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같은 얼굴이요, 달 같은 태도로다.
정신(精神)은 추수(秋水) 같거늘 성정(性情)은 춘풍(春風)이라.
두어라 월태화용(月態花容)은 너를 본가 하노라” - 안민영,《금옥총부》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철종 때의 가인.
자는 성무, 호는 주옹으로 서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과 가곡원류 간행.
조선의 풍류객들은
꽃처럼 아름다운 기생을 품기 위해
무수히도 많은 시조와 노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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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홍등가, 일본에선 유곽,
우리나라에서 집창촌으로 불리는 공간.
조선 말, 선조들은 화당(花堂)이라 일렀다.
신윤복.,청루소일(靑樓消日)
꽃이 모여 사는 집이란 뜻 ‘화당’은
몸 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곳.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하는.,청루(靑樓).
흔히, "기생방" "기방 출입한다."고도 말한다.
<삼국사기>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로 보아
유녀(遊女)가 관기로 된 시기는 고려 때부터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기녀 외에도 유녀집단이 등장.
조선시대 기녀는 관기이며.,경기(京妓) & 지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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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내의원 혜민서에 의녀(醫女)가 있었다.
지방기로는.,공조 상의원에는 상방기생· 선상기생.
즉, 침선비(針線婢:왕과 왕비 의복을 지음)가 있었고
이러한 관기류 말고도 시정(市井)에 많은 기녀들이 존재.
일제강점기 기생방은 권번(券番:기생 조합).
기적을 둔 권번에 소속되어 유흥업에 종사했다.
...........................교방(敎坊).....................
고려시대 이후 가무(歌舞) 기녀를 관장하던 기관.
1010년(현종 1) 속악(俗樂)과 당악(唐樂)을 맡았던
교방에 매여 있던 백여명 궁녀를 풀어주기도 했으나,
충렬왕 때 다시 각 지방에서 창기(倡伎)들을 뽑아 충원.
조선 초기에는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교방 여기들을 관장.
1897년 관제개혁 때 장악원을 교방사(敎坊司)로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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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송도 객주거리는.,청교방.
'황진이' 기생이 되어 첫발을 담았다던 곳.
“매화, 도화, 련화, 계화.,없는 꽃이 없소이다. "
"나으리 어느 꽃을 꺾으실갑쇼?”
조선 '후기~말'.,객주거리 집창촌.,화당(花堂).
조선후기 한양의 화당은 어디에 밀집해 있었고,
그곳에 머물렀던 여인들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일패기생은 관기로 예의범절 교양이 밝은 예술인.
머리 올려준 정인 이외에는 합침하지 않는게 불문율.
하여, 첫날밤 만리장성 쌓기를 "머리 올려준다."고 표현.
이패기생은 은근히 몸을 팔기도 하는.,은근자.
삼패기생은 돈만 바라는.,객주거리 창기(娼妓)
법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불법 임은
조선시대 또한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았으되,
법이 금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음지(陰地)에서
더욱 성행했던 풍경 또한 현재와 매우 유사(類似)하다.
고급 기생은 빨간 우산을 썼고
저급 기생은 파란 우산을 썼단다.
16세면 손님을 받았고 25세면 은퇴
대구에서 종로(鍾路)는.,기생의 거리.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 & 갓우물골
현재, 중구 입정동 & 을지로3가.
즉, 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북상화당(北賞花堂).
그후, 일제 강점기에 지금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명치정'이란 요정 거리.
여기에서 개화기에는 주로 매음(賣淫)이 이뤄졌다
조선 후기 화당(집장촌) 밀집 지역은
주로 청계천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농포안 (현재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새로운 상화당이 생기면서 두 지역의 구분을 위해
북상화당, 남상화당이라 했고, 오늘날 명동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명치정 요정거리 유곽에서 매매춘.
일본에서는 유곽,
한국에서는 집창촌
조선시대에는 화당(花堂)
중국에서는 홍등가로 불리는 공간을
조선후기 선비들은 참 점잖게 일렀다.
'꽃이 사는 집'이란 의미로 ‘화당(花堂)’은
몸 파는 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생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등급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 기생으로 분류.
일패는 시서화 가무에 능한.,'예기',
이패는 가무를 주로 하되 매음을 해 ‘은근짜’
삼패는 외양으로는 기생이나 매음을 주로 하며
일패와 이패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행동했다.
이 삼패들이 사는 화당은 주로 한양 남부 시궁골과
갓우물골(중구 입정동, 을지로3가).,남상화당(南賞花堂)과
조선 말 새로 생겨나 종전의 상화당보다 북쪽인 한양 북부 농포안
(종로구 권농동, 종로3가)에 자리 잡은 북상화당(北賞花堂)이 있었다.
기생을 찾는 사내들이 모여드는 청루에서는
사소한 시비로 일어나는 주먹다짐이 빈번했다.
젊은 사내와 중년 남성의 싸움이 무엇을 위해선지
혜원 신윤복 그림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유곽쟁웅>, 신윤복, 지본채색,
18세기 말, 28.2*35.6cm,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매춘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조선시대 법으로 만 막을 수 있었으랴.
