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79
3월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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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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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eH3a96OzTI (김종욱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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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오리라!>
한해 두해도 아니고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꼼짝못한 채 앓아누워있던 병자의 외침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복음 5장 7절)
저도 돌아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길고 어둔 터널을 빨리 빠져나가 버려고, 그렇게 발버둥쳐도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더군요. 깊고 축축한 수렁에서 벗어나보려고 기를 써봐도,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더군요. 빨리 나아보려고,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였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더군요.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며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순간, 위로부터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벳자타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38년 차 환자 역시 그랬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0년, 20년도 아니고 38년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평균 수명입니다. 그는 거의 한평생을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냥 병도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 못하는 중증의 병이었습니다.
그의 엄청난 인내심이 놀랍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단1도 없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하는 간절한 기대를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 무한한 인내의 결실이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유심히 주변을 살펴볼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인 우리들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환자가 평생에 걸쳐 바친 기도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때가 오리라. 그때 나는 힘차게 일어서리라.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으리라.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오리라!”
환자가 견뎌온 그 오랜 인고의 세월이 결국 오늘 결실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가 환우의 비참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우리 인간의 병은 여간해서 잘 낫지 않습니다. 천천히 주님께서 개입하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주고받은 상처, 우리가 부모로부터 겪은 애정결핍,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끼고 사는 극도의 미성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순식간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면,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아주 천천히 은총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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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8VZey9rq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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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이 두 질문의 답을 찾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양 문 곁에 있는 벳자타 못에서 병의 치유를 바라며 38년이나 매일 그곳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선 요한에게 ‘양 문’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0’을 채워야 합니다.
숫자 ‘40’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이 완성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숫자입니다. 38년은 ‘은총과 진리’, 곧 ‘2’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충만히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은총과 진리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먼저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라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은총은 보통 기름으로 상징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곧 ‘은총’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온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으로써 벳자타 연못의 병자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총과 진리를 받기 전에 38년이나 은총을 바라며 연못에 머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벳자타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오는데 그때면 물이 출렁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한 사람만 치유를 받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바라며 평생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불러주십니다.
‘가톨릭 신문’에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재직 중이던 뛰어난 물리학자가 사제의 길을 택한 예수회 김도현 바오로 신부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친척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늘 벳자타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는 50년 중 30여 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표현합니다. 38년은 안 돼도 30년을 찾은 것입니다. 76년도 4월에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고 수술은 해야 하지만 사실상 사망하실 가능성이 더 컸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뇌종양을 수술해서 살아나신 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고 그 후유증을 견디며 사셔야 했습니다.
이때 친가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께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은 따로 계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기를 권유했습니다. 이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뒤로 계속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미사도 다니고 냉담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카이스트에 입학하였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난이었습니다. 굉장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아래서부터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도 몇 명씩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실제로 자신이 잘 아는 친구도 자살하였습니다.
여러 친구가 학업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며 다시 76년에 자신에게 닥쳤던 질문이 심각하게 다시 올라왔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죽음 이후의 세상은 무엇인가?”
물론 주위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지만, 과학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신앙에서는 다들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과학이 죽음과 내세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았어도 더는 벳자타에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신부는 그런 사조에 빠지지 않고 대학원 다니면서도 오히려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논문 지도교수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그는 더 중요한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00년에 어머니와 상주 가르멜 수녀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원장 수녀님이 “수도 성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은총을, 이 수녀님을 통해서는 진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셨고 김 신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수녀님은 가르멜보다는 예수회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수회 성소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가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학년에서 가장 유능하여 3년에 대학을 끝내고 또 3년에 박사 학위를 마쳐 독일 연구원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누구나 부러워하던 한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며칠간 큰 충격에 빠져 있다가, 다시 생사를 쥐고 계신 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었고 수도회 입회의 마음을 굳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처음의 질문이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면, 이젠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가 주는 답변입니다.
