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릉은 형식이 매우 특이한 것이어서 다른 왕릉과는 달리 평소에 보고 싶었던 무덤이었습니다. 봉토 아래로 가공한 돌을 빙둘러서 5단 정도 샇고 그 위에 질서 정연하게 가공된 돌을 수십 개를 호석으로 기대놓았습니다. 고구려 장군총에 있는 11개의 호석만큼 큰 것도 아니지만, 가공된 돌을 빙둘러 놓은 것은 이 무덤이 축조된 시기에 무덤이 자주 붕괴되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좀 더 진전된 무덤 축조 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고구려 무덤의 영향이 일정하게 있고, 또 12지 신상이 있지 않아 신라 말기의 무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7세기 무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듯합니다.
삼국사기에 신문왕의 무덤이 낭산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낭산 동쪽에 있는 무덤이라면, 현재 이름이 붙은 효공왕릉, 진평왕릉, 신문왕릉 3개가 있습니다. 진평왕릉은 낭산의 동북쪽이고 거리가 멀어서 신문왕릉 후보가 될 수가 없고, 효공왕릉은 그 형태가 매우 단순한 봉토석실분으로 형식상 오히려 더 후기일 가능성이 많아 현재의 신문왕릉이 곧 기록에 나오는 신문왕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덤의 형식이 신문왕이 죽은 연대인 692년 무렵의 것인지 보려고 방문한 것입니다. 신라왕릉의 주인공이 대체로 혼동된 상태지만, 이 무덤 만큼은 대체로 신문왕릉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신문왕릉을 본 후, 곧장 사천왕사를 보려고 했는데, 표지판이 없어서 그만 능지탑으로 곧장 가고 말았습니다. 능지탑은 낭산의 북쪽에 해당되어 먼저 보려던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를 보려면 다시 남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먼저 차를 능지탑에 주차시켜 놓고 능지탑을 차분히 구경했습니다. 1980년에 복원된 능지탑은 주변에 석재가 많이 남아서 원형 그대로 되었다고 볼 수가 없지만, 현재의 형태는 매우 특이한 모습이었습니다. 상하층 2층의 형태를 갖고 있는데, 각 층의 낙수면은 잔디로 처리하고 있어서 탑이라고 말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1층에는 옥신에는 각 면에 3개씩 12지 신상이 배치되어있는데, 몇 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황수영 박사가 문무대왕의 화장지를 고문외정(庫門外庭)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을 능지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곳이 화장터와 무슨 관련이 있을지 참 보면서도 난감했습니다. 그냥 탑은 좀 특이한 형태의 이형탑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박홍국 박사님도 능지탑 주변에 금당터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냥 지나친다면서 이 탑을 절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절에서 문무대왕을 화장하고, 그 기념으로 이 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능지탑을 좀 자세히 살펴본 후, 제베님, 윤영희님과 함께 걸어서 선덕여왕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길이 없어서 갈대숲을 헤치고, 소나무숲을 지나서 선덕여왕릉을 만났습니다. 무덤은 봉토분으로 둘레에 작은 돌로 호석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덤 앞에서 남자 한분과 여성 두분이 앉아서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윤영희님 말처럼 8월 15일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장제일(매월 음력 18일)이었기 때문에 지장보살을 위한 예불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장보살과 선덕여왕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한번 불교공부를 다시 깊이 하게 되면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어쨌든 선덕여왕릉을 본 후, 낭산에서 내려와 사천왕사지를 찾으러 내려왔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선덕여왕은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답니다. 신하들이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짐에 따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것을 불교 교리를 깨닫게 되어 선덕여왕의 지혜가 남달랐다는 일화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기억에만 의존하여 무조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지가 있을 줄 알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 되었던 것입니다. 남쪽이 아니라, 거의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길도 없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반바지를 입은 제베님은 아마도 몇 번 가시에 찔렸을텐데, 지금 생각해도 저의 실수였습니다. 고생끝에 마을로 내려와서 사천왕사터를 찾았지만 방향이 틀렸기 때문에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철길 주변에 사천왕사가 있다는 생각에 방향을 서북으로 돌려서 철길 주변을 걷다가 드디어 터를 찾았습니다.
거대한 주춧돌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철길가에는 건물하단부가 좀 드러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구멍이 뚤린 주춧돌 16개가 모여 있는 곳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거대한 불상이나, 탑을 만든 곳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아마도 탑의 주춧돌인 듯 했습니다. 크기도 주변 4미터 이상으로 꽤 컸습니다. 하지만 사천왕사터에서 그 유명한 귀부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허탕을 쳤는데, 나중에 아혜모호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귀부가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고 합니다. 사천왕사는 유명한 양지스님이 만든 사천왕전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박홍국 박사님은 사천왕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이야기하셨는데, 이화여대 박물관 나선화 박사는 양지스님을 인도의 기술자로 보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전에서 본 일이 있는데, 너무 뛰어난 작품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꼭 외국인이 만든 것일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듭니다.
