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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코리아→ 피크 어스, 사고의 전환 필요
멸종 -공생공락, 갈림길에 선 ‘호모 사피엔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한국경제> 신문의 유승호 기자는 최근 기사에서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지속 등 각종 지표를 언급하며 ‘피크 코리아’(peak Korea) 이슈를 부각했다. 즉 그간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 내지 한국의 국력이 마침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암울한 전망이 대두됐다. 요컨대 “(예전과 같은) 한국은 끝났다”는 얘기!
반면, “아직은 희망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일례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경제회복을 위한 제안’ 기자회견에서 “정책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위기 극복방안을 총동원 한다면 성장률 3% 회복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경기침체가 총수요 부족 탓이라 보고 정부가 과감하게 재정을 풀어 실질소득을 증가시켜 소비를 활성화하자는 얘기!
‘예산 낭비’ 현실과 정면충돌 하는 ‘건전 재정’ 철학
한편, 윤석열 정부는 부자감세와 긴축재정(약 23조 삭감)을 통한 재정건전성을 부각한다. 최근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서도 이 측면이 거듭 강조됐다. 그런데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데 든 비용 최소 800억, 대통령 경호 강화를 위한 200억 증액, 민방위복 교체 비용 300억, 새로운 영빈관 건립비 약 900억, 그 외 해외 순방 비용 5배 증가 등 ‘굳이’ 추가하지 않아도 될 ‘예산 낭비’ 현실과 앞의 ‘건전 재정’ 철학은 정면충돌한다.
물론, ‘건전한 재정’, 이것은 개인의 살림살이는 물론 나라 살림살이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철학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건전한 재정이며, 과연 이를 얼마나 일관되게 실행하는가, 바로 이게 문제다. 재정의 근간은 세금이고, 그 세입과 세출 간 균형, 특히 ‘언제나 옳은(?)’ 국민을 위한 재정 운용이 핵심이다.
얼핏 보면, 윤석열 정부와 여당 국민의힘이 가진 입장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가진 입장은 완전 상반된다. 전자는 긴축재정을 통한 재정 건전성 강화에 방점을 두는 반면, 후자는 좀 더 많은 재정투입을 통한 민생 경제 활성화에 방점을 둔다. 그도 그럴 것이, 윤석열 정부는 부자 감세로 약 60조 원의 세금 수입을 줄인 반면, 지출 분야 예산도 과감하게 삭감했다. 대표적으로, 연구개발(R&D) 예산 5조, 사회간접자본(SOC) 약 3조, 청년 일자리 지원 사업 8천억, 지역화폐 예산 7천억, 문화예술 및 체육관광 예산 약 7천억, 중소 벤처 예산 6천억, 노인일자리 등 1천억 원을 줄였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역경제와 골목경제를 위해 “지역화폐, 임시 소비세액공제, 청년 3만 원 패스, 월세 공제” 등의 방법으로 서민들의 실질소득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컨대, 부자 감세 대신 서민 지원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재정운용 논란 넘어선 ‘피크 어스’(peak earth) 개념
윤석열 정부와 이재명 대표의 이 상반되는 경제 해법에 대해, 초두에 나온 <한국경제> 유승호 기자의 ‘피크 코리아’(peak Korea) 개념은 마치 ‘둘 다 틀렸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이제 한국 경제의 체질 자체가 왕성한 성장 단계를 지나 급격한 축소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이 ‘피크 코리아’ 개념은 마치 ‘피크 오일’(peak oil)처럼 그 최고점을 찍었음을 시사한다. 물리적으로 이는 마치 물에 설탕이나 소금을 녹일 때 이미 포화 상태(최고점)가 되어 더 이상 설탕이나 소금이 잘 녹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피크 코리아’(peak Korea) 개념을 진지하게 인지한다면, 현재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데 대한 경제 해법은 정부나 야당의 기조들과는 전혀 다른 모드로 가야 한다. 나아가 이 개념을 거론한 기자 자신의 해법(자본, 노동, 생산성)과도 달라야 한다. 오히려, 수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듯, 지구 자체도 이미 ‘피크 어스’(peak earth)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이미 50여 년 전인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는 이런 ‘피크 어스’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제출했다. 또 스웨덴의 요한 록스트룀 박사는 2009년에 ‘지구위험한계선’(planetary boundaries) 개념을 제시, 9가지 한계선 중 이미 7개가 임계치를 넘었다고 경고했다. 이 ‘지구위험한계선’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반드시 보존해야 할 영역들을 지구시스템과학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각종 기후위기의 징후들(산불, 가뭄, 폭염, 홍수, 이상 저온, 폭풍, 이상 장마 등)만 보더라도 이런 지적들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피크 어스’와 ‘피크 코리아’ 개념을 동시에 고려할 때, 과연 우리는 향후 어떤 경제를 상상하고 또 실제로 만들어야 하는가? 해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위기에 빠진 자본을 살리기 위한 ‘전쟁’보다야 나을 것이다.
맨 먼저 강조할 것은, 이제 세계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생존’, 그것도 ‘독생’이 아닌 ‘공생’에 초점을 맞추어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온 세상은 (개인이나 국가의 모든 차원에서) 서로 앞을 다투며 더 높은 성장,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소비를 추구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장’과 더불어 늘 ‘차별’도 동반해 왔다.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약탈했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자본은 노동을, 인간은 지구를,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남성은 여성을, 고학력자는 저학력자를 지배, 억압, 약탈, 차별, 착취했다.
