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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95
12월5일[대림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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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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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2ElYE8csUI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 지민준 베드로 카니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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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계시는 한 가지 사목 노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입니다.
교황님에게 있어 그들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교황님께서 그토록 작음, 작은 이들을 총애하시는 이유는?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작은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총애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이들인 철부지 어린이들을 총애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단순함과 천진난만함, 앞뒤 재지 않는 순수한 사랑과 신앙을 각별히 보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작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총애와 각별한 사랑, 이번 대림 시기 우리의 묵상 주제요, 실천 과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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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u3MKAv2B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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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행복해지는 간단한 비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도 성령 안에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철부지 어린이들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의 비밀입니다. 그들에게 행복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간이란 존재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 성장한 어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처럼 온 존재를 다 해 찾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고 무언가를 들을 수 있으며 무언가를 깨닫고 또 무언가를 전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즐겁게 사는 비밀입니다.
57세에 시골에 30만 평의 땅을 사서 정원을 꾸며 『타샤의 정원』이란 책도 출판한 타샤 튜더는
날마다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떤 특별한 일을 하기 때문일까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일상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 뿐입니다.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을 듣고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정원 가꾸기는 물론이요, 그림그리기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그림 동화도 집필하였습니다. 자신이 가꾼 땅에서 자라는 꽃들을 보며 거기서 듣는 내용을 동화로 쓰고 사람들과 나눕니다.
결국 나의 행복은 일상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그 무엇이 하느님이면 됩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선이시며, 아름다움이십니다.
타샤는 아름다움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타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무나 꽃을 심으며 돌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모든 꽃이 다 좋아요. 정원 가꾸기의 좋은 점은 우울할 틈이 없다는 거예요. 정원은 나의 자랑이요 행복의 원천이죠.”
보면 듣게 되고 들으면 알게 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어디에 묵으시는지 보려 하고 보며 듣고는 믿었습니다. 믿고는 성령으로 기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자의 사랑’을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불안할 때마다 부모님의 사랑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 속에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이것을 들었습니다. 결국 알게 되는 것은 부모의 정체입니다. 나의 부모가 나의 참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기쁨 속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체를 보고
그 안에서 주님 음성을 들었으며 그래서 하느님께서 참 나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으로 기뻤습니다.
이런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보고 듣고 알고 싶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려면 일단 보아야 합니다. 주로 읽습니다. 듣기 위해 묵상을 합니다. 그러면 깨달음을 주시고 그 기쁨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묵상하는 이의 기쁨입니다.
저의 정원은 성체가 모셔진 곳입니다. 그곳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하느님의 정원입니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것만 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깨달은 것을 글로 써서 나눕니다.
매일의 보고 듣고 깨닫고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삶이 행복할지, 우울할지가 결정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무엇이 자라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게 나옵니다. 결국 무엇이 나오느냐가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듭니다. 타샤 투더는 말합니다. “꽃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바라보며 알 수 있듯, 우리 역시 좋아하지 않는 곳에 살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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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지혜와 경륜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것을 뜻합니다. 신부님들의 좋은 강론을 듣는 것은 제게는 ‘타산지석’의 기쁨입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양인 대학생과 서양인 대학생을 상대로 ‘장점’을 칭찬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서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신의 장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겸양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할지라도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하게 되니 깨끗하게 인정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패배가 확실했음에도 ‘옥쇄’ 작전을 펼치면서 연합군을 당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를 연구한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의 근간이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떤 사상적인 바탕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의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은 동양적인 사상과 더 친밀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김재덕 신부님의 ‘예수님과 만난 여인들’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또한 제게는 ‘타산지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은총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사제의 바람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더욱 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유학 갔다 온 모든 사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같은 과목의 신부님이 신학교에 있는 경우도 있고, 신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실망하기 보다는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했던 그 일들이 나중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커다란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작은 성당에서 기쁘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교구청에서 지낼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는 몹시 아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청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빠가 죽어서 원망스러울지라도 지켜가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우선 될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끝까지 지키고, 간직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과 바꾸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말 은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얻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을 하찮은 것들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은 항구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상처를 받아서. 