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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
요한복음 3:27-30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우리는 참된 위대함에 대해 어떠한 정의를 내립니까? 누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을 위대하며 큰 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평가하셨습니다.
[
9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례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9-11)
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주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13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 1:13-16).
즉,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 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세례 요한의 삶을 통해 분명히 발견하는 것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돈을 많이 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한 벌 옷과 하루 먹을 석청만 있던 가난한 자였습니다.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위를 지니고 또한 정치적인 권력을 지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권력 앞에서 목 베임을 당할 만큼 아무런 힘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주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세례 요한을 귀하게 여겼지만 그 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세상의 찌꺼기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브리엘 천사 및 주 예수께서는 왜 세례 요한을 큰 자라고 하였습니까? 그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 요인을 세 가지로 나누고 마지막 한 가지는 더욱 깊게 상고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참, 요 1:19-23).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내려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네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
“아니라.”
“그러면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대답하라. 너는 네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하느냐”
이때 세례 요한이 분명하게 답변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께서 그리스도로 오시는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살던 주후 1세기 때에는 유대 땅 대부분의 길이 곧지 않았습니다. 큰 행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어느 동네에 방문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미리 앞서 가서 왕의 마차가 가는 길을 넓히며 곧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위대한 자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고,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그 길을 미리 닦는 심부름꾼이요 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 선지자’나 또는 ‘그 말씀’이 아니라 ‘그 선지자’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일 뿐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교만하여지거나 거만해져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는 가운데 주께서 정하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나는 소리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이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한 소리일 뿐이다.”
그는 이러한 의식을 늘 지니고 자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점에서 주 앞에서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 앞에서 받은 소명은 무엇입니까? 아직 주의 소명이 없다면 방향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소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먹고 사는 경쟁에 치여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복음의 소명을 받고 나아가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에 함께 하십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며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어느 곳에서든 주께서 부르신 소명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면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주의 소명을 잃고 자신의 명예와 세력과 영광과 배를 위한다면 그는 본능으로 사는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품고 그 소명을 위해 달려갈 때 급속하게 성장합니다. 소명이 있으면 영혼이 소성하게 되고 소명을 잃으면 그 삶은 목적을 잃고 방황합니다. 주님이 주신 소명, 곧 사명을 받아 사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야망인지 소명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야망은 내 개인을 위하여 공동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야망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악착같이 자기만 살려고 합니다. 야망의 사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힘과 영역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끝없는 경쟁 심리와 질투가 그들의 마음과 삶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개인의 야망을 지닌 자들은 교만과 함께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소명을 가진 자는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립니다. 언제나 양보하며 덕을 세웁니다. 가족을 살리며 교회를 살립니다. 나아가 민족과 나라를 살립니다.
따라서 야망의 사람과 소명의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많이 맺혀 있으면 소명의 삶을 산 것이고, 그렇지 않고 썩은 열매, 죄의 열매가 많이 맺혀 있으면 개인의 야망을 위하여 살아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룩과 사랑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있으면 소명의 삶을 살아온 것이고, 그렇지 않고 시기와 미움과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서 마귀를 닮아있다면 야망을 위해 살아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야망은 그 사람이 죽을 때 심판을 자초하지만 주님이 주신 소명으로 산 사람은 그 사람이 죽을 때 영원한 영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에 그는 주 앞에서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특이한 훈련을 받았고 그 훈련을 합격했습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주의 백성들이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직접 맞이하게 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마침내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시켜야 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훈련은 전혀 세상에 물들지 않는 훈련이고, 또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훈련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세상을 본받지 않는 훈련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인내와 거룩함과 담대함의 특별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훈련은 광야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오랫동안 홀로 지내며 그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깊은 광야에서 주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내려놓는 겸손을 배웠으며, 세상의 명예와 영광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겸손의 비밀은 광야에서 주님과 오랫동안, 그리고 깊게 교제하는 훈련을 쌓은 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받고 통과한 점에서 세례 요한은 주 앞에서 위대한 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에서 그가 왜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흥하여야하겠고나는쇠하여야하리라
](요 3:27-30).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고백은 내가 받은 은사, 위치, 사명, 존재 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마음 자세를 나타냅니다.
사실, 요한은 그 당시 헤롯 왕의 아성을 견줄 만큼 대단한 인기와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그는 그리스도로 여겨질 만큼 엄청난 신임과 지지를 받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결코 잊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그는 그의 사명을 이끄는 깊은 진실한 동기를 고백합니다. 그 동기는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라는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결코 주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빼앗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각오와 결단입니다!
바로 이 정신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분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광야에 있든 궁궐에 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진심으로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영광을 얻지 않고 오직 주께만 영광을 돌리겠다는 자세를 지니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드러나지 말고 그분이 드러나야 하리라.”
“그분이 받을 영광을 내가 가로채지 말고 오직 그분만이 영광을 받게 하리라.”