사천왕사지 맞은편에 망덕사지가 있고 그곳에 당간지주가 유명한데, 그곳은 그냥 치나치고 철길을 따라서 다시 능지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능지탑에서 우리는 윤영희님의 차를 타고 진평왕릉으로 갔습니다. 걸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길이 있는 듯하니 차 한대만 움직여서 가보자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뜻밖에 길을 잘 찾아서 쉽게 진평왕릉 앞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진평왕릉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무덤이라서 장난기가 발동하여 나는 무덤에 올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무덤 위에 올라가서 본 풍경이란, 참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진평왕릉은 겨우 높이가 7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낭산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벌판은 참으로 기름져 보였습니다. 연두색 논을 보면서 과연 경주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만한 고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평왕릉 앞에는 몇 개의 석물이 놓여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돌로 만든 제상옆에 돌로 만든 의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의자에 과연 누가 앉여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다른 무덤 앞에서는 볼 수 없는 의자였습니다.
진평왕릉을 보고 다음 목적지인 낭산 동북쪽의 황복사지로 갔습니다. 그런데 황복사지로 가는 길은 진평왕릉에서 곧장 직선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길 옆에는 수로가 있었는데, 물이 꽐꽐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주의 풍요는 바로 이 물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황복사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탑은 석가탑처럼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잡힌 소박한 탑이었습니다. 탑 주변에 마을에서 세운 4개의 목장승이 있었는데, 장승과 탑이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탑 주변에는 분명 건물지가 있으리란 생각으로 주변을 약간 돌아다녔는데, 건물지로 추정될 돌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황복사지를 본 후, 윤영희님의 안내로 일정교를 보러 갔습니다. 일정교는 국립경주박물관과 월성 사이 길에 남천에 있었습니다. 월정교와 달리 남천으로 접근이 용이해서 남아있는 석재를 밟고서 남천의 한 가운데 다리 기둥터로로 갈 수 있었습니다. 참 기초를 단단히 한 다리였습니다. 남천의 물은 매우 맑았습니다. 서울의 개천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월정교를 끝으로 15일의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녁때가 다 되었으므로, 윤영희님은 이제 댁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제베님과 함께 경주시내로 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민족문제를 비롯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7시반경에 제베님과 노서동 고분군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노서동 고분군 주변의 여관에 숙소를 정한 후, 나는 잠시 목욕을 하고 조금 쉬다가 다시 경주 시내로 나왔습니다. 밤 거리에 경주 시내는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자 젊은이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서 어제 손영미님이 제게 보여준 경주박물회에서 나온 답사자료집을 읽었습니다. 이 답사자료집은 유홍준의 경주 책이나, 경주에 내려오기 전에 보았던 다른 어떤 답사자료보다 더 현장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집을 재미있게 읽느라고 조금 늦은 시간에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16일 아침 7시에 눈이 떴습니다. 곧 짐을 챙기고 나와서 노동동 고분군을 갔습니다. 왜냐하면 아혜모호님이 봉황대 꼭대기에서 대릉원을 봐야 진짜 신라 고분군을 볼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서봉황대 꼭대기에서 본 경주는 색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몇장 찍고 내려와서 아침 식사를 한 후, 곧장 김유신 장군묘로 걸어갔습니다. 아침 산책을 한다는 생각으로 걸었더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김유신 장군묘에 들려 보니 12지 신상이 둘러져 있는 멋진 무덤이었습니다. 가히 흥덕대왕이라 불렸던 그의 위상에 걸맞는 무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무덤도 김유신 장군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무덤을 구경하고, 무덤 아래에 숭무전이란 곳을 구경했습니다. 최근에 조성하기 시작한 것인지, 내부로 통하는 문이 닺혀 있고 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는데, 아마도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을 기리기 위한 장소인 듯 했습니다.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천천히 다음 목적지인 선도산 무열왕릉을 향해 걸었습니다.
꽤 먼 거리겠구나, 혹 버스가 지나가기 않나, 택시라도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자동차 한대가 내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계속)
첫댓글 윤영희인데요. 박 광국박사님이 아니라 '홍국' 입니다. 박사님이 보셨으면 섭섭하셨겠네요. 호호...
이런 실수가. 그 분이 주신 명함을 다시 보니 확실히 잘못이군요. 앞서 올린 글에서도 모두 다 고쳐놓겠습니다. 혹시라도 박사님이 보시면 윽! 이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광국이란 이름이 어디선가 낯익어서 그런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