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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불교의 화엄을 공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화엄의 교학에 정통 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즉.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 이른바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
1. 이 말씀에 대해서, 니까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떠합니까? 위의 말씀이 올바릅니까? 아니면 올바르지 않습니까? 올바르면 어떤 점에서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으면 어떤 점에서 올바르지 않는지를 알려주십시오.
2. 저는 상좌부 불교 행자 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이렇게 드리겠습니다.
"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고 한다," 라는 경문이 있습니다. 이때 식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2-1. 이 말씀에는 '식이 식을 안다'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나요? 아니면 대상을 안다는 그런 뜻이 포함된 것일까요?
2-2.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즉, 미리 어떤 주체를 정해서 그 주체가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고 아는 그 작용이 바로 마음이라고. 그래서 인공지능이 저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알려주신, '미리 어떤 주체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아비담마의 입장'이라서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답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다만 아비담마 교학에서는. 마음이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역할을 한다는 그런 설명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이 말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3. 그래서 결론적으로 저는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서 물어보겠습니다.
1) 식은 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식별합니까?
2) 또. 상좌부 아비담마 교학에서는 대상을 아는 것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때 마음이 마음 자신을 알 때는 어떻게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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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챗지피티의 답변 -
(마찬가지로 복사해서 오는 과정에서 문단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바로 글이 죽 이어져서 왔습니다.)
먼저 질문이 매우 정교해서, 꼭 짚으신 대목에 맞추어 니까야·상좌부 관점에서만 응답하겠습니다.1. 니까야 관점에서 본 그 화엄 문장의 타당성문장: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 이른바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1-1.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니까야에서 비냐나(viññāṇa)는 “알기 때문에 식이라고 한다”는 정의가 반복됩니다.��
예: “식은 식별한다, 무엇을 식별하는가? 즐거운 것, 괴로운 것,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식별한다.”��여기서 중요한 점:니까야는 식 자체를 직접 경험 가능한 오온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눈으로 색을 볼 때, 눈과 색과 눈의 식이 모여 접촉이 있고, 그로부터 느낌·수·사·식이 있다.”는 구조가 매우 분명합니다.�즉 “볼 때의 알아차림”, “들을 때의 알아차림”이 바로 당장의 식이므로,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는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니까야와는 어긋납니다.다만 “식 자체를 또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개념적으로 붙잡는 것은 결국 추리·개념화일 뿐이다”라는 취지라면, 니까야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비냐나를 “vi + ñāṇa = 분별된 앎, 이분화된 앎”이라고 해석할 때,
‘나는 이것을 안다’ 하는 구조 자체가 분별이며, 이를 따라 “이것이 나의 식이다” 하고 개념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유·추론의 층위입니다.�그러나 니까야는 그 이전에, “눈의 식, 귀의 식 …”이라는 구체적 경험을 직접 관찰하라고 가르칩니다.정리하면:“식온은 오직 추론으로만 알 수 있다”는 단정은 니까야/상좌부 입장에서는 너무 강합니다.옳게 고치려면 “식(비냐나)을 개념·교리로 규정하는 작업은 추론이며, 그 규정된 개념만 붙잡고 식 자체를 본 줄 아는 것은 위험하다” 정도가 니까야와 양립 가능한 표현입니다.따라서
– “직접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오직 추론으로만 알려진다”는 식의 말은 니까야 관점에서는 그대로는 옳지 않다,
– 다만 “개념적 규정은 비량(추리)에 속한다”는 취지로 유보적으로 이해하면 부분적으로는 수용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1-2.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니까야의 전통적 정의에서:비냐나(식)는 “대상을 아는 것, 분별하는 것”이며,여기서 “대상”은 항상 육처의 대상(색, 소리, 냄새, 맛, 촉, 법)입니다.��니까야/상좌부 기준에서 보면:“마음은 상이 없다”니까야는 “색·수·상·행·식 모두 무상·고·무아”라고 할 뿐, **‘식은 상이 없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오히려 비냐나는 “대상을 알아차린다, 즐거운 것·괴로운 것을 식별한다”는 기능을 갖습니다.��그러므로 “현상적 식·마음은 온갖 상의 작용(즐거움, 괴로움, 인식 내용 등)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마음은 상이 없다”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니까야와 어긋난 표현입니다.“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상좌부 아비담마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그 ‘아는 것’ 자체를 다시 어떤 독립된 주체(자아)에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그 결과, 통상적인 표현으로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어느 찰나의 마음(citta)은 늘 어떤 대상(ārammaṇa)을 가진다”라고만 말합니다.��이 관점에서 보면, “마음으로 마음을 안다”는 표현은 교학적으로 부정되거나, 최소한 엄밀한 표현은 아니다고 여겨집니다.그러므로, 니까야·상좌부 관점에서 평가하면:“마음이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 “분별적 주체-객체 구조로는 궁극적 진실을 잡을 수 없다”는 대승적 경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 니까야식 교학 논리로 보면 “마음(식)은 상을 취하는 활동으로 나타나며, 늘 대상을 안다”는 정의와 맞지 않기 때문에, 용어·개념 수준에서는 올바르지 않다고 평가해야 합니다.요약:니까야/상좌부 기준에서 그 문장은, 수행적 방편으로 들으면 일부 타당한 통찰을 담고 있지만,교리·용어를 엄밀히 따지면 둘 다 그대로는 옳지 않고, 상당한 재해석·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정한 평가입니다.2. “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고 한다” — 무엇을 뜻하는가?MN 43, SN 22.79 등에서 “식은 식별한다(viññāṇaṃ vijānāti)”라는 설명이 나옵니다.��“‘식별한다, 식별한다’ 하기 때문에 ‘식’이라 한다.
