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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환기된 사유 속 표면들
-박지선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 박성희 《라마는 높은 곳에 올라서기를 좋아한다》
시인에게 매일 부닥치는 일상을 접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 볼 때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부담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시가 삶의 가장 큰 목표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시와 삶은 흡사하다. 꾸준한 자기 갱신이 필요하다는 것과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지속성에 대한 지독한 욕망의 갈구다. 거기에 똑같은 경로로 판박이처럼 답습하는 것을 갱신하는 것마저 같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해 진전을 이루려는 투혼까지 닮은 꼴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은 시 속에 구속된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은근히 반복된 고통과 같이 성취감이 주는 기쁨을 고대하는지 모른다. 시지프스가 무거운 돌을 정상까지 고통스럽게 밀고 올라가지만, 순간 돌이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을 기대하는 희열과 다르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썼다 쳐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인 피로가 가중되어도 기피하거나 요령을 부려 안된다는 것으로 온통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다. 시인이 펼쳐낸 한 권의 시집은 삶의 현재화된 실체이다. 비슷한 시기에 시집을 출간한 두 시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새로움에 대한 기대라서 즐거운 일이다.
박지선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를 살펴보며 시 속의 다양한 세계와 마주한다. 그런 문장의 세계가 특별해진 이유는 시인만이 갖는 사유 체계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상상력이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거듭한 시간의 응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가 닿고자 하는 정처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쉽게 속내를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것의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네게로 가는 길>에서 찾아가는 ‘길’은 이정표대로 따라가는 길이 아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미답의 길이다. 그런 불확실한 ‘길’을 찾아가는 모험은 대단히 위험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일종의 시간 낭비인 셈으로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네 머리 위에서 빛났던 별/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라 믿었다”며 혹시나 하는 두려움 하나 없이 “별빛을 바라보며/ 밤길을 혼자 걸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별빛으로 믿었던 건/ 내 가슴이었는지도 몰”랐다며 잘못된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말을 돌리고 있다. 그러고도 이제는 찾아가는 길과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길마저 잃어버렸다며 “끝내 닿지 못한 견우와 직녀의 길이었을까/ 네게로 가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에게로 향하는 길마저 잃어버린 미아이고 말았다”는 자책은 많은 세월이 경과한 뒤였다. 지난 시간을 원망한다 해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 세상의 이치로 이해해야 할 일이다.
잊혀졌다, 되살아오는
유의미하거나 의미 없어진
서사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무의미 하지도 말자
몸에서 떠나간 마음이라는 글씨는
바람 부는 날 옆으로 눕혀진
같은 글자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이 빨랫줄 위에 내걸어 준
바리데기의 춤 사위를 바라보기로 하자.
-<바람 부는 날> 부분
