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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반도체 혁명 이끈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카이스트의 초석을 놓다
조선일보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입력 2023.09.25. 03:00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9/25/XOSYSHAN3VDH5BRNQIGFKPH6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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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공대 터먼 교수, 제자들에게 창업 유도하고 첨단 기업 유치
트랜지스터 발명한 쇼클리의 ‘반도체 연구소’도… 실리콘밸리 탄생
1970년 한국 방문 ‘터먼 보고서’ 작성, KAIST 전신 ‘한국 과학원’ 출범
지난 12일 애플은 최초로 3나노미터(nanometer) 공정이 적용된 아이폰을 발표했다. 반도체에 작은 미세 구조가 필요한 이유는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기 위해서이고, 트랜지스터가 많아질수록 성능은 좋아진다. 애플은 3나노미터 공정으로 칩(chip) 하나에 무려 190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해 성능을 20% 올릴 수 있었다. 10억분의 1m를 뜻하는 나노미터는 실리콘 원자가 고작 4개 정도 배열되는 크기이니 현재 반도체 경쟁이 얼마나 극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반도체 산업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정도에 이르렀지만, 초기 역사는 쉽지 않았고, 이를 혁신으로 이끈 것은 뜻밖에도 어느 교수의 일자리 고민이었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꿈을 좇는 무리가 몰려들었다. 변호사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도 그중 하나였다. 철도 사업에 성공한 그는 18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고, 1868년 44세 나이로 늦둥이 아들을 얻어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Leland Stanford Junior)라고 이름 짓는다. 하지만 1884년 같이 여행을 떠난 아들이 병으로 급사한다. 부부는 아들을 기념하는 건물을 기부하려고 하버드 총장을 만났다가, 그 돈이면 하버드 규모의 대학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1891년 샌프란시스코 남쪽 팰로 앨토(Palo Alto)에 대학을 개교하게 되는데, 아들의 이름에서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이라고 이름 붙였고, 흔히 줄여서 스탠퍼드 대학이라고 부른다.
스탠퍼드는 이 학교가 캘리포니아의 인재 양성을 담당할 것이라 믿고 개교 초기 학비까지 면제했지만, 졸업생들은 캘리포니아에 남지 않고 떠났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산업은 광업이나 농업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기업체들 역시 인력난에 시달리는 캘리포니아로 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스탠퍼드 공대 교수 프레데릭 터먼(Frederick Terman)은 학생들에게 창업을 유도하며 직접 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터먼은 이렇게 되어야만 대학과 산업의 인력 수급 악순환이 해결된다고 믿었다. 터먼의 제자 휴렛(William Hewlett)과 팩커드(David Packard)가 1939년 공동으로 설립한 휴렛-팩커드는 그 시작이었다.