먼저 여러 기적과 같은 체험을 통해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이 당신임을 알려주시고 그다음엔 진리를 통해 죄짓지 말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던 중 한 성경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5) 순간 세상에서 무엇을 가진다 한들 결국 하느님 품에서 제대로 죽는 게 가장 좋은 삶이고,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잘 죽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는 그냥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 묻는 것을 포기하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분이 계신지, 나는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입니다. 벳자타 병자의 38년은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를 찾는 마음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는 마음입니다. 이 두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진리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하느님의 양의 무리에 들게 됩니다.
벳자타 연못은 하느님 나라의 양의 무리에 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그곳에 끝까지 머물 줄 아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주님은 은총과 진리로 그 사람을 당신 우리로 초대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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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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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어떤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복음서의 다른 ‘치유 이야기들’과는 많이 다른,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있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와는 비슷합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예수님을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자비심’으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병을 고친 뒤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고, 안 믿었고, 예수님께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안식일 문제로 시비가 붙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박해자들 편에 섰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를 보면, 그 눈먼 이도 예수님을 몰랐고, 안 믿었고,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신 뒤에 안식일 문제로 시비가 붙자, 눈을 고친 그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섰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요한 9,30-33), 박해받는 것을 감수했고(요한 9,34), 나중에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자 예수님께 직접 신앙을 고백했습니다.(요한 9,38)
은총을 받고 있음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또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은 각자의 선택과 결단입니다. 박해자들 편에 서거나 예수님 편에 서는 것도 각자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랑은 응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편에 서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박해자들 편에 서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5-9)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병자들은 그냥 놓아두시고 그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아마도 그 사람만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사람만 ‘가장 작은 이’(마태 25,40)였을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라는 말씀은, “내가 너에게 건강을 주겠다.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기만 합니다. (그의 말에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들어 있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는 말씀은, “이제부터 새 인생을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치유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말씀과 동시에 치유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를 고쳐 주셨는데, 그 병자는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요한 5,10-13)
사람들은 그 병자가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을 고치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면 그 사람이 긴 세월 동안 병을 앓았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율법주의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안식일에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1절의 그 병자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하는 말이 아니라, 안식일 율법을 안 지킨 것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께 떠넘기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그 병자가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병 외에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몸의 건강에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힘써라.”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밀고’한 일은, 예수님을 배신한 일입니다. (어쩌면 그는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만든 것에 대한 원망이 더 컸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안식일 율법을 어긴 일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병을 고쳤다는 기쁨보다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중병’을 한마디 말씀만으로 고치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했다는 것만 문제 삼고 있습니다. <자비심 없는 신앙과 종교는 사람들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볼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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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어는 고통의 3가지 의미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pain), 정신적인 고통(suffering), 영적인 고통(agnoy)을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고통은 관계의 단절과 우울감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불안, 걱정, 근심, 시기, 질투,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고통은 연민(compassion)에서 시작됩니다. 타인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합니다. 타인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부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강재구 소령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철길에 떨어진 일본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수현이 있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희생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런 희생은 연민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고통입니다. 이를 희생의 제사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입니다. 꽃이 지면 열매가 생기듯이, 영적인 고통은 부활의 씨앗이 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육체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넘어 영적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상황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빵을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것이 미사이고 감사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고통의 순간들이 힘들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민(compassion)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은 은총의 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생명을 살리는 물, 생기와 활력을 주는 물을 보았습니다. 물은 필요하고,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순히 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말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라 버려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야만 영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기도, 전례 참여, 단체 활동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주님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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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이스라엘에 가면 ‘벳자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는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저을 때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못 둘레에는 소경, 절름발이,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진을 치고 물이 흔들리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그 곳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봐서 병이 나은 환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으시지요. 그곳에서 예수님은 38년이나 앓고 있던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5,6)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이 가엾은 병자가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지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5,7)
이렇게 여러 번 기회를 놓쳤음을 아쉬워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병자는 단번에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병이 고쳐졌습니다.