마침 부는 바람이 문제였다. 볕이 좋아 빨래며 오래 입었던 외투를 빨랫줄에 내다 걸어놓고 먼지를 털어내는 데 “바람 속으로 더러는 날아가고/ 더러 안으로 스며들고/ 되돌아오기도 하는 것처럼// 바람 부는 날 마주치는 것들은/ 그렇게 여기고 가야 할 것 같았다”라며 사소한 일상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화자의 다짐을 알 수 있다. 미동같은 바람 앞에서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생각만큼 안 되는 일이 살다 보면 발생한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사소한 빨랫감을 통해 벌어지는 일들처럼 인생사의 크고 작은 일들도 그와 같은 것이다. 죽도록 좋아 살겠다는 만남과 이별의 이기적 선택도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이라며 모든 것을 초월한 평상심으로 담담히 수긍한다. <지독한 농담>도 헛헛함으로 읽히지만, 오래 바라보다 보면 묵직한 담론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독한 감기가 누군가에 의해 번져왔는 데 진원지를 알아 되레 좋았다는 화자다. “네 핑크빛 농담에 접목하고 싶었지/ 콕 찔러보았어 희망사항이었어/ 골방 핑크빛에 물들이고 싶었던 거야”라며 막상 그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의 차이가 불러오는 환상 같은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토록 가슴 부풀게 했던 말들은 무색해져 빵빵하던 비닐봉지 안의 바람이 빠져나가며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 같이 이제 그 모습은 “바람에 날리다 가지 끝에 걸린/ 설탕을 담았던 봉지처럼” 그저 텅 빈 비닐봉지에 불과한 것을 본 것이다. 한때 소주 광고의 ‘처음처럼’이란 말이 순수성을 파고든 카피글로 순정한 소주마니아들의 마음을 훔쳤듯이 화자도 희망처럼 가슴을 들뜨게 했던 일들을 겪으며 민감했던 시간이 흘러 무뎌져 둔감해진 것이다. 인간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이 세상이고 사람 마음이다. 화자는 사람의 흉중에 담긴 본성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냥 그래>란 시도 담담한 인생의 담론을 담고 있다. 요만큼 나이 들어 살아오며 별의별 일들을 겪었기에 세상을 알만큼 알고 있단 방증이다. “오래된 벗 있는 내게/ 얼마나 좋으냐고 물었지/ 그냥 그래// 꼭 맞는 새 벗을 만났다기에/ 얼마나 좋으냐고 또 물었지/ 그냥 그래”라는 반복적인 질문에도 여전히 판에 박힌듯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들 같아지고 닮은꼴처럼 비슷해지는 것이 인생살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의미는 특별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쳐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보다 타인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비교를 하게 된다. 그것의 기준은 자신이 아닌 표본화된 사회의 잣대일 뿐이다. 막상 부러움의 대상이던 다른 사람도 별반 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항상 또 다른 삶을 부러워하며 시기할 것이다. 질문은 이어지고 화자가 내린 결론은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별 사람 없다는 동의어// 네만 모르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아픈 말”로 닫히고 만다. 기어이 화자가 찾아 나선 사람은 ‘자신’ 뿐이란 것을 알게 된다.
청 보리밭에 뛰어든 망둥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를 나는 사랑했다
나 또한 설 쉰 무 같아서
뚫린 구멍으로 헛바람이 들었다
먼저 누워주었던 푸른 보리밭 순결
가시도 부드러워 가시인줄 몰랐었다
그가 온다는 기별 없는 보리밭 이랑에
흩어지는 낱알들만 바라보았다
지나는 바람도 비켜가는
망덕 포구 뱃고동 소리도 아득하구나.
-<바람 든 무처럼> 전문
풋풋한 시절 사랑에 가슴 설레던 그때처럼 화자도 가슴에 담아 둔 미련이 깊어 슬그머니 속내를 들춘 듯하다. 허나 유한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버려 좋기만 했던 들판의 흔한 청보리밭도 더는 볼 수 없는 진기한 것이 되어버렸다. 물결치듯 바람 탄 청보리가 온몸을 뒤틀며 살랑거리는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을 꿈꿀 만해지던 욕망도 홀로 간직한 추억일 뿐이다. 세월의 간극이 아득하게 느껴져도 그 시간으로 돌아가 꿈속 같은 풍경을 찾아갔지만, 그 청보리 밭가 두렁에는 그토록 가슴 떨리게 했던 그 사람은 없다. 이제 그때처럼 벅차오르던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 해도 더는 사랑할 수 없는 “나 또한 설 쉰 무 같아서/ 뚫린 구멍으로 헛바람이 들었다”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추억만 가슴에서 요동칠 뿐이다. 몸과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던 시간을 탙진해버린 열정을 안타까워한다. 하염없는 마음만이 각별해졌는데 청보리밭 너머로 지나가는 망덕 포구 안 뱃고동소리가 가슴 안을 들쑤시고 가는 것은 예전처럼 여전하다. 화자가 그리워 찾아간 청보리밭은 굳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달뜬 가슴을 품어준 아련한 추억을 되돌려주었다.
