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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희대의 선동가 괴벨스
요제프 괴벨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나치의 선전부장이며 지금은 '선동'의 대명사이다.
나치독일에는 2인자가 3명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이 히틀러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다. 하나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 친위대와 게슈
타포를 장악한 하인리히 힘러. 그리고 선전부장 괴벨스였다.
괴링은 연합군에 투항했으나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죽었다 힘러도 연합군에 투항했으나 재판에 회부될것을 깨닫자 자살했다.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를 따랐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투항할 경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무작정 죽이면 반발이 일어날까봐 조심하는 것도 있고, 투항한 인물의 영향력을 거꾸로 이용하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론인 괴벨스는 연합군에게 있어 이용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선동을 하면서 젼면에 나섰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다.
히틀러가 몰락하면 괴벨스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그래서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다.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자살한다. 자살하기 직전 히틀러는 자신의 후계자로 괴벨스를 지명한다.
당시 독일군은 궤멸 상태였고 베를린의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이 나치제국의 정상에 섰다는 것을 느끼고 싶은 것은 언론인의 알량한 자존심일까? 괴벨스는 끝까지 도망가지 않았고 히틀러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같이 음독자살을 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겸 문화예술총괄 , 총력전 전권 위임자 괴벨스. 그럼 여기서 희대의 선동꾼이자 선전 선동의 천재라 불리었던 괴벨스, 그에 대해 알아보자.
괴벨스는 나치당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으로, 히틀러의 신임을 받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유년 시절에 골수염에 걸리는 바람에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만곡족)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했다.
그러한 열등감 때문인지 그는 누구보다 타인에 대한 인정에 메말라 있었으며 신체적 보상심리에 대한 일환으로 학업에 열과 성을 다했다.
언제나 장관님이나, 지구장이라는 직책적 호칭보다는 '박사님'이라고 불리기를 원했고 강인한 인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았다.
본디 사회주의 좌파였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여자친구와 대학 시절의 은사도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공산주의는 악마의 이념이며, 유대인은 모든 독일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기생충이라는 것을 깨닫고 철저한 반유대주의로 돌아서게 된다.
나치 운동기에는 히틀러가 임명한 베를린관구장 으로써 뛰어난 연설, 선동 능력을 바탕으로 나치당의 세력 확장에 큰 기여를 했고 당내의 권력자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등과 경쟁하며 그의 사회주의적 지론을 짓밟고 히틀러의 극우 부르주아적 노선을 열렬히 지지한다.
괴테에 버금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히틀러 이상의 연설 능력으로 선전선동의 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괴벨스의 자전적 소설 < 미하엘 > ,
천재적인 작품성이 돋보이는 도서지만 그 내용에 자신의 인생을 덮어씌워 한없이 우울하고 부정적이다. 괴벨스의 유년시절과 청년기는 참담하다. 번번한 취업실패와 사회적 왕따 경험 때문에 열등감과 우울증으로 자살시도도 여러번 했었을 정도로.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방대한 내용의 일기장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여 나치 운동을 조사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다
다수결의 방식에서는 소수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수의 무지한 자들에게 깔리는 경우가 흔하다 대중은 일반적으로 귀와 눈은 밝지만 우둔한 판단력과 희미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어록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의 이성적 사고를 비웃으며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는 선전을 통해 나치스의 지지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지금도 전설로 화자되는 총력전 연설은 괴벨스 최고의 걸작품이자 선동가로써 그의 능력과 위상을 보여준다.
1943년 2월에 베를린 체육궁전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프로파간다 수단. 심리학적 , 수사학적 , 인적 자원등을 활용하여 선전의 걸작품이 연출되었다.
사전에 동원된 영화 배우들과 딴따라들의 신호에 맞춰진 기립박수와 표정등의 연기. 라디오와 확성기, 수신기 등 당대 최신의 기술들을 동원한 선전.거울 앞에 서서 수 십번을 연구한 제스처와 목소리 톤 등. 스스로 총력전의 지휘자가 되어 전황을 뒤집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2차 대전의 후반기에는 광신적 믿음을 바탕으로 나치당 고위간부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전선을 순찰하며 우울증에 빠진 히틀러를 위로하고 패전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노력 하기도 했다.