이제는 벳자타 연못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면 벳자타 연못이 있었다는 자리만 있고 실제로 연못은 없습니다. 이 날 수많은 병자들이 연못가에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모두 고쳐주셨으면 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시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이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8년 간이나 병으로 고통받던 사람이 치유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지만 따지기 좋아하는 유다인들은 역시 율법을 들먹이며 제지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요한5,10)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나무라는 것이지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규에 걸려서 그 엄청난 하느님의 능력을 폄하하고 죄로 몰아부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요.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서 있는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을 구속하고 죄인을 만들며 결국에는 하느님의 아들을 못 박아 죽이는 극단적인 결과로 치닫고 말았지요.
법의 근본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법의 작은 조문에 걸려서 사람을 잡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도 똑같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목적이 그들 정치인의 목적인데 오히려 국민을 죽이고 혼란스럽게 하며 불안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할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챙기다가 감옥에 가고 패가망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근본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모습이지요.
이런 모습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교육, 경제, 가정, 이웃 관계에서도 보여집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방법과 목적이 뒤집어져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즈음 우리 가정이 대부분 나쁜 경제조건 때문에 해체되어 가고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돈을 버는 목적은 가정을 유지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목적과 방법이 뒤집어진 것이지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답게 만들고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건만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아니라 교육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자기만 아는 자녀가 되고, 공부만 하면 모든 것이 면제됨으로써 기본 예절조차 성공을 위한 공부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다운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교육으로 이기적인 사람들만 양성되는 시대가 되고 만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교육된 자녀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대로 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라가 온통 목적과 방법이 뒤집어진 결과로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썩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돈의 팔촌까지도 왕래가 있었고 어려운 일에는 서로가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었으나 이제는 친형제 간에도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제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지, 과연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사회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서 가정과 사회와 이 나라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 서로가 존중하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가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에제키엘 에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힘든 시절에 쓰여진 예언서입니다.
에제키엘은 절망스런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이지요.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서 47장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지요. 물은 점점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양이 많아지는데 무릎에서 허리로, 그리고 이제는 걸어서는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은 나무가 무성해지고 고기가 득실거리며 생명이 번성해갔으며, 죽었던 바닷물이 되살아난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자랄 수 없었던 죽음의 지역이 점점 생명의 땅으로 풍요롭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곧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때 비로소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몸을 모시며 말씀을 듣고 이를 집에서 실천할 때 부모 자녀 간이나 이웃 간의 관계가 풍요로워지며 올바른 자리를 잡아가고 마침내 우리의 사회가 생명 문화로 변화되어가는 바탕이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꾸려가는 가정은 해체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부모가 세상의 논리에 맞춰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자녀가 성공하여 그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처세에만 급급하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재산 정리만을 위해서 나타나는 것을 많이 보아왔지요. 세상의 논리대로 가르치지 마십시오. 정치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물을 마시고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바로 생명 문화를 내 가족과 이웃 안에서 실천해 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마신 복음의 생수와 정성껏 모신 예수님의 몸을 가정에서 생명의 문화로 싹을 틔우는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정 안에 들어간 그 생명수가 이웃과의 관계로 흘러 들어가고 사회 곳곳으로 흘러 들어가 빛을 비추고 힘을 발휘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아 모신 말씀과 성찬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찬을 듣고 모신 여러분들이 그 삶을 가정과 이웃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사막이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이 희망 없고 불안하며 고독한 시대를 생명과 희망이 넘치는 복된 사회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손에 달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 바로 나부터 한 걸음 실천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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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기환 사무엘 신부님]
요즘 웰빙이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 낯설지 않게 많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웰빙과 관련된 많은 상품들이 아무런 걸림도 없이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제 웰빙이란 누구나 당연하게 추구해야 할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웰빙 바람이 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웰빙‘이라는 단어처럼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아무런 거부반응이 없이 받아들여 복음은 ‘좋은 것’ 혹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부담스럽고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잘 모르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이 얼마나 밀접하게 우리 자신의 삶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고, 또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새롭고도 풍요롭게 만드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38년 동안이나 병상에서 고생한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이 얼마나 생생하게 우리들에 다가 오는지를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의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또 어떠한 분인지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환자가 치유 받을 목적으로 머물렀던 벳자타라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 북쪽 성문 곁에 있는 못의 이름입니다. 