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타계 ← Rainier III, Prince of Monaco
2005년 4월 6일(현지시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가 향년 81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반세기 전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으로 세기의 로맨스를 만들었고, 60년 가까운 통치 기간 모나코를 세계적인 금융, 관광 중심지로 발전시킨 주역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23년 5월 31일 모나코 공국의 샤를로트 공주와 피에르 드 폴리냑 백작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스위스, 프랑스에서 문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인 1944년 프랑스군에 자원 입대, 알자스 탈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또 전후 베를린에서 프랑스 정부의 일원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대령으로까지 진급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1949년 조부인 루이 2세가 서거한 뒤 왕위를 이어 받았다.
1956년 4월 18일 미모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은 그와 모나코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는 이 결혼으로 레니에 3세 부부는 선남 선녀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그레이스 왕비가 1982년 교통사고로 숨지는 불행을 겪었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알베르 왕자, 카롤린 공주, 스테파니 공주를 뒀다.
그는 결혼으로 인한 유명세 등에 힘입어 관광, 금융, 도박 산업 중심으로 모나코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고 국제적 위상도 높여갔다. 특히 1990년대에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도박 산업 의존도를 4% 대로 낮추며 산업 구조의 변화를 이뤄냈다. 1974년엔 국제 서커스 대회를 창설해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행사로 발전시켰다. 1962년 헌법을 개정해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민회의와 권력을 공유했고 군주의 통치신성권 원칙을 폐지하는 등 정치개혁도 이뤘다. 1993년엔 모나코를 183번째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조선
[1999년] 500여년 전 잉카 어린이 미라 발견
500여년 전 잉카인들이 종교 제례의 희생물로 바친 소년, 소녀들의 미라 3구가 아르헨티나 북부 안데스 산맥에 있는 룰라이랄코 화산(해발 6700m) 정상에서 1999년 4월 6일 발견됐다. 1구는 소년이고 2구는 소녀인 미라들은 솜털과 머리카락까지 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편히 잠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피부 뿐만 아니라 심장과 폐의 혈액, 콩팥 등 내장기관이 완전하게 보존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팀 팀장은 "미라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DNA 테스트에서 정확하게 밝혀질 것"이라며 "제물로 바쳐진 뒤 폭설과 강풍이 몰아치는 산 정상에 남겨져 그대로 동결됐기 때문에 형체가 완전히 보존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라들이 종교의식의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부장품들 때문이다. 제단에는 금, 은, 조개로 만든 35개의 작은 조각들 및 정교하게 짠 천조각, 신발, 육포 따위의 음식을 담은 도자기들도 함께 발견됐다.
[1973년] 경주 155호 고분 발굴 시작 ← 경주155호 고분발굴 현장.
1973년 4월 6일부터 김정기 박사를 단장으로 한 고분발굴 학술조사단이 155고분 발굴에 착수해 9월 20일까지 5개월 반 동안 신라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각종 유물 1만1천2백97점을 출토했다. 유물 중 특히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새 날개 모양으로 만든 금제관식 2점, 자작나무 껍질로 짜서 천마도를 그린 장니 한 벌, 서조도와 기마인물도 등이다.
7월 15일에는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발굴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천마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시대의 회화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천마도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마구장비(馬具裝備)에 그린 장식화로 5~6세기 신라시대 그림이다. 천마도가 그려진 채화판은 마구의 일종인 장니로 추정된다. 중앙에 흰색으로 천마도를 그렸고 가장자리는 흰색, 붉은색, 갈색, 검정색 선으로 인동당초문을 장식했다. 천마는 흰 말이 말갈기와 꼬리털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다.
천마도는 국보 207호로 지정됐다. 천마도와 같은 양식의 그림이 만주 집안현에 있는 5~6세기 무용총 천장벽화에도 남아 있어 고대 삼국문화의 상호관계를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1958년] 파머, 마스터스 골프 대회 첫 우승 ← 파머(1984)
1958년 4월 6일 미국 프로 골프 선수 아널드 파머가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서 열린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이 대회에서 4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파머는 1954~75년 미국 프로 골프인 협회(PGA)가 공인하는 61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한 미국 오픈 골프 선수권대회, 영국 오픈 골프 선수권대회에 이어 1980, 1981년에는 PGA 시니어 오픈 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하는 등 세계 골프계를 주도했다.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난 그는 아널드파머사의 사장으로서 기업체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1950년] 농지개혁 실시
1950년 4월 6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농지개혁법은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5일 이승만 정부가 국회에 법안을 제출했으나, 지주출신 국회의원들의 반대, 그리고 정부와 국회의 의견출동 등으로 2차례에 걸친 법개정 공포의 파란을 겪었다.
