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 1773년~1859년)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 추 바일슈타인 후작(독일어: 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은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당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가였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공부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는 아버지를 도와 혁명을 막는 데 힘썼다. 1803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를 거쳐,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유럽 문제를 논의하는 빈 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정통주의를 제창하고, 나폴레옹이 파괴한 유럽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이때 능숙한 외교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빈 체제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 즉, 나폴레옹의 전성기 이전의 상태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력 반대하여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영내에 다수의 이민족이 사는 복합국가였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의 침투와 제휴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국내에 대두할 때 국내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통일 운동의 지도권을 프로이센에 빼앗기지 않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독일 연방을 조직, 이를 주도하려 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4국의 동맹을 결성했다. 동시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그는 보수적이어서 프랑스 혁명이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독일 및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두려워했으며, 신성 동맹을 이용하여 제국의 자유와 통일 운동에 무력적인 간섭을 하였다.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 빈 체제가 붕괴되며 그는 의장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영국에 망명하였다. 1851년 귀국하여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치적 상담 역할을 하였다.
외교의 개척자
메테르니히만큼 많은 별칭이 붙어 있는 외교관도 드물다. ‘외교의 개척자’, ‘외교의 달인’, ‘외교의 대가’, ‘외교의 거장’ 등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현란한 외교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메테르니히는 1773년 5월 15일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메테르니히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프란츠 게오르게 메테르니히는 라인강 유역의 세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령, 쾰른 대주교령, 마인츠 대주교령)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였다. 메테르니히는 준수한 외모에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이런 점들은 추후 그가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젊은 메테르니히
그는 1792년부터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때 오스트리아 통치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주재 대사였다. 1794년에는 네덜란드 주재 공사가 되었다. 그리고 1797년에는 베스트팔렌 백작령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고, 1801년에는 드레스덴 주재 공사가 되었다. 또 1803년에는 프로이센 주재 대사를 맡았고, 1806년 프랑스 주재 대사가 되었는데, 프랑스 대사 시절 활력 있는 외교관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와 면담의 기회를 종종 가졌다.
한편 프랑스의 외교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에게서 외교의 다양한 기교를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하면서 인맥을 확장한 메테르니히는 1809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장관이 되었고, 오랜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1821년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리고 27년이나 오스트리아 총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가 1848년 혁명의 물결을 맞았다. 유럽 전체의 자유주의적인 격랑이 오스트리아에도 밀려들어와 빈에서도 시민혁명이 발생했고, 보수주의자 메테르니히에 대한 퇴진 요구가 거세졌다.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거기서 3년을 살다가 1851년 오스트리아로 귀국해 1859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세력균형을 금과옥조로 여기다
메테르니히는 프랑스혁명 세력과 나폴레옹을 세력균형의 파괴자로 보았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의 왕국들이 비슷한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질서를 유지해왔는데,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주변국을 침략하면서 질서가 깨졌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유럽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해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네 차례에 걸쳐 대 프랑스 연합이 이루어졌다.
1793년 제1차 연합은 영국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가담했다. 그리고 1797년 제2차 연합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고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이 가담했다. 한편 1805년 제3차 연합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참여했다. 그리고 1813년 제4차 연합은 프로에센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었고,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가담했다.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전쟁과 연합의 과정을 모두 경험했고, 제3차 연합 이후에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나폴레옹과 맞서는 메테르니히
태생적 한계
메테르니히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어떤 이는 유럽의 평화를 이룬 탁월한 외교관으로 높이 평가한다. 나폴레옹전쟁 후 유럽 대륙은 러시아가 강자였다. 전체적으로는 영국의 국력이 앞섰지만, 영국은 해양 세력이어서 대륙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어려웠다. 러시아의 패권이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를 통째로 삼키려 했다. 이를 막는 데 메테르니히가 크게 기여했다. 또 프로이센의 급성장도 일정 부분 저지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무력화도 실행했다. 세력균형, 즉 평화를 위해서였다.
물론 메테르니히의 세력균형 지향이 평화주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으로 세력균형이 가장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루려고 했다. 자국의 국가이익을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외교관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행위 양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부분 그의 노력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그 체제는 3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빈 회의
그리고 이를 이루는 방법으로 공개적인 대화, 즉 공개외교를 지향했다. 빈 회의는 역사상 유례없이 큰 규모로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더디지만 회의를 통해 국제적인 합의서를 만들어내려 했다. 이후에도 국가 간 회의를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회의외교’를 지향했다. 또 그의 의식 저변에는 협력이 가능하고 이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그래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회의외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합법성을 중시했다. 회의의 내용은 조약으로 문서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겐츠와 같은 1급 참모를 오랫동안 썼다.
그런가 하면 메테르니히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역사의 자유주의적인 진보를 막은 장본인이라고 혹평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언론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고, 비밀경찰을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어떤 형태이든 혁명은 거부하고 탄압했으며, 자유주의ㆍ민족주의와는 평생을 두고 싸웠다. 1832년 영국에서 중류층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이를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비판했다. 귀족 출신이라는 생래적 속성, 오랜 기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공생관계 등이 그에게 그런 의식을 심었을 것이다. 그의 태생적 한계였다.
예로부터 모든 국가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대화하고 교섭하고 협상해왔는데, 이를 외교라고 한다. 그런데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는 외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동맹 강대국에 대해서는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방기 또는 ‘쓸데없이 강대국의 전쟁에 참여하게 될지 모른다’는 연루의 염려를 늘 하게 된다. 그리고 동맹이 아닌 강대국들에는 너무 동맹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게 동맹 관리도 하고, 동맹 없는 강대국과는 동맹 못지않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더욱이 작은 나라는 외교자원이 열악하다. 인력, 경제력, 군사력 등과 함께 문화적 힘인 연성 권력도 모두 외교자원으로 동원될 수 있는데, 이 모든 게 부족하다. 그럼에도 쉼 없이 주변국과 국익을 위한 총성 없는 외교전을 벌여야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작은 나라는 역사에서 배우고 얻지 못하면, 정보와 무한 자원으로 무장한 강대국 앞에 발가벗은 채 설 수밖에 없다.
이 책은 19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총리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부터 20세기 말 독일통일을 이룬 한스디트리히 겐셔까지 외교사에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10명을 세계 외교의 거장으로 선정해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다룬다. 저자는 그들의 외교에 대한 이념, 활동, 성과, 그러한 성과들이 나올 수 있게 된 배경 등을 살펴보면서 한국 외교의 미래와 비전을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