이 못은 치료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내려 오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때때로 이 못에 내려와 목욕을 할 때 물이 일렁이게 되는데 이때에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드는 환자는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다니지요. 참으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환자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이 환자의 절규는 자신의 가슴에 저미어 있는 그 고통과 치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또한 사랑이 메마른 이웃 사람들의 비정한 삶의 모습도 함께 묻어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환자의 절박한 상태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위기에 처해있는 우리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이 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사건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먼저, 이 가련한 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말씀이 기적을 일으킴을 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씀만으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당신 자신의 전 인격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단지 가련한 마음으로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 자신 전체를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은 구경꾼들에게 한 낫 흥미를 자아내거나 자랑꺼리로써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에게 당신의 전 존재를 던져서 치유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치의 병을 앓고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각양각색의 인간적인 삶에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분임을 알 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곧 인간 생명의 근원임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기적에도 불구하고 직접 치유 받은 환자 자신도 유다인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까지 하였음을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태오복음(13, 14이하)에서 예수께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드러나는 박해의 이유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줌으로 해서 일을 했다는 것이지만, 환자 자신도 예수께서 주고자 하시는 사랑과 자비, 권능과 새로운 생명보다는 죽은 글자, 빈 껍질만 남은 율법 지킴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그들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김으로 해서 오히려 율법을 만드시고 율법을 지키는 목적인 그분을 보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병으로 고생하는 이 환자의 모습과 유다인의 모습이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살려고 하지만 ‘제 눈의 안경‘처럼 정작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작은 지식이나 경험에만 의지하고 절대화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묵상해 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지쳐있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생히 살아 움직임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참으로 우리가 잘 사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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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식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어제 복음은 예수께서 이방인 고관의 아들을 원격(遠隔) 치유하신 기적 이야기였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7개 표징사화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치유한 기적 이야기이다.
무대는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예수께서 오순절 축제를 지내시기 위하여 상경하신 것으로 추정된다.(1절)
모든 유다인들은 13살이 되면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축제를 지낼 의무를 가졌었다. 그것은 유다인의 3대 축제일로서 파스카축일(뻬샤흐; 3월~4월), 오순절(샤부옷; 5월~6월), 그리고 초막절/추수감사절(수우콧; 9월~10월)이었다.
요한복음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과월절을 해방절이라 칭하고 있다.(13,1) 유다인들의 달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달력과 판이하게 다르다. 유다의 달력은 우리 달력의 3,4월에 해당하는 니산달로 시작한다.
과월절 축제는 니산달 즉 정월 14일째 날에 해당된다.(민수 28,16) 예를 들어 2004년의 과월절은 유다력 5764년 니산 14일이며, 우리 달력으로는 2004년 4월 9일이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오순절 축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내린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과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말한다.
참고로 세 번째 축제인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이스라엘 성조들의 유목생활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으로 향했던 40년간의 방랑생활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는 추수감사절과 합쳐 지냈던 축제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38년간 중병에 시달린 병자가 치유를 받는 이야기는 분명 40년간의 방랑생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38년이나 중병으로 앓고 있던 병자에게 사실상 희망이란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은 베짜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4절) 그러나 그것도 그의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병자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를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줄 수 있는 사람 중에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베짜타 연못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분은 스스로 육체와 죄의 치유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그분의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구원을 줄 수 없다고 사도 바오로도 확신하였던 것이다.(로마 10,13 참조)
그래서 치유 받은 자가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라고 말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15절)
마침 안식일에 이루어진 병자의 치유사건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으나,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다음 대목들을 준비하는 의미도 가진다. 안식일에 행한 병자의 치유사건이 아들의 권한과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언을 계시(啓示)하는 도입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이유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파국에 박해를 몰고 온다.(16절)
안식일법을 실제로 어긴 사람은 요를 걷어들고 간 사람이지만, 그렇게 하라고 예수께서 시켰으니 법을 어기도록 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병자의 치유 이전뿐 아니라 이후에도 '믿음'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를 치유하셨다. 왜? 예수께서 이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오히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심으로써 예수 자신의 신비가 부각된다. 38년간 병자였던 이 사람을 유다인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병자가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본 유다인들이 그와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안식일법을 어겼다하여 추궁하는 모습이라니...