이에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의 손가락을 언제나 그리스도만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누가 주의 참된 종입니까? 설교가 마친 후에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종입니까 아니면 설교자 자신이 청중의 마음에 새겨지는 목사겠습니까? 누가 주의 참된 신자겠습니까? 내 대신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해 주신 주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내 삶과 모든 것을 다 주께 드리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작은 자들은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가짜 신자들은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며 자기 세력을 쌓고자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 그들은 어느새 주의 영광을 가리고 흉측한 질투와 미움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그들 삶에는 주 앞에서 책망 받을 일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돈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자신의 세력 확장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이런 경우 그는 거짓 종이거나 거짓 신자며 혹시 주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기저귀를 찬 갓난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오직 주께만 영광 돌리려 한다면 그가 바로 참 종이요, 참된 신자이며 세례 요한처럼 성숙하고 위대한 주의 자녀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외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 3:11).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 인식하기를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주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을 향할까 두려워하면서 철저하게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였습니다. 오직 그분을 지시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크고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정신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남을 섬기는 겸손한 자가 하늘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또한 겸손한 자의 삶의 특징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 18:5).
왜 어린 아이 같이 연약한 자까지 섬길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겸손을 훈련 받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훈련 받은 세례 요한처럼 온전히 주 예수님과 복음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손가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행하는 모든 예배와 교제와 교육과 선행과 발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구원 얻는 복음을 알려주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분량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내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감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께서 그들을 높이시니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 앞에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끝까지 겸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그 인생 가운데 자랑하며 증언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지닌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존되고 든든히 서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섬김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수고가 되기 바랍니다. 내 텃세, 내 영광, 내 영향력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한다면 그것은 정치이지 세례 요한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그대로 거두도록 하실 것입니다.
[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7-8).
그러므로 하나님이 위대하게 보시는 것은 은사나 재능보다 그들이 그 은사와 재능으로 누구를 높이는지를 보십니다. 즉, 진실한 동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한 동기라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자이니 주 앞에서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주를 높이기 위한 동기라면 그의 은사가 작고 재능이 부족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없더라도 그는 주 앞에서 큰 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님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인정받는 것만이 그분의 삶의 모든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욱 율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겠다고 형성된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신앙적인 사람들로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의 동기는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우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
주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동기가 어떤 영광을 구하느냐에 따라 그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니면 거짓 믿음인지 나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주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은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42절을 보니,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종교적인 행사를 하더라도,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더라도, 만일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신앙 생활은 참된 신앙 생활이 아니며,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간교한 심보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 생활은 단지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하고 드러내기 위한 종교 놀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직 참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믿음의 본질이며 복음의 본질입니다. 사람에게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온 맘으로 주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하며 가장 위대한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삶의 끝은 언제나 불신과 비참과 미움, 그리고 죽음과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5장 26절과 1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분쟁과 미움이 발생하는 가장 구체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싸움과 미움과 경쟁과 분열의 뿌리에는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다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참된 하나됨과 성령의 사랑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분명하게 시기와 이기심을 경고했습니다.
[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3:14-16)
여기서 다툼은 헬라어로 (에리쎄이안)인데 다툼이라는 뜻이 있고 또한 이기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시기, 그리고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지체들 간에 다툼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그런 교회는 신속히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한 교회의 교우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명예 심리가 가득합니다. 교회 직분이 사람의 영광이 되어서 교우들은 장로와 권사가 되려고 온갖 정치와 뇌물과 아첨을 합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런 교회는 서서히 세상 불신자들의 모임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야고보서 2장을 보면 타락한 교회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오면 “어서 오세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라고 하고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오면 “여기 섰던지 내 발등상에 있던지 그렇지 않으면 꺼져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타락한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보며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
우리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 6:1, 2, 5, 16).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25).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상은 이미 너희가 받았느니라”(마 6:5).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람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무한히 낮추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무한한 고난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신앙 생활일진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마음 자세는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은 거듭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구절은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여 그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그 마음이 변화된 자, 즉 마음에 할례 받은 자가 진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할례 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삶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 받은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동기가 오직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주의 영광을 구하는 진정한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찌 땅에 속한 썩을 헛된 명예와 영광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식 소리를 들어 봅시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너희들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도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헛된 영광을 구하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이러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기도를 합니까? 혹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인과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눈물 흘리며 애통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음이 되면 그때야 참된 하늘의 자유와 안식과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참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결국 두 영광 가운데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두 영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진실한 삶이 될 것이지만,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위선자가 되고 마침내 썩을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결국 헛된 영광을 얻고는 영원한 부끄러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을 구하는 자는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살전 2:6)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자원하여 동참하는 것이 참된 영광의 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낮은 자리에 스스로 처하길 힘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참된 영광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심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심한 희생과 고난을 택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과 승천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영원히 앉게 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 영광은 영원히 찬란한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은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며,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영광의 열매를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지금 이 예배 시간에 십자가에 못박기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착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사명을 가진 삶을 살고, 그 사명을 위해 모든 경건의 훈련에 힘쓰며, 무엇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