종국에는 스스로 나치 운동의 순교자가 되어 자살을 선택한 괴벨스.
이제부터 세계 정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 희대의 선동가의 인생 전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10월 29일에 독일 라인란트 지역에서 태어나 1945년 5월 1일,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에 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괴벨스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하급 사무직에서 회계원까지 승진했던 능력있는 사람이었고 'Vereinte Dochtfabriken GmbH' ( 합동 심지공장 유한회사 )라는 공장 지배인의자리에 도달했던 부르주아적인 사람이었다.
금전적으로 꽤나 부유한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어린 시절 한정으로 곧 경제공황이 닥친다. 선천적으로 체질이 허약하여 갓난아기 때 폐렴을 앓았고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던 적도 있다.
10살에 불과했던 괴벨스는 마리아 힐프라는 병원의 유명한 외과의에게 수술까지 받았지만 실패하여 평생을 만곡족이라는 병을 달고 다니게 된다. (일생동안 늘 오른쪽다리를 절름거리며 다녔기 때문에 '절름발이 악마'라는 모욕스런 별명을 달고 다녔다 )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일 전쟁, 비스마르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절망적인 순간에는 그 기적과도 같은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 프리드리히대왕이 음독 자살하기 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왕의 죽음으로 기사회생, 알렉산더 대왕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천재적 전술로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던 것,
비스마르크가 주변 강대국들을 굴복시키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어져있던 독일 제국을 통일시킨 것 등 ) 자신 또한 불행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고 끝내 기적을 이루어낼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당대의 믿음으로는 선천적 장애는 신이 내린 천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벨스의 부모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천적 장애라고 주장했었다. 그들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훗날 22살의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자조적으로 이렇게 기록했다.
( 친구들이 그를 창피해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처럼 달리고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외로움은 괴로움이 되었고, 다른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 놀려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마구 달리고 뛰노는 것을 보며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느님을 원망하였고 자신과 같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저주하였으며 자신과 같은 병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
이러한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학구열에서 찾게 되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소외당하는 현실에서 언제나 도피하고자 했던 그는 종교적 신앙과 역사적 인물들에게 의지했는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성직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1916년 개혁 김나지움 실업 고등학교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친구가 훗날 괴벨스를 나치에 끌어들였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충돌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고등학생이된 괴벨스는 자원 입대 신청서를 제출 하였지만 그의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입대를 거부당했다.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자기 존재를 느끼고자 했던 괴벨스는 이로 인해 또 다시 상처를 입었고,신은 나에게 나라에 애국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며 독일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했다.
이렇게 나치의 사상과 히틀러의 세계관에 신앙적 수준의 감상에 빠져버린 청년 괴벨스는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다.
다음은 나치스의 한 집회장에서 연설가로 데뷔한 괴벨스의 일화이다.
"친애하는 민족 동지들이여"라는 말로 공산주의자들을 도발한 괴벨스는 자신을 자본주의 착취자라고 욕하는 사람에게 지갑을 털털 털어 보여주며 당신과 나 중에 누가 더 돈이 많은 사람인지 보여주겠소"라며 재치 있는 답변으로 회장의 분위기를 열광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 이 사건으로 그는 자신이 연설에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
1925년 7월 11일 경.
드디어 히틀러와 첫 만남을 갖게 된 괴벨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은 평민이요, 반은 신이다. 진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가? 아니면 단지 사도 요한인가 ? "
신체적 열등감과 어린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강한 인간상을 동경하던 괴벨스에게 악마적인 카리스마를 내뿜는 연설가이자 강력한 지도자인 히틀러는 마치 성서에 나오는 구세주처럼 그의 가슴에 다가왔다. 그러던 중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던 1918년 11월 3일, 공산주의자였던 킬 군항의 해병들이 정부의 출격 명령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킨 것을 기점으로 독일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 독일 공산당의 전신이 된스파르타쿠스단 이라는 좌익 단체가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곧 에른스트 룀 대위의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당한다. ) 훗날 나치당의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말한다
민중 혁명에 깊은 인상을 받은 괴벨스는 평소 소외감으로 인한 집단 소속감과 더불어 아래부터의 시민혁명이라는 표면적 모습에 매료되어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독일 국가인민당을 지지하게 된다.