결혼 10년에 겨우 얻은 딸을 두고 아들이 아니라 하여 며느리를 추궁하는 시부모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참담한 처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을 두고 다른 것은 절대 따지지 않는 참된 의사이시다. 나아가 안식일 위에 군림하는 주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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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 사랑의 표지로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의 표징, 생명의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야곱이 축복의 징표로 간직했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순을 살되, 부활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순은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닌,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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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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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안식일에 낫게 하시다>
요한 5,1-16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안식일에 낫게 하시다>
아픈 이들을
정성스런 돌봄으로
언제어디서나 낫게 하십니다
아픈 이들은
나음 받을 수 있는
날에만 아프지 않습니다
아픈 이들은
나음 받을 수 없는
안식일에도 아픕니다
아픈 이들은
나음 받을 희망이 없는
안식일에는 더 아픕니다
더 아플 수밖에 없기에
더욱 정성껏 오롯하게
안식일에 낫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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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를 만드는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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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어제 복음(요한 4,43-54 참조)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에 주목합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당신을 계시하시는 ‘표징’입니다.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눈으로 그 병자의 불쌍한 처지를 살펴보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5,8-9 참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인들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은 커져 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까닭은 그분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5,10 참조)
율법에 따르면 누구도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데(탈출 20,8-10 참조),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관습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으로서 아버지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5,17 참조)
유다인들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시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5,18 참조)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준 카나의 왕실 관리의 모습(어제 복음 참조)과 차이를 보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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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믿습니까?>
오늘 복음(요한5,1-16)은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는 병자,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어 치유의 연못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는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게 다가가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어제 복음에서 왕실 관리가 보여준 것처럼, 벳자타 못 가의 병자도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 신뢰'를 드러냅니다. 전폭적 신뢰인 '이 큰 믿음'이 놀라운 치유를 낳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치료 행위도 할 수 없다는 율법 규정을 들어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행위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인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 곧 '생명을 창조하는 일과 너를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인데.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본질'인데. 유다인들은 율법 규정에만 갇혀 있으면서, 율법의 본질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에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나의 영육이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왜 짊어지셨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짊어지셨지만 특히 나를 위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공연히 찌르거나 때리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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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사업도 성공적이었고, 가족 안에서도 문제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몸에 중병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술만 받으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워낙 큰 수술이었기에 회복 기간이 길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던 사람이 누워만 있으니 점점 우울한 마음이 들었고, 병원에서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말이 자신을 병원에서 포기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몸이 분명 예전 같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수술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분명 몸에 무리를 주어 예전 같은 생활을 당연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하니, 헛된 기대에서 좌절로 이어진 것입니다. 저 역시 30대의 몸과 지금 50대의 몸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을 나의 몸으로 인정해야 50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0대의 몫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은 가끔 샘물이 솟으며 물이 움직였는데, 이때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다는 민간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 몸을 적시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병자가 못 주위에 있었겠습니까?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이런 이유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해서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지요. 못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원래의 목적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병자의 치유처럼, 병자의 간청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병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병자가 원하는 못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병의 치유를 주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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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의 만남>
- 예수님은 봄(春)이십니다 -
오래전 돌아가신 한 파비엔 수녀님을 잊지 못합니다. 참 아름답게 사시다가 아름답게 돌아가신 분입니다. 수녀님의 특별 유언으로 수녀원 본원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그때 강론에 인용했던 시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고백성사드린후 선물한 시인데 곧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참 시가 좋습니다.”
제가 떠난후 읽어보시고 공감하여 감사의 전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어제 인용했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와 같은 분위기의 ‘봄 햇살 붓으로’란 시입니다. 요즘 초봄 풍경 분위기에 꼭 맞는 시입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畫板
대지大地위에
부드러운 봄 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새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위에
그림그리기 시작하셨네.”-2007.3.