특별히 무엇을 이루고자 한 적이 없다 해도 “서로에게 그 무엇도 되지 못한/ 한 페이지가 되어/ 봄날이 갔”고 “어렵사리 온기 한 가닥 남아있다고 믿는 마음으로는/ 그 봄의 날갯짓이 서러웠”다는(<봄날의 뒷면>) 깊숙이 도사린 회한만 짙어졌다. <건축학 개론>에서 말하고 있는 그것도 알고 보면 잠시 여유에서 오는 낭만일지 모른다. 서로의 얼굴을 맞대며 오순도순 정겨운 둥근 밥상도 현대적인 주거 구조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어디든지 맞아떨어지는 “네모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네 귀퉁이를 둘러싼 긴장은 항상 누군가와 대립항을 이뤄 “보이는 대로 대패질을 하는 목수 남편”, “들꽃도 꺾어다 꽃꽂이를 하는 아내”, “제도기를 들고 먹물로 선을 긋는 아들”, “손거울에 비치는 것들의 부피의 값을 구하는 딸”의 모습은 제각각의 이상에 치우친 삭막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이 함께하는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그 어디에도 끈끈한 가족애는 없다. 그런 세태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그 나름의 낭만으로 치부할만한 <생보리도 받습니까?>란 시에서 매몰찬 선생님의 처사가 그렇다 쳐도 지금까지 가슴 언저리에 남아있는 것은 빈궁한 시절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픈 추억이다. 당시만 해도 다들 분기별 내는 월사금이란 것이 적은 돈이 아니기에 심적인 부담이 만만찮았다. 삼촌이 당한 운수 없는 날의 된통 당한 수십 년이 흘렀어도 씁쓸한 웃음기를 돌게 한 것의 아이러니 또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도 그 삼촌 다리 절뚝이며 그날을 생생히 연출하며 “선생님! 지금도 생보리는 매 타작입니까? 삼촌은 늙지 않은 전설이” 되었지만, 그 선생님 참 어지간한 분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차분하게 들려주는 박지선 시인의 시로 전해오는 삶의 모습들을 공감하며 동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의 위빠사나>를 통해 집중 명상에 들어간다면 각박한 사회 현실이 던져주는 우울함이나 강박과 불편함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화자는 자아 속 삼매에 들어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명상에 들었다. 집중한 명상 속에서 보이지 않던 길(레일)을 발견한다. 올바른 명상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길은 너무 막연한 곳이었는지 모른다. “레일 밖의 예수나 부처나 마호메트가 폭설을 맞으며 설원에 남긴 발자국/ 그 속에 담겨진 환히는 스스로가 설산이길 믿기 때문”이라며 화자만이 터득한 명상 방법으로 ‘레일’을 따라가는 길을 선택하였으니 ‘예수나 부처나 마호메트’가 행한 수행의 목적과는 다른 것이다. 명상으로 평온을 찾고 인간적인 삶에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라는 것의 궁극은 매사에 넉넉해지고 싶은 데 있다. 그것의 다른 말은 일상에서 부닥치는 갈등에서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고 싶고 그 안에서 위안을 얻고자 함이다. 박지선의 시들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도 알고 보면 심리적인 위안을 지향한다. 그런 언중은 “어머니가 이승에서 치마폭에 피운 꽃/ 그곳에 내가 피었다”(<당신이 피워놓은 꽃>)며, “허름한 집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이생의 마지막 날숨 섧게 우는 문풍지/ 진달래 향기 녹여 버무렸던/ 사랑아”(<사랑아>)라며 가슴으로 껴안아 아파하거나 안타까움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시간의 지층에 묻힌 “패망한 나라의 망명객처럼 오동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가야를 바라본다 한 사람을 위해 순장당한 혼들이 빠져나온 텅 빈 봉분을 생각한다 소녀를 팔아먹고 그 자식을 팔아먹은 어머니의 나라 적성비에 새겨진 볼모인 나를 데리고 한 번도 내가 나 인적 없는 나를 데리고 왔다”며 처절했을 봉분에 묻힌 역사를 되돌아보며 시를 써내려 간다. 