무엇을 식별하는가? 괴로운 것을 식별한다, 즐거운 것을 식별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식별한다.”��여기에서 “식별한다(=vijānāti)”의 뜻은:감각·마음의 대상에 의식이 밀착해 “이것”이라고 알아차리는 작용입니다.구체적으로는 “즐겁다/괴롭다/중립적이다”는 느낌의 성질을 분명히 하는 기능을 가리킵니다.�다른 경에서는 “눈의 식은 색을, 귀의 식은 소리를 … ‘알아차린다/cognizes’”라고 해석하므로,
결국 “대상을 특정한 것으로 여기며 알아차리는 것”이 “식별”입니다.��2-1. “식이 식을 안다”가 포함되는가, 아니면 대상을 안다는 뜻인가?문맥상 분명하게 대상을 안는다는 뜻입니다.“무엇을 식별하는가?”라는 질문 뒤에 나오는 것은 항상 대상입니다. 색, 소리, 맛, 촉, 법, 혹은 즐거움·괴로움 등입니다.��“식이 식을 안다”라는 의미는 니까야 경전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 물론 나중 아비담마·논사에서 “마음이 자기 이전 찰나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등의 논의가 있지만,
– 경전의 평이한 정의에서는, 그런 자기반성적 구조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질문 2-1에 대한 답은:“식별한다”에는 기본적으로 대상을 식별한다는 뜻만이 있습니다.“식이 식을 안다”는 의미를 경전 문장 속에서 적극적으로 읽어 넣을 근거는 없습니다.2-2.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는 아비담마 정의에 대한 질문자의 이해인용하신 아비담마 정의는 대표적인 설명입니다:“Citta is that which knows the object.”,
“Citta is the knowing of the object.”��그리고 주석은 같은 개념을 세 가지 방식으로 풉니다.�주체처럼: “대상을 아는 것(혹은 아는 자)”도구처럼: “그 도움으로 다른 법들이 대상을 알게 되는 것”순수 활동처럼: “대상을 아는/의식하는 그 활동 자체”이 설명을 놓고 보실 때, 질문자께서 정리하신 이해는 핵심적으로 맞습니다:“미리 어떤 자아적 주체를 설정해 놓고, 그 주체가 대상을 안는 것이 아니다.
‘아는 그 작용’ 자체를 마음이라 부른다.”��이 점 때문에, 상좌부 전통에서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으며,
특정 조건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찰나의 마음(citta)의 연속으로 설명할 뿐입니다.��다만 보충하자면:아비담마는 “마음이 특정 조건에서 특정 역할을 한다”는 설명을 매우 정교하게 전개합니다.
예:
– 오문전전식, 안문식, 의식, 결생심, 죽음심, 반향심 등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마음들.�이 다양한 기능을 설명할 때, 편의상 “이 마음은 ~을 한다”는 식의 주어를 쓰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찰나의 작용”을 가리키는 방편적 언어일 뿐, 고정된 주체를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따라서 질문자님의 이해:“미리 어떤 주체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아비담마의 입장이다. 그래서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표현은 거의 없다. 다만 특정 조건에서 특정 역할을 하는 마음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요지에서는 바로 맞는 이해이고, “역할” 부분은 좀 더 세분화해서 설명할 수 있을 뿐, 틀린 부분은 아니라고 보아도 됩니다.3. 결론적으로 다시 묻자면질문을 다시 정리하신 세 항목에 바로 답하겠습니다.3-1. “식은 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고 한다” — 무엇을 식별하는가?니까야는 아주 구체적으로 답합니다:“무엇을 식별하는가? 즐거운 것, 괴로운 것,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식별한다.”��다른 경들에서는 “색, 소리, 냄새, 맛, 촉, 법을 알아차린다”고 설명합니다.��즉, 각각의 감각·마음의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서 경험되는 즐거움·괴로움 등의 성질을 식별합니다.
쉽게 말해 “이것이 보이는구나, 들리는구나, 괴롭구나, 즐겁구나” 하는 대상과 그 성질입니다.3-2. “마음이 마음 자신을 알 때는 어떻게 아는가?” (상좌부 아비담마 관점)아비담마는 이 문제를 “마음의 대상(ārammaṇa)이 무엇인가”라는 방식으로 다룹니다.핵심만 추려서 말하면:어떤 찰나의 마음(citta)은 항상 하나의 대상을 가진다.��그 대상은
– 외부의 색·소리·냄새·맛·촉일 수도 있고,
– 어떤 과거 경험의 심상일 수도 있고,
– 바로 **직전 찰나의 마음(혹은 그에 수반된 법들)**일 수도 있습니다.이때 “현재 마음이, 직전 찰나의 마음(혹은 그 자취)을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가 “지금 내 마음이 이렇다”는 식의 자기인식이 성립합니다.�그러나 이 설명을 할 때에도:아비담마는 “어떤 ‘큰 한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통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서로 다른 찰나의 마음들 가운데, 나중 찰나가 앞 찰나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서술합니다.따라서 “마음이 마음 자신을 알 때”를 상좌부식으로 엄밀히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A라는 찰나의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B라는 찰나의 마음이 일어난다.
