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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선생이 태어났던 1882년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가 글동무였던 한석진 목사의 장남인 갑손이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쪽 복음과 전도 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상업에 종사하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놀음에 빠졌는데 이 때
한교정이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예수 믿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조만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조만식은 1905년 23세 때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숭실학교 졸업 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3년 명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오산학교는 그가 존경하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사재를 털어서 창립한 학교였습니다.
부임 후 2년만에 교장이 되었고 교장과 사감, 사환, 교목까지를 겸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예수 사랑만을 가르쳤습니다.
7년에 걸친 오산학교생활과 그 후 3.1운동으로 인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가을 평양 YMCA 총무로 11년간 봉직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조선물산 장려운동 즉 국산품 애용운동을 펴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마음 속이나 내세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와 민족 속으로 들어가 사회와 민족을 살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
곁에는 산정현 교회의 충성스러운 격려자와 협력자 조만식 장로가 있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장로는 일제 때도 망명할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땅을 떠나지 않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의 협박과 박해를 받을 때도 순교적 신앙을 지켰습니다.
“나는 이 땅 1천만 동포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로마서 12:2]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지켜 온 대한민국
거짓과 불의와 미움과 갈등과 폭력 역사 왜곡...
짙은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시대를 분별하며
시대를 밝히는 빛으로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