그것의 인식은 변화를 통해 새로워지려는 시적 미답지에 대한 세계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박성희시인의 자서에서 “시를 써야 할 이유를 알기도 전에/ 미리 시를 쓰고 있었다”라며 등단 전부터 일상 자체가 시적인 삶으로 일관해왔단 것을 말해준다. 그 말을 좀 더 변용한다면 시란 특별한 것이지만, 박성희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시의 속성처럼 살아왔단 말과 상통한다. 시적인 삶은 명징한 언어체계처럼 절제된 의식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시의 본질은 인간 본성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의 문학적인 행위로 정의한다면 맥락에서 동일해진다. ‘지구를 줍는다’는 시어가 생경하게 다가오듯, 시어는 특별하지 않는 언어로 삶의 방식이나 의식을 환기시킨다. 주어로 내세운 상상력으로 위력에 가까운 횡단력의 파장은 긴 여운으로 곱씹게 된다.
시어로 환기된 <지구를 줍다>에서 ‘지구’는 도서관이나 거리의 대형 스크린에서 곳곳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에나 있는 지구는 다만 특별하게 소유권이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다. “나는 까맣게 맑아지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줍는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전혀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 아이들 말고도 많은 현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신기한 세상에 우리는 산다. 버튼만 클릭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이 불쑥 튀어나온다. “클릭 클릭 새들이 근육 없는 아이들의/ 슬픔을 옮겨 놓는다”라며 절대적인 기아와 빈곤에 노출된 아이들의 현실을 접하며 가슴아파 한다. 그것의 원인은 다름 아닌 “화면에선 무성하게 자라 오르던/ 열대 우림의 숲들이 사라진다”는 것의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침투가 낳은 열대 우림의 벌목으로 지구적인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의 파괴와 황폐화를 재촉하는 전쟁도 빠트릴 수 없는 원인이 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아이들이 쏜 장난감에서 발사된 탄환이 지구 반대편까지 관통한다. 그 아이들의 눈 속에 비친 또 다른 지구 반대편 아이들의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아이들의 눈에 비친 지구는 빼앗고 파괴하는 곳이 아닌 호기심 가득한 동심으로 바라본 지구의 본래 모습이다. 화자는 “눈물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이 서로/ 몸을 껴안는” 것을 보며 지금과 다른 자연 보존과 전쟁이 없는 새로운 지구, 빈곤이 없는 전망 있는 미래를 본 것이다.
<유언>은 또 다른 파동으로 다가온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존재한다다는 것은 언젠가 소멸(죽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에 맞서는 나무는/ 의연하다”는 화자의 단언은 주관적인 소신이다. 그 나무는 한반도의 지형에서 어디에서나 잘 자랄 수 있는 ‘소나무’로 화자는 기상 캐스터의 말을 빌려 파고가 높은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소재지를 알려준다. 그 바닷가에 터전을 삼아온 아버지가 소나무와 오버랩되며 파고에 휩쓸리듯 “아버지는 혈관에 링거 줄을 매달고/ 바람을 잠재우는 중”이라며 위태로운 상황을 전해준다. 오래지 않아 93년 풍상의 세월을 안고 죽음을 맞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남긴 유언은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만큼으로 나이테도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생의 소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혹 누군가의 모습으로 현재화되면서 얼굴을 불쑥 내밀 수도 있다.