어제 인용했던 사랑스런 시, ‘예수님은 봄이다’란 시를 다시 감상하고 싶습니다. 역시 어제처럼 오늘 복음 분위기와도 딱 드러맞습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1999.3
파스카의 계절, 봄이 되니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자父子분이 참 바쁘십니다. 성부 하느님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분주히 만물을 만나 주시니 말입니다. 바야흐로 피어나기 시작한 이런저런 무수한 봄꽃들, 벌써 주님 부활시기가 도래한 느낌입니다.
어제 말씀 분위기와 흡사한 오늘 말씀 분위기입니다. 어제는 이사야 예언자의 하늘 나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경우라면 오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하늘 나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경우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니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곱가지 표징중 세 번째에 해당됩니다. 어제는 두 번째 표징이었고 그 내용 일곱의 표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2.백부장을 고치심
3.벳자타의 못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심
4.오천명을 먹이심
5.물위를 걷는 예수님
6.태어날 때부터 눈먼 소경을 고치심
7.나자로의 부활
예수님을 만날 때 얼마나 신바람 나는 표징의 기적이 일어나는 지요! 그대로 풍요로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의 하늘 나라의 꿈이, 환시가 참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생명의 강을 이루어 천지 사방으로 흘러내리니 모두가 살아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늘 나라의 꿈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흐르던 생명의 강을, 또 묵시록에 나오는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요한복음의 새로운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예언자들이 그 엄혹한 현실을 통과해 갈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런 하늘 나라의 꿈 덕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말그대로 地獄같은 환경에서 이런 희망으로 빛나는 꿈의 天國을 살았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불행이라도 맞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지옥과 천국으로 갈립니다. 새삼 희망도 훈련訓練이자 능력能力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정말 꿈이, 하늘 나라의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죽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제키엘의 꿈이 바야흐로 오늘 복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또 작금의 파스카의 계절인 봄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38년 앉은뱅이 병자로 지내던 이의 치유가 참 놀랍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치유를 갈망했던 그를 찾아온 생명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생명의 못, 치유의 벳자타 못임을, 에제키엘의 환시에서처럼 세상으로 흘러 내려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강임을 깨닫습니다. 굳이 밖으로 벳짜타 못을 찾아 나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언제나 눈만 열리면 바로 우리 곁에 계신 생명과 치유의 벳자타 못, 파스카의 예수님을, 우리를 촉촉이 적시며 흘러가는 생명의 강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예수님과 앉은뱅이 병자와의 극적 만남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후에 만났을 때 예수님은 결정적 조언을 주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영혼과 육신은,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마음이 병들면 즉시 육신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영육靈肉의 건강에 죄를 짓지 않는 일이, 또 늘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 영약靈藥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치유받은 병자는 참 경솔하고 배은망덕했습니다. 그는 물러가서 유다인들에게 자기를 건강하게 해 준 분은 예수님이라 누설함으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죄를 짓지 말라 했는데 이런 어리석음의 죄를 짓는 병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의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치유의 구원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시편4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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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zlXFsBNI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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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3.29.화."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우리가
놓치고
사는 삶이
바로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은
주님처럼
아주 가까이
있다.
가장 정직하게
만나는 것이다.
먼저 변명을
내려놓는
것이다.
변명을 멈추는
거기에서 삶은
새로워진다.
건강하지 못한
제자신을
되돌아보는
은총의
사순이다.
참된
사랑을 위해
살지 못했다.
건강은
건강하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
주님께
변명하지 않고
우리자신의
간절함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이것이 진정
우리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건강한 소통과
분리될 수 없는
건강한 삶이다.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이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은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사는 삶이다.
거짓에서 깨어나
주님을 향한다.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
삶의 중심을
되찾는
건강이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의
예수님께서
건강한
삶의 길을
걸어가신다.
건강한 삶을
따르는
변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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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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