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심포지엄> 수경스님 인사말
평안들 하십니까.
그렇기도 하고 않기도 할 것입니다. 수양이 깊으신 분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세상의 풍파 따위에 평정심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 몹시 불편하신 분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특히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반도대운하’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현 정권이 국민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그 뜻을 접게 되자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편법과 불법을 일삼으면서 공사를 강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각계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불교와 환경ㆍ생태, 사회ㆍ문화, 정치ㆍ경제 이렇게 4개 분과로 나눠 연찬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그 결과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연구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4대강 개발 사업 관련 논란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애초에 ‘한반도대운하’ 사업으로 진행됐을 때는 비교적 쟁점이 선명했습니다. 개발의 효용성과 합리성, 경제성, 생태 파괴 위험성 등에 대한 국민 여론은 회의적이었고 반대 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러나 ‘4대상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바꿔 달면서, 특히 ‘살리기’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오면서 양상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마치 공해 유발 기업이 친환경을 표방하는 것처럼 ‘녹색세탁’을 한 것입니다. 대운하 사업의 전단계임이 분명한, 국토의 근간을 인위적으로 개조하겠다는 명백히 반생태적인 사업을 생태적 이미지로 위장한 것입니다. 백보를 물러나서 4대강 사업이 완료된 후 생태론자들이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살리기’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강의 자연성이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준설과 수질관리에 고비용을 지출해야 할 것입니다. 국토의 근간이 마치 자동차와 같은 기계의 소모성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생태적 위험의 핵심입니다.
문제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현재 4대강 사업은 세종시 논쟁에 상당 부분 묻혔고, ‘살리기’라는 여론 조작까지 더해지면서 생태론자의 우려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비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사실 4대강 사업은 개발 대 반개발, 친환경 대 반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속내에는 정치, 경제, 문화, 생태 등 모든 사회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결코 경제와 생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 두 관점으로만 보면 논란은 찬반 대립에 초점이 모아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삶의 문제, 다시 말해 자연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살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삶의 문제에 대한 반성과 잔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강이 살아난다 해도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 뻔합니다. 이 점을 간과하게 되면 ‘잃은 건 자연이요, 남은 건 깜짝 경기 부양 후의 부채’가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개발독재 시절보다 더 ‘물신주의’에 매몰돼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못 할 것이 없는 사회가 돼 버렸습니다. 평생을 개발업자로 살아온 이명박 대통령으로선 이보다 더 좋은 정치적 토양은 없을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지금 비록 모든 국민을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공약은 이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경제 살리기만큼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성적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보십시오. 정부 재정 지출에 의한 것입니다. ‘청년 인턴제’와 ‘희망 근로’가 일등 공신입니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십시다. 진정으로 그런 근로를 ‘희망’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지금 ‘청년의, 청년에 의한, 청년을 위한’ ‘알바천국’입니다. 아직 희망을 놓아버릴 말기 암 환자도 아닌데 수술을 포기하고 진통제만 놓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현 정부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 시장 유연화 정책에서부터 죽 달려온 일입니다.
시장 만능과 성장주의를 고집하는 한, GDP에 집착하는 한, 한국 사회에서 행복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GDP가 오를수록 삶은 더 팍팍해지는데 과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단적인 예로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서도 GDP는 올랐을 겁니다. 보상과 복구 과정에서 돈이 풀렸으니까요. GDP와 행복은 현단계에서는 무관합니다. 그런데도 성장만을 부르짖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사면되는 걸 보십시오. 지금 한국 사회의 대기업은 중세 유럽의 ‘장원’과 다를 게 없습니다. 중소기업과 하청업체, 수많은 비정규직, 청년 실업의 현실을 보십시오. 그런데도 경쟁만을 부추깁니다. 낙오자는 오로지 네 탓입니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된 중학교 졸업식의 일탈도 어쩌면 꿈만 꾸며 살아야 할 청소년기에 이미 낙오자의 미래를 봐 버린 아이들의 뒤틀린 항변인지도 모릅니다.
