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문제점은 본질을 왜곡한 이기적인 삶을 가지는것이다.
신앙에서의 문제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이러한 문제점은 종교뿐만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정의로운 규칙과 원칙을 세우더라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간악함은 그 원칙을 무너뜨리게되거나
원칙을 왜곡하여 잘못이용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 삶의 한가지 법칙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것또한 부정하려는 인간의 모습때문에
잘 언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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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의 진짜 해악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교의 선전수단
반기독교인을 제외한 일반 비예수교인들은 예수교의 해악성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예수교인들의 선전 수단이 그런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자면, 좋은 일을 하는 목사, 예수교인들을 매스컴에 띄우고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다. 그들은 김진홍이나 최일도같은 스타 목사를 내보낸다.
이런 선전수단에 대해서는 구경꾼님의 `새로운 얼굴마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수단은 매우 탁월한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이 사회에 예수교가 저지른 해악들이 아무리 많아도 일반 사람들은 단지 `예수와 예수교는 좋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믿게 만드는 효과이다. 단군상에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성남 일화 축구단 반대 시위, 경승실 철폐요구, 붉은 악마 개명 시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집단 정신병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예수교는 좋은 종교`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진실된 믿음
그렇다면 과연 예수교가 원래 좋은 종교라서 그들이 내세우는 스타 목사들이 생겨난 것일까? 물론 그 당사자들은 예수교에서 배운대로 했고 예수가 시키는대로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도, 그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데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많은 예수교인들은 반복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이와같은 말들은 예수교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로도 계속해서 주입된 논리이기 때문에 옳은말로 느끼기가 쉽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가장 큰 착각이자 무책임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제대로된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말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아니라, 저 말은 그 자체로도 모순을 지닌 말이다. 예수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대부분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맹신`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확실한 정보,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느끼는 생각이다. 돈을 빌리고 안 갚는 사람은 자연히 믿을 수가 없게 된다. 미타님이 말했듯이 태양의 존재를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예수교는 그 종파가 어떻든, 불확실하고 말도 안되는 것들을 믿으라고 강요할 뿐더러, 불신을 죄악이라 여기는 종교이다. 따라서 예수교에서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믿어 왔던 것들에 대한 불신과 의심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저 말이 일관성을 지니려면 예수교인들은 각기 자기네들의 교리에 대한 의심을 허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교인들이 `진실된 믿음` 운운하는 것은 마치 맹인들에게 미인대회 심사위원을 맡기고 최고의 미인을 뽑으라는 말과 하나도 다를게 없다.
예수교의 진짜 해악성
예수교의 진짜 해악성은 목사들의 강간이나 부정축재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런 일들은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고 특정한 지역과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것들이므로 본질적으로 예수교의 문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은 예수교인이 취한 제도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목사와 교인의 강간과 부정축재가 유독 예수교에서 자주 발생되는 점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에 분석가님이 지적했듯이 예수교는 사기쳐먹고 돈벌어먹기 쉬운 교리가 많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교인들의 반론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시가 두려워 사기를 치거나 강간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다음의 두가지 이유에서 무의미하다.
1. 강간, 사기 목사들의 짓거리가 먹혀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예수교를 신실하고 열성적으로 믿는 대다수의 순진한 예수교인들이 사기를 당하고 강간을 당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교를 열심히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조다윗을 따르는 신도들은 그저 잘 믿기 때문에 안수받고 돈을 바치는 것이다.
2. 다음에서 보이겠지만 예수교의 가장 큰 해악성은 그것을 믿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예수교를 신실하게 믿음으로써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교의 진짜 해악성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정신병자를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고성방가하면서 울부짖는 예수병 환자들은 그들이 예수교를 대충 믿어서가 아니라 신실하게 믿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서의 광적인 무차별 학살 행위는 예수교에서 배운 가르침을 그대로 이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예수교를 대충 믿었다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일 필요성은 단지 광적으로 믿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온 것일 뿐이다.
단군상 목을 자르는 행위는 또 어떠한가. 그것이 과연 예수교의 믿음에 소홀해서 저질렀다고 할 것인가?
그 밖에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였던 것들이나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소환한 일 등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결론
결국 예수교의 가장 큰 해악은 불확실하고 비논리적인 것들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온다. 예수교를 맹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하나님이 인간을 일거수 투족으로 감시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음으로써 못된 일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과, 살면서 겪는 고통을 더는 정신적 의존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교의 해악성을 상쇄할 만큼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유럽에서는 몇백년 전까지만해도 지구 역사가 6000년보다 길다는 생각은 살인만큼 중죄라고 여겼다. 갈릴레이도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진화론은 지금까지 예수교인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다.
구약을 보면 타민족을 학살하고 겁탈하라고 야훼가 명령한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원죄설을 믿다보면 도대체 범죄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교를 맹신하면 맹신할수록 도덕과 모순에 둔감해진다. 예수교를 맹신할수록 점점더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이것은 고통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예수교는 자신들의 불확실한 교리를 의심하는 것을 큰 죄라고 주입시킨다.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죄라고 미리 정해두고 자신과 다른 교리를 악마나 마귀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예수교의 존속을 위한 것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둥, 부활을 했다는 둥 하는 불확실한 것들을 그냥 믿으라고 한다면 예수교의 존속이 어려울 것이므로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주입하는 식의 방침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분쟁과 분열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오늘날까지도 예수교는 계속 분열하고 있으며 예수교가 있는 곳에 항상 분쟁이 함께해 왔다.
따라서 예수교는 사회악일 수 밖에 없으며 범죄예방을 하거나 삶의 고통을 덜기 위해 꼭 예수교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예수교가 없으면 안된다는 사람들은 알콜중독자가 술없이 못산다고 하거나 마약중독자가 마약없이 못산다고 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백해무익의 종교 예수교를 추방하는 일은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필수 조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