미워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지라도 소처럼 우직하게 믿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유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이 클수록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매 미사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을 보시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십니다. 나의 기도를 보시고 누군가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죄인을 구하십니다. 나의 기도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와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을 청하며,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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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업적들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7) 하신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철부지들이란 어린이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얕은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며,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관해 이야기도 못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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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감추거나 드러내시는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이는 하느님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 지혜가 감추어질까요? 그들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그리스 말로 ‘네피오스’), 곧 세상의 지혜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29,14). 하느님의 지혜, 곧 그분께서 계획하신 놀랍고도 기이한 일은 결국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드님의 구원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에 관하여 깊이 통찰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2-24)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인 우리에게 당신의 심오한 지혜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지혜를 얻게 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며,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서 그 나름으로 ‘지혜롭다는 자들’이 그런 우리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그들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사실을 떠올립시다. 순간의 부끄러움 때문에 십자가를 등 뒤로 숨기는 일이야말로 정녕 어리석은 행동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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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 기도는 소외계층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그 나라의 구원을 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서는 회개하라고 타이르는 말씀이 됩니다.>
이 기도는 ‘마리아의 노래’와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찬미가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관한 소식이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고, 즉 ‘복음’이 되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자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가 된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스스로 회개하여,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하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것이고, 쫓겨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일인데,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서, 간절하게 원하고, 겸손하게 청해서 받는 사람은 구원받지만, 지식이나 재물이나 그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일이나 ㅣ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 일은(성탄은), 세속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는 일, 즉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곧 ‘영적 지혜’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않거나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로마 1,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라는 말씀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그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직접 받게 된 신앙인들이 누리는 ‘영적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행복한 생활이고, 기쁜 생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 즉 구약시대 성인들과 의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고,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은(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우리 교회는 그 사람들도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있는 ‘저승에 가시어’ 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저승, 즉 ‘고성소’는, 구약시대 성인들과 의인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 그곳에 가셨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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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자에게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성자의 기쁨과 성부께 올리는 성자의 기도 안에 성령께서 개입하심을 드러내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전제합니다.
한편 본문에는 “철부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본래 ‘아이’, ‘미성년자’, ‘미숙한 자’를 뜻하지만, 더 나아가 ‘교육받지 못한 이’, ‘지혜를 갖추지 못한 이’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면 성자께서 성부께 감사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부지’ 같은 일흔두 제자가 전한 복음을 ‘철부지’ 같은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성부께서 베푸신 은총의 결과입니다. 성자께서 성부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 안에는, 세속적 기준으로 턱없이 모자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선의와 은총을 베푸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성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의 계시와 은총이 바로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3장 16절의 행복 선언은 그 내용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한정됩니다. 반면 루카 복음 10장 23절은 행복 선언의 대상을 확대 적용합니다.
곧 구약 성경의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짐으로써 더 이상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보편적 구원’이 실현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철부지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격 미달’인 우리도 은총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얼마나 공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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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예로부터 성군은 두 가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성을 정의롭게,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한 임금들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패망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새로운 희망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구약의 위대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에게 내렸던 축복을 새로운 표현으로 언급합니다. 바로 ‘메시아사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나무의 표상을 사용합니다. 사실 햇순과 그루터기는 드문 표현인데, 아시리아와 페니키아 말로 ‘왕홀’을 뜻합니다. 새싹이라는 용어도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의 왕권을 완성할 후손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슬기와 경륜은 다스림의 필수 요소이자 임금의 기본 자질로, 무엇보다 지혜는 하느님의 영에 결부됩니다.