<괴테의 부활>을 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떡여 보았다. 황당하고 생뚱맞은 것 같지만, 오로지 이윤추구를 위해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쇼핑몰에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옆구리에 칼을 찬 괴테가 갑옷을 입고 롯데의 정원에 나타났다”며 우스꽝스런 조형물이 되어버린 괴테를 보여준다. 화자는 사랑과 낭만을 갈구하던 괴테를 앞세우지만, 그것은 이면을 감춘 상업성과는 반한 것이다. 죽은 괴테의 부활을 통해 현대인들이 버려버린 사랑 대신 이기적인 사회의식을 꼬집으려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삭막한 도시 공간에서 인간적인 괴테를 통해 따뜻한 삶에 대한 담론을 부각하여 거론하고자 하는 데 있다. “괴테는 달나라에 계수 나무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지만, 그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현대인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실보다 삭막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익히 알아버린 현대인들의 의식구조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하늘 수박>은 하늘 타래의 열매다. 넝쿨성으로 나뭇가지를 올라타거나 옛 시골집 담벼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노랗게 익어가는 하늘 수박이 한 겨울바람을 타고 하늘에 둥둥 떠 있던 풍경을 기억한다. 그 하늘 수박이 사람 손을 타 좌판에 놓였다. 도통 하늘에만 매달린 생래적인 습성과 달리 “할머니 목소리가 진보랏빛 가지처럼 캄캄”한데 누추를 더해 “천 원짜리 헌 지폐처럼 꾸깃해진 몸// 떨이하지 못한 하늘수박 이고 간다”는 파장의 뒷태가 심란한 마음을 더 하고 있다. 종일 피로를 털고 일어서는 할머니가 현기증으로 흔들거릴 때 하늘을 만지작대며 중심을 잡고 따르는 그림자다. “남겨진 한쪽 가슴처럼 누렇게 쭈글거리는 하늘”을 이고 가는 할머니가 팔다 남은 가슴(하늘수박)을 안고 가는 뒷모습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따뜻한 저녁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전환할 때 우린 차를 마신다. 분홍빛을 띤 연꽃을 따 놓았다 찻물을 우린다면 그 향기가 은은해 마음마저 훈훈해질 것 같다. <연꽃차>란 시에서 꽃물이 빛으로 풀어져 발향하는 풍경은 눈빛으로 스며든다. 갓 핀 연꽃을 얼려놓았다 고아한 찻잔에 올려놓으면 마치 연못에서 방금 핀 듯 싱싱한 꽃처럼 꽃의 형상으로 되돌아간다. 순간 온몸으로 번지는 기억을 타고 온 고요처럼 “꽃피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 꽃잎에 숨겨놓았던 비밀한 기운을 가득 취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 안 깊숙한 곳에 숨겨진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문득이란 말이 간혹 생각날 때가 있다. <밥은 먹고 사냐?>에서 화자는 가슴 아픈 말을 엉겁결에 하고 말았다. 삼십 년 전 졸업 한 제자들 모임에서 기억에도 특별한 제자를 만났고 “나는 학생들에게 억울하면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를 점집의 주문처럼 외우던 풋내기 교사였다 녀석은 보란 듯이 S대 법대에 합격했고 교문에 프랑카드를 내걸었”던 그 아이를 만나 잊었던 과거가 생각난 것이다. 온통 치기 어린 풋내기 교사로 오직 공부에 전념토록 학생들을 다그치며 열정을 쏟았었다. 그 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해 얼마되지 않아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것이다. 삼십 년이 지난 그 제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공부보다 더 화급한 “밥은 먹고 사냐?”라는 가장 인간적인 몸 말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짙다. 세상이 진실과는 먼 사회란 것을 알려주지 못했던 것의 미안함은 아니었을까?