이 농지개혁법은 수확물 평년작의 1.5배를 5년간에 걸쳐 지주에게 균분(매년 수확물의 30%씩) 상환함으로써 소작농에게 농지소유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시행 시점이 해방후 5년이 지난 뒤여서 그동안 많은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사적으로 땅을 팔았을 뿐 아니라 농민들이 광복 직후부터 줄기차게 바라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거부하고 유상몰수·유상분배를 실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부담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농지개혁 착수 2개월여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인플레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육성하지도 못했고, 지주들을 산업자본가로 키우지도 못했다./조선
[1943년]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출간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Saint-Exupery, Antoine de, 1900~1944)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발표한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1943)는 작자 자신이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서 독특한 시적 세계를 이루고 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인 나는 이상한 소년을 만나 양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소년은 애인인 장미꽃을 제가 사는 별에 남겨 두고 여행길에 오른 왕자로서 몇몇 별을 순례한 후에 지구에 온 것이다. 외로운 왕자에게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나서,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다른 존재를 길들여 인연을 맺어 두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왕자는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장미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에게도 실망한 왕자는 내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시적이며 고귀한 분위기 속에 지혜를 짜낸 휴머니스틱한 작품이다. /naver
[1936년] 시인 신경림(申庚林) 출생 ← 2009년 호암상을 수상하고. 왼쪽에서 두 번째.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恨)과 울분을 노래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석상〉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곧 건강이 나빠져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휘문출판사·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한때 절필하기도 했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원격지〉(동국시집, 1970. 1)·〈산읍기행〉(월간다리, 1972. 8)·〈시제 詩祭〉(월간중앙, 1972. 12) 등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초기시에서 보여준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막연하고 정체된 농촌이 아니라 핍박받는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했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 農舞〉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우리들의 북〉(1988) 등을 펴냈고, 그밖에 평론으로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창작과 비평, 1972. 6)·〈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마당, 1982. 6)·〈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오늘의 책, 1984. 3) 등을 발표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92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브리태니커
[1928년] 미국의 유전학자·생물물리학자 웟슨(James Dewey Watson) 출생 ← James Dewey Watson
"크릭과 내가 DNA 연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너무 시기상조라며 그만둘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는 식의 정해진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일을 할 때 비로소 무엇인가 기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 제임스 웟슨
웟슨은 유전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생화학자이다. 1950년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모리스 윌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 라이너스 폴링, 프랜시스 크릭 등과 함께 DNA의 구조를 해명하는 연구에 참가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실험으로 이미 DNA가 2개의 끈으로 이루어진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었으나, 연구는 답보 상태였다. 이를 좀더 진척시키려는 웟슨과 크릭의 실험은 실패했고, 연구소에서는 연구를 중지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밀리에 실험을 계속한 끝에, 1953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해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 성과로 웟슨과 크릭, 윌킨스는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후 웟슨은 하버드대학교,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등에서 가르쳤고, 1968년에는 뉴욕의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어 분자생물학 분야를 크게 발전시켰다. 1988~92년 학문적 성과와 행정적 역량을 인정받아 인간 게놈 계획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일하기도 했다.
[1917년] 국문학자·한문학자 이가원(李家源) 출생
1917. 4. 6 경북 안동~2000. 11. 9 서울.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한문학·중문학·동양철학 분야의 수많은 고전을 알기 쉽게 풀이했다. 본명은 참연(慙淵). 아호는 연민(淵民).