( 후에 히틀러와의 만남으로 이러한 사회주의적 노선을 버리게 되지만 )
독일 국민은 공화국을 받아들인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괴벨스는 강력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당과 정치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했다.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그 분(?)을 기다리며.....
당시 그의 여자친구였던 안카 슈탈헤름은 꽤 명망있는 부르주아 계급이었고 그의 모친이 괴벨스와의 만남을 부정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여기서 한 번더 괴벨스의 자존심은 무너진다.
( 단지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모욕감과 자괴감을 느끼도록 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 - 괴벨스의 일기 -
자존심이 병들어 있던 그는 자격지심으로 그녀와 다투고 헤어졌고 더욱 더 사회주의적 사상에 빠져들게 된다.
( 1920년 경 붉은 군대라 불리는 사회주의적 무장 단체 5만 명이 폭동을 일으키자 " 루르 지방의 적색 혁명... 나는 멀리서 열광한다 " 라고 쓰기도 했다. )
한편 새로 사귀게 된 여자친구 엘제 얀케도 부르주아 계급으로, 괴벨스가 은행원으로 취직할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괴벨스는 그의 동료 은행원들이 경제 공황으로 헐값이 된 토지를 마구 사들여 재산을 불리는 것을 보고 " 너희들은 자본 투자라고 말하지. 그러나 그런 그럴듯한 말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짐승같은 허기만이 있을 뿐이다. '짐승같은'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짐승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기를 그치지 때문이다 " 라고 기록했다.
- 괴벨스의 일기 -
이러한 아픈 경험들과 당대의 혁명적 분위기로 인해 괴벨스는 더욱 더 노동자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갔다.
- 그리고 마침내 그는 평생에 걸쳐 종교와 같이 섬기게 될 남자를 만나게 된다 -
1923년 11월 8일. 히틀러가 1차 대전의 영웅 루덴도르프 장군의 우익 계열 군부와 손 잡고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물론 정보력의 부재와 군부의 소극적인 협조,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이 쿠데타는 괴벨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히틀러라는 인물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히틀러는 쿠테타 실패로 법정에 선후 명연설을남긴다.
< 히틀러의 법정 연설 中 >
나는 유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인정하지만 내란죄를 범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1918년 국가 반역죄( 앞서 말한 11월 공산 폭동 )에 대항하는 행동에 내란죄란 성립하지 않습니다. 덧붙여 11월 8일과 9일의 행동만으로 그 안에 내란죄가 들어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적어도 그보다 몇 주, 몇 달 전부터 있었던 행동과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참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반을 꾸몄다면, 당시 나와 똑같은 지향점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이상합니다. 나는 내란죄를 저지른 죄인이 아니라 그저 우리 민족을 위해 최상의 것을 바란 독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괴벨스는 이 연설을 듣고 이렇게 평가했다.
" 당신은 짓밟힌 꿈을 품은 채 자신들을 이끌 인물과 시대의 과업을 찾아 헤매고 있는 한 세대 전체의 곤경을 표현했습니다. 당신이 거기서 말했던 것은 신은 잃고 붕괴되어 가는 이 세계의 절망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정치적 신앙을 위한 교리문답이었습니다. 당신
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말로 우리의 고통을 표현하고, 앞으로 다가올 기적을 믿음으로 준비할 문장들을 제시했습니다.
라고는 썼지만 정확히 말하면 괴벨스는 청년 시절부터 이미 반유대적 사상에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었다.
히틀러와의 만남을 통해 괴벨스는 공산주의는 악마의 이념이며 유대인은 볼셰비즘적 마르크스주의와 착취적인 자본주의 이념을 탄생시킨 국제적인 음모 집단이라는것을 깨닫고, 그가 청년 시절 사회적인 성공을 이룰 수 없었던 이유를 유대인에 투영시키며 증오하게 된다.