용맹은 백성을 보호하는 평화의 군왕을 상기시키며, 지식과 주님을 경외함은 하느님에 대한 앎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실 분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와 유다의 임금들이 간절히 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감추셨던 최고의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철부지라면 악하고 패덕하게 행동하기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을 가득 채울 주님에 대한 앎으로 응답해야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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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온 존재를 바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헤로데의 반대에 부딪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10,21)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으뜸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철부지들인 부족하고 무식하며 미약한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0,22)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은 거꾸로 가는 인생이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와 달리 세상살이에서는 해박하고 탁월한 지식으로 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어 출세하려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잘 나고 힘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이 힘을 발휘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은 곧, 생명과 선, 자비와 정의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려면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힘을 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낮추어 진정 가난한 사람이 되고, 내 중심적인 애착들을 비워내어 영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을 뵙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잡다한 지식과 남을 이기는 법, 나만 잘 사는 법,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랑과 윤리가 결여된 지식과 힘에 의존하지 말아야겠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미천하고 율법에 무식한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한없는 은총으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소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고, 천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고 평범한 나날처럼 보이고,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선물을 주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자신을 낮추고 비워, 철부지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선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 가운데 머물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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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10,23)
저는 베트남에서 살고 있을 때부터 음악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습니다. 지금도 ‘불후의 명곡’이나 ‘복면가왕’ 그리고 ‘팬텀싱어’와 같은 음악 프로그램은 즐겨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먼저 떠 오른 노래가 ‘김범수’의 「보고 싶다」라는 노랫말입니다. 잠시 그의 노랫말을 인용하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가 바보처럼 울고 있는 너의 곁에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기다리니 떠나가란 말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내가 미워질 만큼 울고 싶다 네게 무릎 꿇고 모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미칠듯 사랑했던 기억이 추억들이 너를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수 없어 이러면 안되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죽을 만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사람은 아직도 살아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참으로 슬프지 않겠어요. 이런 사랑앓이는 분명 불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보는 것은 분명 행복이며,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는 의미를 알아듣고자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이 ‘보는 행복’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만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되고, 듣고 싶은 것도 듣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보는 것이 행복하다,’는 의미는 흔히 우리들의 습관적이며 타성적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봄과 들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비딱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철부지 어린아이와 제자들의 맑고 깨끗한 마음의 눈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때 하느님을 볼 것이며,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때야말로 보이는 모든 것, 곧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이런 신앙의 경지에 이른다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거룩하며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리라 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사람들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11,3.9)라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기 위해 어제의 묵은 인간이 아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미처 버리지 못한 나의 아집과 편견 그리고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현세적인 욕심과 관심 등에서 떠나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껏 배우고 깨달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몸으로 느끼고 겪으며 체험한 경험들까지도 하느님을 알아가는 데 장애와 걸림돌이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헤아릴 수 없는 공간이 변해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다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듯싶습니다. 아빠 하느님을 아빠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어제의 지식과 경험이 도리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한다면 예수님께서 보고 들으시는 그 마음으로 온전히 살기 위해 우리는 육신적인 눈과 귀만이 아니라 영적인 귀와 눈을 떠야 하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는 귀는 행복하다.”(10,23) 그런 참 행복을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기 위해 우리는 깨어 일어나야 하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과 같은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고 내일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은 주님의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의 영이 머물 것이며.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우리 네 삶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면서” (로12,2) 자신 안에서 큰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모습을 뵙고 살아가니 이보다 더 참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언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을 앞당겨 누리는 축복일 것입니다. 또한 저의 관심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도 예수님께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으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죽을 만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아빠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의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건들을 통해서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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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을 떠야 하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꼭 들어야 할 말을 듣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 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 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느님만을 의지 하여 그분의 보살핌을 바라는 철부지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가!”(김정원신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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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서 한 사람을 맞이하면서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이 살면서 행한 착한 일들을 모두 말해 보시오. 그리고 점수를 합산해 봅시다. 합산한 점수가 1,000점이 넘으면 즉시 하늘나라에 갈 것이오.”
“저는 15살 때부터 매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큰 계산기를 꺼낸 베드로는 “이것은 0.5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저는 묵주기도를 자주 바쳤습니다. 10만 단쯤 될 겁니다.” “이것은 0.75점입니다.” 또 말 했지요. “성찰하면서 회초리로 제 등을 수없이 매질했습니다.” “0.8점 주겠습니다.” “성인전을 읽었습니다.” “0.9점 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선행을 베드로 앞에서 고백했지만, 점수 얻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5시간 내내 말한 뒤에 얻은 점수는 고작 20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아이고, 이건 정말 불가능하잖아요. 당신이 저를 하늘 나라에 집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제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바로 그 순간 종소리가 울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000점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 나라에 들어가시오.”