관절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한다
빈 곳과 빈 곳 사이에 놓여 있던
팽팽한 줄이 느슨해 진다
동작들이 굼떠져
‘밝고 활기차게’로 올라가는 주문을
‘넓고 느리게’로 읽고 만다
목소리 삭아가면서 나를 위해
찾아온 나만의 계정 앞에서
발걸음 뜸한 요즘엔
저녁 햇살이 머물다 간다
이제 나는
조율하지 않아도 된다
-<오래된 피아노> 부분
오래된 것은 손과 눈에 익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외인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신상으로 나온 피아노라면 예전 것보다 신기술이 적용되어 모든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지만 손때가 묻을 정도로 애용한 ‘오래된 피아노’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화자의 연륜에 찬 감각으로 함께 해온 피아노를 통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완벽한 화음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 피아노로 구현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 많아 “千의 얼굴을 갖고 있는/ 목소리” 였다며 온통 가슴을 벅차게 했던 시간을 말해준다. 오랜동안 일체감을 형성하며 “작은 두드림에도 반응하는 제스처/ 가볍게, 무겁게, 느리게, 빠르게, 난폭하게, 부드럽게....” 등 다양한 음감을 화답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손 관절이 삐그덕거린 것처럼 피아노의 수명이 다 된 듯 예전의 상태가 아님을 감지한다. 무엇이든 영원히란 없듯이 피아노도 세월을 먹은 탓에 낡고 헐거워져 더는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피아노와 함께한 화자의 세월도 그와 다르지 않아 과거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는 몸말을 에둘러 첨언하고 있다. 피아노가 낡아 헐거워지는 것이나 사람의 노쇠해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맞춰갈 일이 현명한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어 찾아가지 못했을 ‘배알도’가 사람의 발길을 끌게 된 것은 언제 적이었을까? 그런 궁금증을 알려주듯 박성희 시인은 <배알도>란 시에다 아름다운 서사를 덧붙여 사람들의 관심 속으로 다가왔다. 광양제철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은 다녀왔음직한 곳이다. 한갓져 그저 좋았던 그곳이 어느 때부터 복작거린 사람들로 발걸음이 잦아졌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개발이란 딱지를 붙여 유원지를 조성해놓아서다. 박성희 시인은 개발되기 이전 한가했을 법한 어촌의 풍경에다 배알도의 전설 같은 “오 천 년 전// 바다로 떠난 새가// 낳은 알// 해를 맞이하는 천 개의 손// 별을 헤는 천 개의 발”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유구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한적한 어촌으로 그림처럼 고요한 바다를 접안한 몇몇의 어부가 생계를 이어가던 그곳이 이토록 아름다운 전설을 품고 있는 곳이라고 말해준다. 그곳에도 사랑은 빼놓을 수 없어 “섬마을 처녀와 바다에서 온 총각의/ 첫 입맞춤”으로 외로움에 지친 전설은 현실처럼 이루어져 성공한 데이트 코스로 입소문이 돌아 청춘남녀가 찾는 곳이 되었다.
짐승의 눈은 왜 슬픈가 눈망울을 굴릴 때마다 지나온 산모퉁이와 계곡, 바위 능선이 지나간다 온몽이 글자이며 울음인 그의 눈은 만년설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기억하고 티티카카 호수의 일렁임을 잊지 못한다 사라진 제국의 비애를 간직한 눈
-<라마는 높은 곳에 올라서기를 좋아한다> 부분
마추픽추 계단을 오르다 끌려와 여행 가방 안에 갇혔다 겨우 빠져나온 ‘라마’는 슬픈 눈으로 거친 산악을 오르던 발을 놓아버렸다. 지나온 세월의 고통과도 같은 긴 이야기는 말로 다할 수 없어 발이 아리다. 페루의 거친 산악을 내려온 ‘라마’가 여행자의 배낭에서 꺼내져 새로운 생을 시작했다. 어차피 오래전 겪어온 약탈과 식민의 고통에 익숙한 남미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 더는 두렵지 않다. 신성한 제국을 위해 기꺼이 제단에 올려졌던 유산으로 물려받은 잔여의 생을 더는 원망하지 않는다. 원주민은 제국을 잃었지만, ‘라마’는 거친 산악을 잃어 더는 오를 데도 없어 슬픈 날이 잦지만, 몸으로 기억한 마추픽추의 거친 고도를 잘 알기에 “밤마다 높은 데로 올라가/ 긴 머리카락으로 별을 만진” 것만으로도 설레어 퇴화된 발을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라마의 후예는 그럴 때마다 슬픔의 족속이란 말을 기억한다.