( 자신을 미워하고 뒤에서 헤어짐을 종용했던여자친구 엘제 얀케의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슈펭글러의 < 서구의 몰락 > 이라는 책을 읽으며 인종 문제에 관해 눈을 떴었다. )
괴벨스는 히틀러가 연설하기 전 먼저 연단에 서서 청중들의 열기를 고조시키고 히틀러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며 히틀러가 최상의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집회를 조정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 괴벨스와의 첫 만남에 단번에 그의 선동가적 재능을 꿰뚫어본 히틀러 덕분에 )
아무튼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곧 베를린 관구장으로 임명된 괴벨스는 자신의 선전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 라는 어록에서 알 수 있듯이정치적으로 타인을 모함하고 음해하는 것에 천재적 재능이 돋보였던 괴벨스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비방하고 '정부가 유대인과 결탁하여 독일을 볼셰비즘화하고 있다'라는 논리로 공산당과 정부를 싸잡아 비판하며 경제 위기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려 인기를 얻었다.
또한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돌격대원이자 작곡가인 나치당원이 공산당원들에게 한밤중에 습격당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 일은 의회내 최대의 의석을 가지고 있던 라이벌, 공산당을 공격하는데 활용한다.
< 베셀을 나치 운동의 순교자로 묘사하며 공산당을 비판하는 괴벨스 >
베셀이 생전에 작곡했던 시는 이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나치당의 공식 당가가 되며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본래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과 더불어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된다.
<현재는 독일에서 금지곡임>
성 니콜라이 교회 묘지에 베셀의 묘를 안장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성을 일반 대중에게 선전하려 했던 괴벨스는 일부러 요란한 장례식을 치뤄 그들의 반대 시위를 이끌어냈다. 이를 사진과 필름에 담아 언론에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센스는 기본.
1930년 5월 1일 나치당의 세력 확장에 따라 총리청 근처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헤데만 거리 10번지로 관구 사무국을 옮긴 괴벨스는당의 성장과는 별개로 이제는 높아진 자신의 지위를 의식하며 또 다른 선동가인 당내의 사회주의 좌파, 슈트라서 형제와 싸워야 했다.
<공격>이라는 나치당 기관지를 발행중이던 괴벨스는 새로운 일간지를 발행한다는 정적, 슈트라서 형제와 대립하게 되었지만 히틀러는 " 대기업들과의 연대를 슈트라서 형제의 사랑방 사회주의가 위태롭게 하고 있다 "라고 비판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괴벨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슈트라서 형제의 < 민족의 파수꾼 > 이라는 기관지가 발행되자 괴벨스는 격분하여 히틀러를 원망했고, 히틀러가 제국선전책과 작센의 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달래주어서 당내의 뛰어난 두 선전가들의 대립을 잠깐이나마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히틀러의 부르주아적 친기업 노선과 계속해서 맞서는 슈트라서 형제에게 극도로 노하게 된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작센 주 의회 선거가 끝나는 대로 슈트라서 형제를 제거하겠다고 선언했고
나치당이 14.4%의 득표율을 기록하게 되자 마침내 괴벨스는 선전가로써 당내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선전을 고안하던 괴벨스는 이상적인 아리안 가정을 표방하고자 하는 히틀러에게 이끌려 마그다크반트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다. - 마그다는 재혼으로 이미 아이들을 가지고 있었다 -
1929년 미국에서 일어난 '검은 목요일' 사건. 즉,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자의 수가 수백만에 달하게 되는 행운이 일어나 승승장구하던 나치당은 괴벨스의 끊임없는 선전으로 의회의 제 1당이 되고
< 1932년 7월 31일 나치당 230석. 국회 제 1당 도약 >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동부 스캔들 ( 힌덴부르크의 친척이 동프로이센 개발과 관련된 비리혐의에 휩싸임 ) 덕분에 히틀러는 제국의 2인자,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방화사건을 빌미로긴급 상황시 행정부의 모든 권한을 총리에게 위임한다는 수권법을 통과시킨 히틀러는 (반대하는 의원들은 돌격대원들이 아예 국회에 못 들어오게 입구에서 막고무효표는 찬성 처리했다 )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총리와 대통령을 겸하는 '총통' ( Fuhrer ) 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다.