그래픽=백형선
이어진 2차 대전에서 레이더 등 전자 장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자 터먼은 자신의 구상을 확장했다. 공대 학장이 된 그는 ‘스탠퍼드 대학 연구 단지(Stanford Research Park)’ 설립에 나섰다. 스탠퍼드가 확보해 둔 넓은 대학 부지에 산학 연구 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학생들의 창업을 계속 지원하는 한편 GE, 코닥, 록히드와 같은 첨단 기업들을 유치해 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힘썼다. 서서히 스탠퍼드 주변에 기술 기업들이 몰리고, 여기에 대학 인력이 자연스레 결합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차세대 기술 혁신의 중심에 반도체가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까지 사용되던 진공관(vacuum tube)은 큰 부피와 짧은 수명, 그리고 엄청난 전력 소모로 전자 산업에 큰 제약이 되고 있었다. 1947년 쇼클리(William B. Shockley)와 동료들은 반도체를 이용해 진공관을 대체하는 트랜지스터(transistor)를 발명했다. 소형화로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었기에 여기서부터 반도체 시대가 열리고, 이 업적으로 쇼클리는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터먼은 이를 놓치지 않고 팰로 앨토 출신이던 쇼클리를 설득해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스탠퍼드에 유치한다. 터먼은 쇼클리의 연구소에 인재들을 추천했다. 비록 쇼클리의 괴팍한 성격으로 연구원들이 퇴사하지만, 오히려 이들 퇴사자를 중심으로 스탠퍼드 연구 단지에 IT 회사가 무려 65곳 들어선다. 그중에는 1968년 인텔(Intel)을 창업한 고든 무어(Gordon E. Moore)도 있었다. 이렇게 팰로 앨토는 반도체 혁명의 중심이 되어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터먼이 탄생시킨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혁명으로 칩 하나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동식 메모리 크기는 대개 128메가바이트였지만, 요즘은 128기가바이트로 무려 1000배로 증가한 것을 본다면 앞으로 인류가 쌓아갈 트랜지스터의 숫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가늠하기 힘들다.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는 칩 하나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는 2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예상했는데,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1947년 첫 트랜지스터가 탄생한 이래 2018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3X10²²개의 트랜지스터가 만들어져, 인류가 만들어 낸 역사상 최다(最多)의 인공 구조물이 되었다.
1960년대 말 박정희 정부는 이공계 인력 양성을 위해 미국에 도움을 청한다. 놀랍게도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터먼 교수가 이 구상에 합류했다. 그는 1970년 직접 한국을 방문해 실태를 파악하고 여러 정부 인사와 과학자들을 만나 계획서를 작성했다. 터먼 보고서라 불리는 이 문건에 따라 1971년 탄생한 기관이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KAIS)’으로, 1981년 카이스트(KAIST)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학원이 탄생하던 무렵 우리나라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국가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던 이때, 터먼은 한국이 과학 인력 양성에 집중하면 수십년 내에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꿈은 실현되었다.
尙德
2023.09.25 07:17:49
과학원이 정착될 수 있던 것은 좋은 교수진과 군입대면제였다고 생각한다.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서울공대 졸업생들이 대거 입학하여, 학교의 질도 높였고, 이들이 대학 및 산업계에 진출하여 우리나라의 공학교육의 성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년의 의무근무 기간이 종료됨에 따라 미국등 선진대학에 유학하여 더욱 선진기술을 배워 복귀함에 따라 나라의 산업이 나이키곡선처럼 급격히 발전하게 되어 작금의 대한민국의 부를 쌓게되었다. 그들이 대학 학부 70~75학번들이었으며, 지금 70대 초반들이다. 하지만, 그들 개인적으론 문과 동기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사회적지위와 부를 갖게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을거다. 사류 모지리들이 공부하기 싫어 반정부데모로 세월을 보내던 조폭들이 사회에서 받는 처우와 조국나라에 매국, 역적놀음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작금을 보면서 허탈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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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德
2023.09.25 07:23:56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이후 합해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가 되었다가, KIST가 원상분리되고, KAIST는 그대로 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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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德
2023.09.25 07:35:48
1970년대 후반, 서울공대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은 대부분 시간제로 출석하고, 타대학 교수나 강사로 있었고, 과학원 박사과정 대학원생은 대부분 전일제로 수업도 받고, 연구도 하고. 그러니, 박사라도 질적 차이는 비교하기 어려웠지. 또한 서울공대는 대부분 "구제박사" 교수였고, 과학원은 미국, 프랑스등지에서 최신의 학문으로 학위도 하고, 그곳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교수들로 채워져 있었으니 비교하기 불가였다. 그러다 보니 서울공대에서 박사를 받으려면, 지도교수나 논문 평가위원들에게 혹독한 "을"의 취급받아야 했고, 과학원은 세계 유수의 논문학술지에 논문이 게재해야 되었으니, 논문의 질이 천지차이였다. 이에따라 교수와 대학원생 관계는 갑을관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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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德
2023.09.25 07:4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