알래스카 멘델홀 빙하와 그 정면에 위치한 멘델홀 호수에 부빙이 떠 있는 장면(2022년 5월 30일). 2023년 1월 5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0.2~0.3도 기온상승만으로도 21세기 말이면 전세계 21만 5000개 빙하 가운데 절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가 지금 추세로 진행될 경우 빙하의 숫자는 3분의 2로, 빙하의 양은 3분의 1로 줄어들면서 해수면이 4.5인치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AP 자료사진
억압, 약탈, 차별, 착취 끝 다가온 ‘더불어 생존’이란 화두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지구위험한계선’ 또는 ‘피크 어스’에 도달했다. 더 이상 무한 채굴 가능한 자원도 없고, 갈수록 생명이 살 토대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엉터리 절차를 거쳐 방류되는 핵폐수는 문제의 일부일 뿐! 북극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30억 톤의 빙하가 녹아내린다. 해수면이 점점 상승하고 바다는 산성화, 방사능화 한다. 어류는 이미 90%가 멸종했다 하고 꿀벌 역시 50% 이상이 소멸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미 오래 전에 “벌들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사라진다”고 했다. 이런 사태를 정말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더 이상 경제성장 중독이 인류의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 높은 성장이 아닌 생존 자체가 핵심이기 때문! 나아가 나 홀로 생존이 아닌, 더불어 생존이 긴급 화두다.
그렇다면, ‘더불어 생존’ 즉 ‘공생’의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 우리가 ‘공생’을 추구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당연시해온 온갖 경제 개념들을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대표적으로, 더 이상 성장률, 수출액, 수입액, 무역수지, 환율, 이자, 주가상승, 물가, 소득, 투자, 구매력, 수익률, 소비증가율, 시장점유율, 시세차익 등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상품가치나 화폐가치에 갇힌 경제 범주들과 과감히 단절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서울에 살면서 밤하늘의 맑은 별을 보고 싶은’ 모순적 소망을 실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존 경제 패러다임과 단호히 ‘헤어질 결심’은 그래서 필요하다. 살기 위해서라도 ‘버려야’ 하는 셈!
그러나 과연 어떻게 해야 전쟁과 같은 ‘충격과 공포’ 없이 그야말로 ‘연착륙’하듯 새 패러다임(진정한 뉴노멀)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나는 현자인 마하트마 간디와 피터 모린을 기억한다. 간디는 “인간적 필요를 위해서는 지구 하나도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렇다. 자본이 추구하는 무한 이윤이 아닌, 사람이 원하는 인간적 필요 충족의 경제를 만드는 것이 열쇠다. 그리고 피터 모린은 “아무도 부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고, 모두 가난해지려 한다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 탐욕과 독식이 아닌, 나눔과 연대의 가치야말로 공생공락(conviviality)을 가능케 한다. 요컨대, ‘충분함’과 ‘감사함’의 원리에 기초한 인간적 필요 충족의 경제, 그리고 ‘공동체’와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나눔과 연대의 경제를 새로 구축하는 것, 이것이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피크 코리아’와 ‘피크 어쓰’라는 현실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길이다.
멸종이냐 공생공락이냐, 갈림길에 선 ‘호모 사피엔스’
물론,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이나 주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실로 현실적인 것은, 눈만 뜨면 ‘돈, 돈, 돈’ 하는 세상이고, 남들보다 더 비싼 옷과 자동차, 더 고급스런 아파트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의 세상이다. 어른들은 돈 벌기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시험 점수 올리기 바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던질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코앞의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 사는 가운데 갈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헤어질 결심’을 하고 발을 하나씩 뺄 것인가, 하는 질문! 냉정히 보건대, 우리네 ‘현실’이 공생이 아닌 공멸의 방향으로 빠져드는 속도는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빠르다. 오늘도 내일도 북극의 빙하가 우수수 녹아내리는 현실, 이미 어류의 90%가 멸종한 현실은 ‘6차 대멸종’ 경고가 가까운 ‘현실’임을 시사한다. 이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인가?
흔히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인간)라 한다. 스웨덴의 생물분류학자 칼 폰 린네가 고안한 개념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 인류가 정말 슬기롭다면, 자멸과 공멸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지속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30여 년 전에 <녹색평론>을 창간한 김종철 선생은, <간디의 물레>에서 오늘날 우리는 불행히도 “산업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자살체제” 속에 산다고 개탄한 바 있다. 결국, 지금 우리는 이 집단자살체제를 더 가속화 할 것인지, 아니면 공생공락의 새 체제를 창조할 것인지 하는, 치명적인 갈림길에 서 있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할 일은 더 이상 ‘경제 성장’과 ‘수출 증대’를 위한 맹목적 질주가 아니라 총체적 삶의 위기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는 일이 아닐까? 이게 ‘슬기로운 인간’의 해법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앞서 제시된 대안의 철학들을 어떻게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할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사회구성원이라면 과연 어떤 일에 참여하고 협력할지, 바로 이런 점들을 더 차분히, 더 깊이 공부, 토론, 실험, 행동해 나가야 한다. ‘희망’은 (그 어떤 막강한 지도자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아래로부터의 과정 속에서 하나씩 생성된다.
출처 : “한국은 끝났는가, 아직 희망이 있는가”의 질문 너머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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