매음 기생들이 사는 청루를 제외하고
화당(花堂)에 적을 두지 않은 매춘부들은
화랑유녀, 여사당패 등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한양 기생은 어려서부터 교방
또는 장악원에서 기예를 익혀
한 명의 예인으로 성장했으나,
멀리 지방의 관아에 속한 관기는
고을 현감이나 관리의 명에 의거
기예보다 수청 드는 일이 주 업무.
법으로는 매춘을 금했으나
현실에서 근절하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일종의 편법을 취한 셈.
예를 들면, 함양 관기 연화의 사례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4년 4월 27일 자
3면 '娼女定區 창녀정구' 기사.
사진 = 한국언론진흥재단
창녀들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정에서
이들의 거주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다.
조선 말 개항 이전까지는
관기를 통한 합법적 매춘,
사기를 통한 매춘 만 가능.
이러던 것이 갑오개혁 이후
어려운 생활에 매춘에 뛰어든
여성이 증가하며 정부 차원에서
매춘여성 거주지 제한 조치가 시급.
매춘 여성 증가로 주거지역에서도 암암리에
매음이 이뤄지자 황당한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요즈음 여항에 매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악습이 심한 까닭으로,
외국인이 때때로 시골집으로 가서
창녀 유무를 묻고 하여 거주민이 놀라
근심하기에 이르니...”
1904년 4월 27일 황성신문은
그 중 한 사건을 옮겨 적으며
이들의 거주지 이전 공고를 보도.
이 기사에 따르면 경무청은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 근처로”
이들의 거주지를 제한했다.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은
지금의 명동2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지명이.,명치정.
종각 덕에 '종로'라 이름 붙은 보신각종 근처는
100년 전, 옛 서울에서도 상업 가옥이 즐비하고
전차와 우마차가 북적거리는., 조선 최대 번화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경제 중심지였던.,종로.
밤이면 조선인 노점상 야시장 & 창경원 벚꽃놀이.
일본인들과 상류계층의 번화가는 명치정과 본정통
충무로 본정통에는 미쓰코시 백화점(현 한국은행) 등.
북촌., 종로와
남촌.,본정통~명치정 일대는
일본 대자본 투입으로 점차 공간 분리.
일제강점기 해가 거듭될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오늘날, 명동이.,그당시 명치정.
일본식 과자를 판매하는 왜각시(게이샤)들을
구경하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명치정.
일본 상인들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과자나 요리와 함께
각시를 파는 요정을 세워 일본식 유곽문화를 도입했던 곳.
대한제국 궁중연회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관기(官妓)들의 모습.
종전 기생은 학식 높은 사대부를 손님으로 상대
그러므로,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해야 했다.
지역의 특색에 따라 읽고 읊는 책도 달라졌는데
유교적 학풍이 발달한 안동 기생은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 기생은 관동별곡을 읊었으며, 호방한 기풍이 강한
함흥 기생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노래하는 등 수준이 높았다.
개항 이후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사회, 경제 기반이 흔들리자 고고했던 기생의 지위도
함께 흔들렸음은 물론 생계수단 잃은 여성들이 매춘에 나섰다.
종전에야 기생이 아닌 매춘여성(화랑유녀, 여사당패)은
사대문 안 출입이 금지되어 도성 안에서의 매춘은 어려운 일
국가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매춘에 나선 일반 여성도 늘어나자
정부는 이들을 한 지역으로 모아 '거주제한구역'인 홍등가 형성.
삼패들이 모여 살던 남상화당(시동 : 중구 입정동, 을지로 3가)
인근 대소룡동과 종현 저동(명동2가)에 모여 살게 한 경무청은
이주기간을 40일로 한정해 인근 초가집 값이 마구 급등하는 촌극.
높은 집값으로 인해 이곳에 이주한 여성들은
한 집에 5~7명이 함께 기거하면서 대문에
‘상화당’이란 문패를 써 붙이고 생활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기생들은
일본식 요정을 본 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비슷한 시기 형성된 일본식 유곽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조선의 기생문화를 싸잡아 공창으로 간주
교방의 명칭 또한 1914년엔 일본식인 권번으로 바뀌었다.
성매매 관점에서 조선시대 창기의 매음은
개인이 성을 파는 프리랜서의 개념이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도성 안 청루나
음방에서도 그 접촉이 매우 은밀했고,
색주가(色酒家, 술과 함께 몸을 제공하는 작부)를
만나려면 남대문 밖 잰배(현재 중구 순화동)나 홍제원
현재, 서대문구 홍제동과 같은 도성 바깥을 직접 찾아야 했다.
본격적인 집창의 개념은
고종 갑오년 이후 늘어난 매춘인구에 따라
남상화당과 같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1902년 관립의학교 교장 지석영은
이 같은 집창촌의 등장에 부쳐 “성병이 무서우니
각국의 법에 따라 기적(기생명부)를 편성하여
검미(檢微)할 것을 제창한다”고 제언했다.
집창촌의 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대두된 성병 문제는
이후 일제가 공창제로 기생을 관리하는 좋은 구실로 작용.
이는 조선시대 당대의 예술인이자 지식인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생의 몰락이자 추락이었다.
첫댓글 화당....정말 풍류적인 표현이군요...
예나 지금이나...남,녀관계는 떼어놀 수 없는 필연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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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사대문 안에는.,화당
한양 사대문 밖에는.,색주가.
정조 말 & 순조 ~ 구한 말. 고종.
배경무대와 시기는
그렇게.,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