< 사망 직전의 힌덴부르크 >
이에 나치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괴벨스는 제국 선전장관 겸 독일 문화예술 총괄의 자리를 차지하여 당의 2인자에 등극하게 되는데.....
< 1939년 09월 01일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폴란드에 선전포고하는 히틀러 >
1939년 09월 01일 폴란드 국경 사건( 폴란드 군이 독일군을 먼저 공격해서 응전했을 뿐이라는 변명 )을 조작한 나치는 그대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하게 만들었고, 이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양측 모두 선전포고는 했지만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인데,(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 때처럼 침묵하고 독일에 양보할 것이라 생각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설마 독일이 경고를 무시하고 침략을 감행할 줄 몰랐다 )때문에 별다른 전투가 없던 이 기간을 가짜 전쟁이라고 부른다.
괴벨스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히틀러가 영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바랬지만 히틀러는 연합국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일 뿐으로 독일과 절멸전을 각오하는 것은 아니라고 큰소리쳤다.
( 슈미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좀 재밌는 일화가 있다 )
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앉아 앞만 똑바로 보았다... 내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 히틀러는 꼼짝하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던 리벤트로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히틀러는 외무장관에게 "이제 어떡하지?"라고 물었다...리벤트로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생각에 프랑스도 이 같은 최후통첩을 곧 전달해 올 것으로 보입니다."( 히틀러 또한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이 무렵, 괴벨스는 외무장관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선전의 영역을 두고 갈등을 벌였는데 히틀러가 외교 선전 영역의 포괄적 지침은 리벤트로프가 담당하고 라디오, 전단, 영화, 신문 잡지 등의 관련 지시를 선전장관에게 하달한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 사실상 해외 선전의 업무에서 괴벨스가 리벤트로프의 밑에 속하게 된 것이다 )
또한 제국공보실장 디트리히가 히틀러에게 언론 정보를 제공하게 된 후 디트리히가 건네준 정보를 바탕으로 괴벨스에게 방침을 하달했으므로이 시기의 괴벨스는 정적들에 의해 고단한 수난을 겪는 연속이었다.
폴란드 침공이 종료된 후, 히틀러는 독일 장성들과 그 유명한 전격전 작전을 계획했는데( 전격전이란 3S를 말한다. 기계화 부대를 이용한 속도 .화력 .기습으로 신속하게 적군의 심장부를 장악 ) 이 때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네덜란드를 가로질러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영국을 물리치겠다는 히틀러의 대단한 자신감은 괴벨스를 또 한 번 탄복하게 만들었다.
" 그는 사태 전개의 모든 조치들보다 한 발 앞서 달려가고 있다. 모든 천재들이 그러한 것처럼.총통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 - 괴벨스의 일기 -
프랑스 국경의 마지노선을 우회해 들어가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앞 뒤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작전은성공했고, ( 영국군은 히틀러의 의심으로 고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 유럽의 대륙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대륙 정벌에는 성공했지만 전통적인 해양강국이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섬나라인 대영제국이 눈엣가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와 괴벨스는 좌불안석이었고 어떻게든 영국과 강화협상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을 대신하여 새로운 내각의 수상에 임명된 처칠은 단호하게 거절,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천명했고 히틀러도 영국과의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다짐한다.
1939년 12월 31일 괴벨스는 총통 각하가 믿음과 승리의 확신을 내뿜고 있기 때문에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우리는 싸우고 일하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그 프로이센 장관처럼 말하기를 원한다. 신이시여,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거나 돕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께 저 저주받은 적들도 돕지 말 것을 청할 뿐입니다! "라고 독일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괴벨스는 라디오를 對영국전의 가장 중요한 심리전으로 활용했다.이 중 가장 유명한 방송은 < 뉴 브리티시 브로드캐스팅 스테이션 > 이었는데 이 방송의 진행자는 영국 파시즘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의 측근인 아일랜드인으로 평화와 복지의 나라를 표방하며 영국 국민들의 전쟁 의지를 꺾어놓기 위해 애썼다.
< 라디오 칼레도니아 > 라는 방송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갈등을 부채질하면서 영연방의 분열을 조장했다.