주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공적만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철부지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를 통해서 또 본인의 열심한 생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별것 아닌 철부지의 모습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넓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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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짓 살길에서 참 살길로>
루카 10,21-24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거짓 살길에서 참 살길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살길을 가지고
그러그러 살아가니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살길들이 얽히고 얽혀
사람 사는 세상 이루지요
누군가의 살길이
모든 이에게 살길이라면
참으로 좋으련만
안타깝지만 너무 흔히
누군가의 살길이
누군가에게는 죽을길이네요
누군가에게 죽을길이
누군가의 살길이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 살길에만 눈이 멀어
저로 말미암은 죽을길 보지 않네요
어차피 이리 된 세상
나도 그대도 덩달아서
제 살길만 보고 갈까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우린 안 그럴 거잖아요
홀로라도 제 살길 찾는 이의
손가락질에 짓이겨져서
힘없이 쓰러지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죽을길인
저만을 위한 거짓 살길을
우리 먼저 끊어야지요
다른 이의 죽을길 마다 않는 이의
비웃음에 누더기가 되어
더 이상 나갈 수 없다하더라도
누군가의 죽을길마저 살려낼
모두를 위한 참 살길로
우리 먼저 나서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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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는 것을 보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옛 예언자들은 제자들이 보고 있는 당신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지 못한 것에 비해 제자들은 그들이 못 본 당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보는 것을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지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는데 요즘의 나는 무엇을 보나?!
이번 대림절을 앞두고 대림절의 실천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같이 사는 형제가 이번 대림절엔 술을 끊겠다고 한 것에 자극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저는 술을 줄이기는 해도 끊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유튜브 보는 것을, 더 정확히 얘기하면 시사 토론 유튜브 보는 것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지 않았었고, 오히려 무슨 수도자가 유튜브를 보냐며 언짢게 생각했으며, 유튜브 중독인 사람들을 일종의 맹인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지요.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봐야 할 눈으로 특정 유튜브만 보면서 복음적인 시각은 잃고 그 유튜브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튜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유튜브도 많은데 특정 유튜브에 세뇌되는 것이 나쁘고, 특정 유튜브도 복음과 거리가 먼 유튜브가 나쁜 것입니다.
늘 기도하셔서 제가 존경했던 수사님,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수사님이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 유일하게 보시던 뉴스마저 끊어버리고 기도만 하셨지요.
저와 결핵환자들을 돕다가 전염된 결핵이 나이 드시자 재발하여 돌아가시게 된 것인데 약을 드시라고 해도 약을 드시면 졸려서 기도할 수 없다고 드시지 않으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관구장의 명이라며 약을 드시게 하였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로 온전히 기도에 몰두코자 하셨는데, 저는 나이 먹을수록 끊어야 할 유튜브를 오히려 안 보다가 보고 있으니 제가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 대림절에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대림절에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내 눈이 썩은 동태 눈은 아닌지 점검하고, 얼른 성령의 눈을 지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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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10,21)
<철부지들!>
오늘 복음(루카10,21-24)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잘났다는 유다교 종교지도자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 곧, 율법을 모르거나 잘 지키지 않는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죄인들이나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과 같은 철부지들과 당신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따랐음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 곧 '계시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제자들, 곧 당신을 잘 따르는 제자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잘났다고 드러내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늘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겸손한 사람, 겸손한 철부지들인가?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인가?
'기쁨과 평화와 행복의 원천'은 '철부지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따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꾸만 나를 드러내거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행복한 철부지들이 됩시다!
오늘 독서(이사11,1-10)는 '메시아가 이룩할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행복한 철부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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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2_EJeAId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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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가 나가야 할
참된 길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인생 전체를 통해
우리를 이끌어가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의 마음안에서
펼쳐집니다.
철부지들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깨닫게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슬픔을 치유하는
사랑이며 봉헌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위해
우리의 뜻을 내려놓습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을
기다릴 수 있는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는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신앙의 철부지들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철부지들을 통해
길을 만드십니다.
기다림의 길을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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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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