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박서정
요리사가 은빛 나는 칼로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고, 빠른 손놀림으로 원하던 요리를 맛깔스럽게 만들어내지만 무엇이든 벨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칼을 보면 유용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흉기라는 생각이 앞선다. 다른 건 몰라도 번득이는 칼을 보는 시선만은 남들보다 부정적인 게 사실이다.
명절날만 되면 시아버님은 주방에 있던 칼을 갈아 주신다고 숫돌을 잊지 않고 찾으신다. 난 숫돌에 칼을 가는 아버님의 모습을 뵐 때마다 칼날이 닳아서 뭉툭해진 우리 집 부엌칼이 생각나고,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전설의 고향' 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만난 작은 흑백 텔레비전은 어린 마음에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주말에 방영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공포스러운 프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전설의 고향을 즐겨 봤다. 볼 때마다 무서움을 잔뜩 느끼게 했고 꿈속에서까지 나타나 힘들게 했지만 이상하게 놓치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다.
한번은 이웃집에 사는 어른과 함께 시청하게 되었는데, 입담이 좋았던 어른은 추임새를 넣어가며“그래 잘한다. 그래야지.”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헛기침도 해 가면서 보는 느낌을 더 실감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날따라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이 새벽녘까지 잠도 자지 않고 숫돌에 칼날을 갈면서, 부모님의 원수 갚을 날만을 기다린다는 대사까지 나와서 상상은 극도에 다다랐다. 번득이는 칼날을 보면서 숨이 멎는 것처럼 무서웠지만, 보는 것을 그만 두지 않고 끝까지 보게 된 것은 아마도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칼을 가는 장면, 칼을 들고 원수를 갚으러 가는 장면 등이 그 프로에 자주 등장해서인지 칼 가는 장면만 나오면 또 원수를 갚으려나 보다 하는 선입견이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게 되어 쉽게 흥분이 되곤 했다.
번득이는 칼은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나의 잠재의식으로 인해 요리를 할 때마다 남편의 불평이 따랐다. 안 드는 칼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칼을 갈아 쓰자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계속 괜찮다고 우기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 나의 고집을 꺾을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남편이 문어를 먹물 있는 그대로 삶아서 먹자고 해서 삶긴 삶았는데, 안 드는 칼로 힘주어 자르다보니 그만 먹물이 터져서 문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도마를 흥건히 적신 먹물은 빨간 문어 몸을 까맣게 물들여 남편의 식욕을 떨어뜨리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봐도 미각이 사라질 정도로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로 속이 상한 남편은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기어코 숫돌을 사고야 말았다. 잘 안 드는 칼을 힘들게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난 칼을 갈아 준다는 남편의 말이 조금도 기쁘지 않아서 잘 들게 하지 말고 조금만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동안 요리를 할 때마다 잘 드는 칼이 싫어서 팔이 힘들어도 무딘 칼을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해 왔기에 칼을 갈고 난 뒤부터 신경이 많이 쓰였다. 몸속을 들어올 것만 같은 부질없는 생각과 무딘 칼에 길들여져 있어서 사용할 때마다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칼 간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려고 해도 자꾸 손댄 것이 떠올라 빨리 무뎌지기만을 기다렸다.
나의 불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어느 날 무를 자르다가 왼쪽 세 번째 손가락을 조금 베이고 말았다. 지혈이 되지 않아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해야만 했다. 그 손가락은 지금도 지문이 회복되지 않은 채 아픈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 집 칼은 계속 숫돌을 멀리하고 있다. 칼을 사용할 때마다 많은 힘을 주어서인지 요즘은 어깨가 자주 아프지만 뭉툭한 칼이 여전히 밉지 않다.
부엌칼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연필을 깎아 쓰기 위해 작은 칼을 먼저 만났다. 연필을 깎다가 심이 부러지면 또 다시 깎기를 반복하다 보니, 몇 글자 써 보지도 못하고 몽당연필로 된 기억이 있다. 스스로 연필을 깎아 보고 싶어 흉내를 내다가 손가락을 다친 적도 있지만 칼은 그 시대에 필요한 학용품이였고, 생긴 게 작아서 무서워하지 않고 필통 속에 꼭 넣어 다녔던 것 같다. 자신을 다치게 한 칼을 멀리하지 않은 것은 전설의 고향에 나온 칼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리라.
크고 녹슨 칼에 대한 애정을 어린 시절에 느낀 적도 있다. 우리 집 창고에 보관돼 있었던 그 칼은 검은 가죽에 싸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박스 속에 포장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쌀독 옆에 언제나 있어서 창고에 들어갈 때마다 눈에 잘 띄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머지 그 칼을 한번은 들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몇 킬로그램 나갈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우리 집에 있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큰 무기가 있다는 것은 무서우면서도 도깨비가 나타나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고, 전설의 고향을 본 후 내 마음에 자리한 공포를 물리칠 수 있었다.
내 주변에서 직접 만난 칼들과는 대조적인 칼날을 무당을 통해서 만난 적도 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온 칼보다 더 예리한 칼날은 숫돌에 칼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밝은 은빛이 나는 날카로운 칼날 위를 무당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살짝 닿기만 해도 다칠 것 같은 살기등등한 날 위를 정말 신들린 사람처럼 묘기를 부린다.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당의 신기를 받아들이며 소원을 열심히 빌고 또 빈다. 평범한 우리들은 밟기만 해도 사고가 날 게 뻔한 그 칼날이 은장도의 의미보다 몇 십 배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주술적인 의식으로 액을 물리친다는 신성한 의미가 나름대로 배어 있지만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무당의 행동에서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머리를 맴돈다.
대장간에서 탄생한 칼은 대장장이의 마음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 두드리고 담그고 혼을 불어 넣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도구는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기 위한 목적을 띄었지만 흉기로 쓰인다는 것에 더 예민해진다. 대장장이는 흉기가 되라고 혼을 불어 넣지는 않았지만 전설의 고향에서 원수를 갚기 위해 칼을 갈던 그 모습 때문에 아직까지도 흉기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 집 칼은 언제 다시 숫돌을 만나 제대로 된 칼로 거듭날지 본인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