이황의 14세손으로,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23세까지 한학만을 배웠다. 이때 배운 한학은 뒤에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서울로 올라와 명륜전문학원에 입학했으며, 재학시절 '사서연구회'를 만들어 〈삼국유사 신역(新譯)〉(1946)을 펴냈다. 1952년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54년 동 대학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총장이었던 김창숙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여 파면당했다. 그 뒤 날마다 국립도서관에 나가 실학에 관한 자료를 찾아 자료집 〈실학연구지자〉를 만들었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3년 동안 재직했다. 1959년 문교부국어심의회 위원, 1960년 한국교수협회 간사, 1962년 한국어문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 이사를 지냈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에서 〈연암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74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1978년 퇴계학연구원 이사 등을 지냈다. 1983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대 교수가 되었고, 이후 석좌교수를 지냈다. 1986년 그동안 애써 모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원본, 정선의 산수화 등 3만여 점의 골동품과 서화를 단국대학교 부설 퇴계학연구소에 기증했다. 대표 저서인 〈연암소설 연구〉는 박지원 소설의 사회배경과 문학관을 10여 년 동안 고찰·분석하여 4년 동안 집필한 끝에 펴낸 책이다. 그밖에 〈금오신화역주〉(1953)·〈중국문학사조사〉(1959)·〈한국한문학사〉(1961) 등을 포함하여 1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1986년 정음사에서 〈이가원전집〉 22권을 펴냈다.
[1909년] 피어리, 북극점 도달 ← Robert Edwin Peary
1909년 4월 6일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Robert Peary)가 최초로 북극을 탐사해 북극점에 도달했다. 그는 1893~94년의 1차 탐사에서 그린란드 북동지역을 썰매로 여행했다. 1898~1902년에 그린란드 북서부 잉글필드랜드에 있는 엘즈미어 섬의 포트콘거로부터 북극까지의 통로를 정찰하고, 1905년 2차 시도 때 엘즈미어 섬의 셰리든 곶까지 항해했다. 1909년 피어리는 3번째 시도를 위해 동료인 매슈 헨슨를 비롯해 4명의 에스키모인들과 함께 컬럼비아 곶을 떠나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했다.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은 거의 보편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당시 탐사일기와 문서를 살펴보면 피어리는 실제 극점에서 50~100㎞ 못 미치는 곳까지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브리태니커
[1901년] 감리교 목사·부흥사 이용도(李龍道) 출생
1901. 4. 6 황해 금천~1933. 10. 2 함남 원산.
호는 시무언(是無言). 금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에 개성 한영서원(지금의 송도고등보통학교)을 졸업했다. 한영서원 재학시절 3·1운동 및 기원절 사건(1920), 불온문서 사건(1921), 태평양회의 사건(1922)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 복역했다. 그후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인 A. W. 왓슨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협성신학교 영문예과에 입학, 1928년 졸업하여 강원도 통천읍교회에서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 6월 서울로 파송되어 순회부흥사로 헌신했다. 이때부터 평양중앙교회를 비롯 전국에 걸쳐 교회부흥에 힘썼으나 무교회주의자로 몰려 장로교의 황해노회에서 금족령(禁足令)을 받기도 했으며,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로부터 한준명·이호빈·백남주·황국주 등과 함께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1933년 2월 해주남본정교회를 끝으로 부흥회를 마감했다. 그는 특히 교인과 교회의 회개 및 조선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1933년 6월 평양에서 '예수교회'가 창설되어 초대 선도감으로 선출되었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33세의 일기로 죽었다. 그에 관한 저서로는 목사 변종호가 편집한 〈이용도목사서간집〉(1934)·〈이용도목사전〉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4.15)
매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대회는 프랑스의 교육학자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1863.1.1 ~ 1937.9.2)의 노력에 의해 1896년 아테네 올림픽을 시작으로 그 새로운 막을 열었다. 많은 어려움 끝에 1894년 국제스포츠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제의가 받아들여졌고 곧바로 국제 올림픽조직위원회가 결성되어 1896년 4월 6일 역사적인 첫 근대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종교행사로 시작된 올림픽은, 제전 기간 동안 일체의 전쟁행위를 중단하고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제전의 참가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평화적 이념과 더불어 건강한 정신과 신체의 단련, 국민 화합을 목적으로 하는 정신은 근대올림픽의 이상으로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전 세계인들의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제 1회 올림픽 개최지였던 아테네는 지난 2004년 제28회 올림픽을 또 한 번 성공적으로 개최한바 있다.