빈부 양극화, 비정규직, 청년실업과 같은 문제는 결코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의 문제고 문화의 문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생태적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면서 녹색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 정부에서 녹색성장을 하겠다면 4대강을 파헤치는 데 돈을 쏟아 부을 게 아니라 ‘빗물 관리’부터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공공기관과 학교에 빗물 저장 시설을 갖추는 일을 해야지요. 신규 건축물은 설계에 반영하고 기존 시설에 빗물 저장 시설을 할 경우 양질의 ‘녹색 일자리’가 창출될 것입니다. 재생 에너지 사용 시설을 갖추는 데도 돈을 써야지요. 재정 지출에 의한 경기 부양은 이런 방식이 지속적이고 합리적일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유기농을 확대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먹을거리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농가 소득 보장, 국토 살리기를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유기농산물은 지나친 고가로 소비 계층의 양극화 구도 위에 서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아토피 문제 등 의료 재정 문제 등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문제이지요. 당연히 이러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녹색성장이고 미래와의 정직한 약속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천박한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 사회로 전락한 걸 보면서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길 없습니다. 종교도 제 구실을 못한 겁니다. 다른 종교 얘기할 것 없이 불교만 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자면, 저도 중노릇한 지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 숫자가 왜 이리 부끄러운지요. 솔직히 고백하지만 지금의 중노릇은 중노릇이 아닙니다. 하나의 직업인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불교조차도 경제 논리에 함몰된 것이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 정부의 무모한 개발 정책에 대해 이토록 무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하자면 4대강 사업은 그냥 지켜봐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만약 현재 한국 불교가 청빈과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무서울 게 무엇이 있어 수수방관만 하겠습니까. 적어도 세간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다운 삶의 한 버팀목은 돼 줘야지요.
현대 사회의 갈등이나 생태 위기를 말할 때 그 원인을 서구의 이원적 사고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로 보는 시각을 거론하면서 불교 사상을 그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서구 사회의 지적 분위기에 대해 불교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고 이걸 자랑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찰 문화의 관광 상품화에 열을 올리면서 스스로 경제 시스템 속에 종속됩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하나의 사회적 기여이고, 불교의 교리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제 활동 영역에서 곧이곧대로 적용시키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내면화된 철학과 가치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지남이 되어야지요. 불행히도 현재 한국의 불교 신자들은 철저히 개인화․기복화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연대로 풀어야 할 문제, 이를 테면 교육 문제 같은 것을 개인 신행의 과제로 돌려 버립니다. 재가 불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행자 집단은 어떻습니까. 사표로서의 위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저 또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승가 집단은 무소유, 무애(無碍), 방하착, 대자유 같은 말로 대중을 현혹하면서 실제로는 반대의 삶을 사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얘기가 조금 곁길로 흐른 것 같습니다만, 오늘 이 자리가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모색의 장이니 만큼 그런 관점에서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과 생태 담론은 80년대에 공해 추방 운동에서 시작하여 시민운동으로서 환경 운동의 단계를 지나 오늘날에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지는 심층생태운동에 이르기까지 양적 질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과도 있었습니다만 정부와 성장론자들의 무차별적 개발의 관성에 제동을 거는 등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보수적 색체가 짙어지면서 주춤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를 폐기하자는 심층생태주의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층생태주의는 그 사상적 태생이 불교라도 봐도 좋을 만큼 불교 사상과 통하는 구석이 많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불성론이나 자타불이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환경이라는 말도 자연을 인간을 둘러싼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불교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환경이라는 말의 쓰임새는 넓은 의미로 생태주의의 관점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환경’이라는 말은 무난한 듯합니다.
저는 지금 개념의 차이가 지니는 중요성을 무시하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라는 말에 내포된, 심층생태주의에서 극복하자고 하는 타자화의 의미를 빼고 보자면, 인간을 둘러싼 인간의 1차적 환경은 ‘인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너무 황폐화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불교 환경 운동은 인간관계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도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한국의 생태운동은 진정으로,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용산 사태를 보십시오. 촛불 정국의 열기와는 반대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인간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 분야별로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하면서 4대강 사업의 문제점과 대안을 얘기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동어반복도 있을 테고, 생소한 이론이나 그야말로 학문적인 담론도 등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왜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우리 삶의 위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극복의 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성찰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그 가능성의 일단이라도 보게 된다면 이 자리를 만드는데 말석에서나마 구실을 한 사람으로서 작은 보람이겠습니다.
두서없는 얘기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