍사스를 차지한다. 이 광대한 땅을 발견한 미국인들이 이게 웬 떡이냐고 하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개척자는 모제스 오스틴이었다. 그는 텍사스에 미국인 定着村을 만들겠다고 왔지만 꿈을 못 이루고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꿈은 아들 스티븐 오스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갖은 난관을 뚫고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주를 도왔다. 현재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은 바로 이 오스틴 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스틴이 1821년 300여 가구의 미국인들을 텍사스로 이주시킨 것을 계기로 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은 오랫동안 멕시코 땅인 텍사스에 눈독을 들여왔다. 일찍이 존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멕시코에 텍사스 매수를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거절당했다. 멕시코는 한심하게도 이런 미국의 속셈을 알았으면 미국인들이 아예 텍사스에 발을 못 붙이게 했어야 하는데, 거꾸로 미국인들의 이주를 허용하고 獎勵하는 정책을 폈다. 멕시코는 텍사스의 경제를 키워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일 속셈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300여 가족이었지만 1830년경에는 백인 2만여 명, 흑인 노예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곧 미국인들의 수가 멕시코인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사진, 영화에서
자연히 미국 사람들과 멕시코 정부 사이에 여러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멕시코는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텍사스인들은 흑인 노예 없이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다면서 대놓고 멕시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무렵인 1834년 멕시코에선 산타 아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텍사스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獨裁者 밑에서 살 수 없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오스틴은 체포 구금을 당하면서까지 멕시코 당국에 텍사스를 분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독립 추진자들은 “텍사스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 승리하면 땅을 주겠다.”라고 선언하자 미국 각처에서 이민 희망자들이 몰려왔다.
이에 산타 아나는 텍사스를 도저히 이대로 놔두어선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군대를 끌고 텍사스를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충돌은 알라모 요새였다. 원래 알라모는 전체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배당, 수도원, 수녀원으로 구성된 일종의 전도소였다. 1718년 샌안토니오에 건설되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군 기병대가 주둔하며 이 요새를 스페인어로 ‘미루나무’라는 뜻인 알라모라고 불렀다. 獨立宣言書를 발표하기 전 1835년 12월에 이미 텍사스 의용군 부대는 알라모를 점령했다. 이에 산타 아나가 군을 이끌고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왔다. 그러자 샘 휴스턴을 위시해 텍사스군을 지도하는 몇 사람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수의 初步 민병대만 이끌고는 멕시코군을 이기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샌안토니오를 포기하기로 결 정했다.
사진, 영화에서
그러나 이미 알라모에 진을 치고 있던 의용군들은 후퇴하기를 거부하고 산타 아나가 이끄는 멕시코군을 기다렸다.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남측에서 접근해 요새 알라모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한 멕시코군은 6,000명이었으나 알라모 요새를 지키는 텍사스 의용군은 소수 부대인 데다가 텍사스 주민과 나중에 보강된 증원군 약간을 합해봐야 불과 187명이었다. 제임스 보위와 윌리엄 트래비스 대령이 텍사스 義勇軍을 지도했고 변경 개척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크로켓도 멀리 테네시 주에서 의용군을 이끌고 참여했다. 제임스 보위는 당시 40세였으며 칼싸움의 名手였다. 그의 이름을 딴 ‘보위의 칼’은 지금도 샌안토니오에서 유명한 관광 상품일 정도로 그는 텍사스 개척의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하나다.
아무튼 보위의 칼이 유명해진 계기가 있었다. 1827년 9월 19일, 보위는 미시시피 주 나체즈에서 노리스 라이트라는 결투 상대방한테서 총을 맞고 칼로 가슴을 찔렸으나 곧 바로 허리춤의 나이프로 상대를 썰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이 보위 나이프는 전설이 되었다. 이 덕분에 나이프 유행이 들불처럼 번져, 카우보이들은 물론 미국 남부의 신사들은 보위 나이프를 허리에 차지 않으면 복장이 적절하지 못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데이비 크로켓은 알라모 전투 당시 50세였다. 테네시 주 출신으로 사냥꾼, 개척자, 하원 의원을 지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1835년 하원에 재선되기 위해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무엇보다도 무식하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사진, 영화에서
그가 백 마리 이상의 곰을 쏴 죽였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질 않았다고 한다. 이는 크로켓이 그 정도까지 많은 수를 셀 수가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알라모의 비장한 신화는 트래비스에 의해 더욱 보태졌다. 전투에 임박해 트래비스는 모든 사람들을 집합시켰다. 이제 탈출을 시도하든지, 여기에 남아 싸우든지 兩者擇一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칼로 모래 위에 선을 그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사람은 줄을 넘으라고 말했다. 그 당시 단 한 사람만 빼고는 모두가 줄을 넘어서서 알라모 사수를 결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신화는 20세기에 들어와 조작됐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알라모에 남은 사람들은 1836년 3월 6일까지 13일에 걸쳐 멕시코군에 대항했고 막바지에는 탄약이 떨어져 총을 막대기처럼 쓰면서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1836년 3월 6일 멕시코군은 마침내 안마당 외벽의 무너진 틈으로 물밀듯 들어왔다. 그리고 텍사스 의용군 187명은 전멸 당했다. 이들 의용군들의 시체는 모두 기름에 적셔 불태워졌다. 멕시코군도 1,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 알라모 전투는 13일간의 포위 끝에 3월 6일 끝났다. 병사들은 전멸했지만 한 병사의 아내 수재나 디킨슨, 그녀의 15개월 된 아기, 지휘관 윌리엄 트래비스 대령의 노예인 조까지 세 명만 살아남았다.
텍사스 주 독립
사진, 샘 휴스턴(초대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이었다)
알라모 전투 후, 즉시 산타 아나는 텍사스 동쪽 깊숙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갔다. 그 목적은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의용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하는 것이었다. 휴스턴 장군은 멕시코 군을 깊숙이 유인해서 휴스턴 동쪽 산 하신토 강 유역에서 멕시코 군을 격파하고 산타 아나를 포로로 잡고 텍사스 주의 독립을 선포했다. 텍사스 주는 10 년간 독립 공화국으로 있다가 미국 연방에 가입했다.
하여튼 알라모 전투는 미국의 영웅담을 담은 신화가 되었다. “지금도 샌안토니오 중심에 있는 알라모 유적지에는 관광객들이라기보다는 참배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라고 어느 프랑스의 역사학자는 말하고 있다. 알라모를 찾은 대다수 미국 관광객들은 열광한다. 어떤 미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알라모의 영웅담은 일부 부풀려 加工되었겠지만 그들은 악조건 속에서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였고 희생적으로 처절하게 저항을 했다. 그 사실만은 외면할 수 없다.”
샌안토니오에 살고 있는 어느 멕시코인은 이렇게 말한다. “텍사스 독립의 當爲性을 강조한 나머지 산타 아나의 멕시코군을 너무 폄하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가 자기 땅에서 벌어진 반란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현재 텍사스에서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적지 않은 멕시코인들은 자기네들은 단지 도큐멘테이션(文書化)만 안 되었다 뿐이지 결코 不法 滯留者들이 아니라는 情緖를 가지고 있다. 원래부터 그곳은 자기네 땅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불법적으로 국경선을 넘고 있는 멕시코인들은 내심으로는 자기네 땅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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