[1892년] 근대 수송기의 시조 DC-3을 개발한 더글러스(Douglas, Donald W.) 출생
더글러스 항공기회사를 설립해 근대수송기의 시초인 DC-3를 개발한 미국의 항공기 설계사 더글러스(1892. 4. 6 ~ 1981). 그는 획기적인 비행기 설계로 대형 수송기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글렌엘마틴사의 수석 엔지니어로 활약했던 더글러스는 1920년 기체역학적 원리에 따라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항공기 클라우드스터(Cloudst er)를 설계하였고, 해군으로부터 3대의 제작을 주문받자 1921년 독립해 자신의 회사인 더글러스사를 설립하였다. 1924년부터 대형 수송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던 더글러스는 1932년 주력 기종인 DC 시리즈를 개발해 커다란 성공을 하였다. 그가 개발한 대형 수송기는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군용기로서의 효율적인 작전 성능을 인정받아 향후 미국 공군의 주력 기종으로서 진화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20년] 라파엘로 사망 [1483년]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 출생 ← 라파엘로의 자화상(1506).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라파엘로가 1520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이 날은 그가 37번째로 맞는 생일이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뒤늦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였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시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고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이후 배우게 될 모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후 라파엘로는 아버지를 따라 페루자로 가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차분하고 정교한 화풍을 전수받았다. 예술의 배움을 향한 그의 발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504년 다시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향했다. 그는 여기서 일생의 스승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만나게 되는데,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과 스푸마토(‘모나리자’에서 사용된 기법)를 비롯 미켈란젤로의 조형법을 연마했다.
그러던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그는 거기서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보냈는데, 이 시절 창작을 향한 그의 정열은 들끓는 용광로 같았다. 이로 인해 많은 걸작이 탄생했고, ‘화가중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로마에서 그의 평판 또한 좋았다. 로마에서 제작된 그의 작품들 속에는 철학적 깊이가 내재돼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인문주의자 또는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불렀다.
인생의 말년 라파엘로는 건축과 고대 유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조영(造營) 사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기사의 꿈’ ‘마리아의 결혼’ ‘아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다비드 상’ 등이 있다.
[ 221년] 유비 황제에 즉위(건안 26년)
유비(劉備, 161~223)는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關羽)·장비(張飛)와 결의형제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조조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蜀)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naver
그 밖에
2009년 이탈리아 강진 사망자 272명.. 중상 100여명
2004년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 탄핵 해임
2003년 LG생명과학의 국산 신약, 미국 FDA(식품의약청) 첫 승인을 받았다고 발표
2000년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1957~1987) 부르기바 사망
1998년 파키스탄, 사정거리 1,500km에 달하는 장거리 지대공미사일 발사시험에 성공
1996년 금호그룹 박정구 회장 취임
1995년 전기통신사업법 개정 시행
1994년 비행기 폭발로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시프리엔 온타리아미라 대통령 사망
1994년 르완다 내전상태 돌입
1992년 미국 과학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사망
1990년 상영금지된 ‘파업전야’ 6개도시에서 상영
1984년 미국 챌린저호 발사. 우주에서 위성 수리 성공
1982년 헤이그 미국 국무장관 미국의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 시사
1979년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장
1979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1978년 박정희 대통령, 국산 고성능탱크M48A3. M48A5의 성능시험 과정 참관
1973년 정부, 반사회적 기업인 73명 발표
1973년 태양계 탐사선 파이오니어 11호 발사
1971년 미국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사망
1969년 티우 월남대통령 6개항의 평화안 제기
1968년 정부, 지방자치백서 발표
1967년 홀트 호주 수상 내한
1960년 야당의원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
1954년 회오리 바람, 미국 달라스시 강타
1950년 브라질서 철도붕괴 사고로 열차 추락 - 108명 사망
1949년 트루먼 평화를 위해 원폭사용 불사 발표
1945년 소련군 오스트리아 수도 빈 침입
1941년 독일군 그리스-유고 진입
1930년 간디 2차 비폭력저항운동(소금행진) 시작
1911년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대사작용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리넨 출생
1901년 일제시대 최고의 부흥사 이용도 목사 출생
1887년 조선전보총국 창설
1883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조인
1877년 정언, 김기룡 등이 서얼금고제를 혁파할 것을 상소
1830년 조지프 스미스, 몰몬교 창시 선포
1818년 독일인 칼 드라이스, 최초의 자전거 `드레지엔` 파리에서 공개
1803년 영국 고고학자-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사망
1086년 왕안석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