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
文 熙 鳳
아침 9시가 조금 지나면 내가 사는 아파트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노란색으로 도배된 자동차들이 유아들을 데리러 오기 때문이다. 유아들은 조잘조잘 얼굴 어느 한 곳 찌그러진 곳이 없다.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런 탱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 살아가는 데 걱정 같은 것이 전혀 없는 표정이다. 얼마나 천진난만한가? 계절에 관계 없이 피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꽃이 바로 자동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유아들이다. 이런 유아들이 많아야 할 텐테.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2060년이면 우리 사회의 노화속도가 정점에 이르러 세계 제2위를 기록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10명 중 4명 이상이 노인이라는 얘기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그 유연함이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런데 인간은 이십대에 다다르면서 노화의 길을 걷게 된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두부 먹다가도 이빨이 빠질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들린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본다. ‘링’도 유연한 폼으로 했고, ‘평행봉’도 미드미컬한 폼으로 했다. 이단 앞차기, 이단 옆차기도 자유자재로 했다. 대련에서 꼭 이긴 것은 아니었지만 몸놀림은 참 유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한 번도 못한다. 매달리는 것도 몇 초밖에 못 한다. 유연성, 탄력성이 떨어진 결과다.
인생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 저편에 배가 닿으면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가서 마을로 걸어 들어간다. 육신은 버리고 가야만 하는 배요, 영혼은 마을로 들어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그 나그네는 거기서 영원히 사는 계속적인 존재인 것이다. 욕심을 버리는 순간 고난은 사라지고 편안함과 친구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늙음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현재의 생활에 최선을 다함이 삶이요, 이러한 삶이 오래되어 편해짐이 늙음이요, 영원히 쉬는 것이 죽음이라면 틀린 말일까? 그래서 우리는 낮을 낮 삼고, 밤을 낮 삼아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가. 어렵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여우 같은 마누라가 반겨주고, 개나리꽃 같은 병아리들이 달려와 안긴다. 소박한 밥상을 가운데 놓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음꽃을 피운다. 이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생과 사에 있어서도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또 어떤 이들은 쉽게 죽어 버리려고 발버둥 친다. 정호승 시인은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매일 죽으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단 한 번밖에 죽지 않는다.’고.
한편 젊은이들은 젊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며, 늙고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정마다 성능 좋은 최고급 다리미를 준비해 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곱던 저녁놀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사방엔 어둠이 푸르게 내려앉는다. 인생도 이처럼 뜨겁게 젊음의 시절을 보내고 이순을 넘기면 뭉클하게 그리운 것들이 많아진다.
인간들 외에 모든 생물도 열매를 맺는다. 벼 이삭도 벼를 익히면 그 줄기와 이파리는 누렇게 시들어 볼품이 없어진다. 과일나무도 과일을 영글게 할 무렵이면 그 이파리는 벌레에 먹혀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자신의 아픔으로 사람을 가르친 뒤에 남는 모습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그 열매 곧 아들과 딸이 장성하면 늙고 병들어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한다. 이러한 형상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습에 오히려 존경심을 보여야 마땅하다. 찌그러진 깡통을 보는 것과 같을지라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온전한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더라도 늙고 추하게 변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일이다. 늙으면 쉬게 되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기 때문에 더 편히 쉬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맞이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