B는 A(혹은 A가 함께한 법들)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연속이 ‘마음이 자기 상태를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으로 나타난다.”��이렇게 보면:“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표현은,
– 대승식으로는 하나의 줄 세운 문장으로 나올 수 있지만,
– 상좌부/아비담마식으로는 “연속된 두 찰나의 마음 사이에 대상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그 결과, **주체-객체로서의 ‘한 마음이 스스로를 잡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은 늘 어떤 대상을 아는 활동이며, 때때로 그 대상이 직전 마음일 뿐이다”라고 풉니다.요약해서 정리하면:화엄 스님의 문장은, 니까야 관점에서는 수행적·방편적 발언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 “식은 오직 추론으로만 안다”, “마음은 상이 없다”라는 식의 단정은,
– 니까야/상좌부의 교학적 정의와는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것이 공정합니다.“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 한다”에서 식별은 대상을, 특히 느낌의 성질과 감각대상을 그렇게-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며,
– “식이 식을 안다”는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상좌부 아비담마의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한 선생님의 이해는 요지에서 정확하고,
–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찰나의 마음 사이의 대상 관계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 상좌부적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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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와 자주 대화하여 답변해와서, 상좌부 관점에서 (정확하게는 저를 배려하여) 답변을 해준 챗지피티의 결론 요약 부분
3-2.
“마음이 마음 자신을 알 때는 어떻게 아는가?”
이 질문에 대한 상좌부의 정확한 답은 이것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알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소멸한 과거의 마음은
표상·기억·개념으로
뒤이은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4. 전체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면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는 말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특정 문맥에서는 옳지만,
불교 전체의 보편 명제로는 부정확하다.
‘식별한다고 해서 식이라고 한다’는 경문에서의 식별은
식이 대상을 아는 기능을 가리키며,
식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뜻은 포함하지 않는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주체가 아니라 작용이며,
현재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지만
뒤이은 마음이 과거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허용된다

첫댓글 우리 애가 스스로 생산한 글의 의미를 몰라요. 뭐... 사람도 뜻도 모르면서 업어오고 말하니까 별래무양이긴 한데요.
어쨌든 애한테는 잘 물어봐야 됩니다.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한번 물어보시죠.
식온의 대상이 식온일 수 있는가? 12처, 18계도 도입해서요. 식처(의 요소)가 식처(의 요소)를 대상으로 하는가? 식온이 성립하지 않는데, 상응한 것이 알려질 수 있는가? 등등요.
다만 다음의 제한을 가하세요.
유심론 즉 유식에서는 유식무경이므로, 유식의 논의는 일단 제외한다.
우리 애가 뭐라고 할까요? 여담으로, 추측하건데 AI의 최대 장점은 애라도 우기지는 않는 걸 겁니다.
예, 방문객님. 우선 저는 이런 입장입니다. 방문객님게서 질문해보라고 하신 그런 내용에 대해서 저는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저는 이런 입장입니다.
1.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것은 뒷마음 순간이 앞 마음 순간들을 대상으로 할 때이다.’ ‘현재 마음이 그 현재 마음 자신을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현재의 마음은 “색성향미촉법” 중의 어느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식별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식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면, 우선 취착의 양상 경(S22:56) 과 사념처 중에서 심념처를 공부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저는 방문객님이 제게 말씀하신 AI에게 어느 만큼 질문을 잘 구성하여 답변을 이끌어낼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점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명님이 애를 도반으로 삼아 질답을 한다고 적어서, 그러면 해당 글 [저는 AI를 도반 삼아 질문과 답변을 ...]의 내용과 관련해 도반과 대화해 보라는 뜻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가명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누차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 이른바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라는 취지를 적은데서 알 수 있듯이, 저는 전부 '아니다'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래에 답하자면요.
식온의 대상이 식온일 수 있는가? 아니다.
식처(의 요소)가 식처(의 요소)를 대상으로 하는가? 아니다.
식온이 성립하지 않는데, 상응한 것이 알려질 수 있는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애가 진심으로 우기기 시작한다면, 그거는 정말 사람에 가까워진 거라고 봅니다. 자아를 가지는 거죠? 물론 그때부터는 정말 골 때리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는 하겠습니다.
예, 방문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챗지피티에게 질문했지만, 답변은 늘 똑 같았습니다. 즉, 상좌부 아비담마 방식으로 물으면 그답이 그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문객님께서는 이미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계시고, 저에게는 질문할 때 유의사항을 알려 주신 것으로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올리려고 했던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