하지만 선전부의 이러한 노력과 괴벨스의 처칠에 대한 끈질긴 비방 ( 호전광이라며 전쟁 책임을 씌웠다 ) 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항전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고
헤르만 괴링이 호언장담했던 제공권 장악에도 실패. 독일 공군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에 대한 상륙작전 ( 바다사자 작전 ) 계획도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영국은 단독으로 독일을 꺾을 수 없었고 ( 미국은 군사적 중립 유지, 소련은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 육군 강국인 독일은 섬나라인 영국에 가할 이렇다 할 공격수단이 없었으므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유럽 대륙을 점령한 독일에서 괴벨스는 각종 영화와 방송 산업을 장악했는데 1939년에 알려진 것만 한 해 111편이라는 엄청난 제작 편수를 기록했고 그로 인한 수입이 5억 제국마르크에 달했다.
불우했던 청년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로 괴벨스는 보겐제 호수 주변에 다섯 채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건물을 보유했는데 정적 로젠베르크는 자연보호 구역에 속하는 그 영지에서 괴벨스의 건축계획이 금지당하기를 바랬고, 이 때문에 히틀러에게 불려갈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괴벨스와 비교적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제국산림국장 괴링은 그 건축은 어떤 식으로든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며 괴벨스를 옹호했다.( 전쟁 말기에 둘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되지만 )
1940년 10월 29일 괴벨스의 43살 생일에 그의 여섯 번째 아이 ( 하이데 ) 가 태어나는 경사가 일어났고 11월 11일 마그다의 생일에는 히틀러가 직접 방문하여 괴벨스 부부를 감격시켰다.
이에 괴벨스는 " 다시 평화가 왔다 " 라고 기록하며 본인 인생의 황금기와 평화로움을 마음껏 만끽하였다.
그래, 적어도 이 때까지는 좋았다........
< 1941년 0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전쟁 선언문을 작성했다 >
영국과의 장기전에 빠져든 히틀러는 본래 그의 최대 숙적이라 여겨오던 유대인의 사악한 볼셰비즘 왕국, 소비에트 연방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18호 ( 바르바로사 작전 ) 에 서명한다.
1941년 06월 22일 새벽 05시 30분, 히틀러가 작성한 對소 선전 포고문을 낭독한 괴벨스는 지난 1차 대전의 지워지지 않는 악몽, 양면 전선을 마주하게 된 사실에 떨며 독소 전쟁을 유대인에 대한 해방 전쟁이며, 성전이라 미화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전쟁이라 자신의 내면을 다독여야 했다.
전쟁 초반, 기습으로 인한 성과로 전세는 한동안 독일군에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전쟁 포로만 1백만 명을 넘어섰고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또한 1941년 07월 03일, 자신의 일기에 " 대소련 전쟁이 14일 안에 승리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라며 자축했다.
히틀러 또한 겨울이 오기전에 전쟁을 마무리 지을 것이라며 큰소리 쳤지만 괴벨스는 총통 사령부를 힐난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약속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1941년 12월 마침내 모스크바에 나폴레옹도 굴복시키지 못한 혹한의 동장군이 찾아오자 겨울에 대한 대비책이 전무했던 독일군은 크나큰 낭패를 보게 된다.
전차와 수송차량은 얼어붙어 전진하지 못해 프랑스를 굴복시켰던 것과 같은 전격전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싸워죽는 병사보다 얼어죽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경악한 괴벨스는 12월 18일 총통 사령부에서 히틀러와의 협의를 거쳐 '겨울철 빈민 구제 활동 기부금 모금' 이라는 선전 캠페인을 벌였고 유명한 영화배우와 스포츠 스타들을 간판으로 내세운 모금 활동은 6,700만 점 이상의 의류를 모으는데 성공했고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 하지만 기울어가고 있는 전황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기였다 )
북아프리카에서 고군분투하던 사막의 여우 롬멜도 보급품 부족과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점점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고
1943년 02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하여 양측 도합 2백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 이 전투로 인해 독일은 대소전에서 완전히 승기를 잃고 이후 소련의 일방적인 역공이 시작된다 )
< 팜플랫과 포스터의 수는 득표수와 비례한다 > 라는그의 지론에 따른 소련내 소수민족들을 겨냥한 대규모 낙하산 선전도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학살과 약탈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7년 전쟁 ( 북프로이센 통일을 위한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 ) 을 근거로 괴벨스는 전쟁은 크고 작은 패배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왕의 불굴의 의지에 따라 승패가 달려있다면서" 제국의 승리의 길은 총통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전황은 명백히 절망적이었으며 국가의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갈아넣어야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했다.