<사막>으로 가는 길은 누군가의 발걸음을 쫓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푸른 초원을 질러 죽음에 이르렀고 또 누군가는 기어이 그리던 사막에 당도했다. 어차피 만나는 곳은 사막이 아니라 첫 출발지다. 그마저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사막으로 밀려나 식은 빵을 먹고/ 수태차를 마”시며 차례를 기다린다. 들고 나는 것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막으로 가는 길이다. 기다림은 그리움이어서 그마저 허기진 배를 채워야 오래 기다릴 수 있다. 사막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가축이나 그리움처럼 찾아오는 배고픔은 어김없다. “사라진 것들이 몸통을 불리며 다가오고/ 살아있는 것들은 야위워지게 하는 밤”은 더 냉혹한 것으로 한치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는다. 저 사막 언덕 너머 모래톱처럼 웅크리고 있는 죽음의 눈빛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박제된 양들”은 풀을 찾아 헤매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사람들 말소리가 잦아진 사막의 밤은 “잠을 잃은 수많은 별들로 인해/ 사막의 밤은 결코, 언제나 환하다”는 데 그제야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에 당도한 것을 자축하며 사막에서 생존하는 법을 깨달아 간다. “사막에게로 가까워질수록 별은/ 빛난” 순간을 놓치는 법이 없듯 사막에서는 모두가 별빛이 된다. <호롱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와 환한 빛이 되어주었던 딸을 생각한다. 예쁜 딸이 책을 읽고 있는 엄마 곁으로 다가와 ‘호롱불’이라고 “자신의 얼굴이 담긴 나무 사진틀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주던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른이 된 딸의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 그 아이의 꺼지지 않는 빛”은 박성희 시인의 가슴으로 환하게 스며드는 딸의 마음이 사랑의 모습인 것을 안다.
박성희 시인의 시를 통해 다가오는 면면을 살펴보았다. 지금껏 접해온 시편의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사유의 근원적인 고뇌가 눈길을 끌었다. 사물로 다가온 대상에 대한 오랜 천착에서 오는 시적 자아는 이어 주체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상상력으로 진전되어 실존적인 고뇌로 승화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사유 체계로 흡입된 시적 세계는 경험과 실질적인 답사로 체험한 것들로 시적인 실감을 변용해 자유로운 사유로 문장을 부조하고 있다. 일상으로 다가온 대상을 가리지 않는 전체성에서 친근감 있는 시적 형용이 분방해 은유의 진폭을 가늠해야 할 때가 드물게 있었다.
박철영
1961년 전북 남원 식정리에서 태어나 한국방송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2016년 《인간과문학》으로 평론 등단. 시집으로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 『월선리의 달』『꽃을 전정하다』, 산문집으로 『식정리 1961』, 평론집으로 『해체와 순응의 시학』, 『층위의 시학』이 있다. ‘더좋은 문학상’ 수상. 순천작가회의 회장 역임. 한국작가회의 회원, <숲속시> 동인. young200107@daum.net
스크랩 원문 : 박철영평론가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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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영작성자
2024.02.10메뉴
첫댓글즐거운 명절을 맞은 연후 첫날 입니다.
'신춘문예공모나라'와 더불어 회원님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 박철영 올림 -
답댓글
목련
2024.02.10메뉴
선생님의 평론을 읽으면서 어두운 제 시 눈을 밝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리며 갑진년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과 함께 문운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답댓글
박철영작성자
2024.02.10메뉴
@목련긴 글 읽으시느라~~~
저는 시인의 마음과 시를 생각하며 썼을 따름입니다
이런 격려의 말씀에 감사드리고 더 많은 노력을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