아직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 ( Total War speech )- 1943년 02월 18일 베를린 체육궁전 - >
사전 준비된 나치당 지지자인 박수부대들과유명 영화배우들을 동원한 선전의 걸작.
동원된 당원들은 미리 어느 부대에서 박수를 치고 일어서야 할지 교육받았고 군중심리를 이용해 그야말로 집단적 광기를 연출해냈다.
나치당 고위간부들을 포함한 일반 민중들 ( 해병, 가정부, 노인, 어린아이, 여성, 직장인 ) 을 클로즈업 해 사회의 각계각층이 참여했음을 크게 어필하였다.
라디오와 수신기등 당대의 각종 동원 가능한 최첨단 기술들을 활용하여 전방의 군인들과 각 가정들에게도 커다란 사기 진작의 효과를 가져왔으며 히틀러에게서도 '최고 인기 상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 하지만 괴벨스가 히틀러로부터 총력전 전권 위임장을 건네받은 것은 1944년 07월의 일로, 그 시점에 도달해서는 이미 전황을 역전시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합작으로 200만 명을 새로이 무장시킬 수 있는 물자를 생산해내는 데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었다 )
1944년 07월에 있었던 ' 발키리 작전 ' ( 수도 방위 예비군을 역이용한 히틀러 암살 작전 ) 이있은 직후, 히틀러는 군 장성들과 국민들을 불신하며 집무실에 쳐박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 신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전 민족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문 앞에 서 있는 루시퍼를 그가 기어 나왔던 심연으로 다시 던져 넣을 것이다. 진정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함,무적의 용기, 심장을 뒤흔들고 드높이는 의연함을 갖춘 그 남자는 여기서 신의 도구가 될 것이다 "
이렇듯 최후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괴벨스는 더욱 더 히틀러에게 광신적으로 매달리며 현실에서 도피하려 했다.
1945년 04월 30일, 오전 04시 경.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히틀러가 자살하고 그 후임으로 제국총리직에 임명된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기쁨과 더불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 괴벨스 부부가 수면 음독 자살시킨 그들의 아이들 >
(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맏아들 하랄트 크반트는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부인, 마그다 괴벨스는 지하벙커에서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이며" 총통과 국가사회주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다, 저 세상에 가서도 그 분을 모셔야 한다 " 라는 기막힌 말을 남겼다.
( 당초 괴벨스는 망설였지만, 그 부인 마그다 괴벨스는 적극적이였다.)
괴벨스 또한 지옥에서도 그 분을 모실만한 분이 한 명쯤은 필요하다 라는 주옥같은 말을 남기고 마그다와 함께 동반 자살을 선택한다.
< 불에 타서 통구이가 된 괴벨스의 시신 >
1945년 05일 01일 밤 10시 직후에 벙커의 계단을 올라간 괴벨스 부부의 뒤를 휘발유 통을 든 슈베거만과 운전기사 라흐가 뒤따랐다는 설이 전해진다. ( 청산가리 캡슐로 부부가 자살한 것은 맞지만 권총까지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
히틀러와 더불어 라디오와 영화등의 대중매체를 최초로 정치 선전에 활용한 정치인.
' 선동의 천재 ' Paul Joseph Goebbels 괴벨스 박사.
그는 어찌보면 히틀러가 했던 말에 가장 어울리는 나치당원이기도 했다.
" 생활이 단순한 사람일수록 신앙을 찾고, 그 신앙에 마구 매달리려 한다 "
선천적 장애를 타고 태어난 탓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가난과 사회적 고립 속을 방황한 끝에 몸과 마음을 담았던 ' 나치스 '
그것은 일순간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 우물 안의 독약 ' 같은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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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어둠은 빛을 가릴 수 없다.
역사공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