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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장 이스라엘 가족의 애굽 이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족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오다가 앞으로 큰 민족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는 횃불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장차 정화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출애굽 사건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야곱의 일가는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시작임과 동시에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의 성취는 족장 야곱의 이름이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계속 나타나는데 있다.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연단을 받았던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과 함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말에 영성이 살아나고 언약을 믿는 믿음의 인물로 거듭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언약을 지키시지만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황이 변할 때마다 놀라고 두려워한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죽기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아들을 보리라고 단 번에 결정했다.
그러나 고조된 감정이 차츰 가라앉고 냉정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애굽행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언약에 기초하여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1. 야곱의 주저함과 하나님의 허락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제 야곱은 새로운 선민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또한 신정정치의 근간을 이룬 12지파의 수장으로서 언약의 성취 과정을 준행하고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를 전개해 나가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발행했다.’라는 말은 이동식 천막의 말뚝을 뽑아 옮기는 것을 뜻한다. 야곱은 지금까지 안주했던 정든 헤브론을 떠나 애굽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이 오래 거주했던 ‘언약의 우물’ ‘일곱 우물’ 이라는 이름의 땅인 브엘세바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가문의 고향이자 언약 후손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브엘라해로이가 나타나는데 야곱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브엘세바도 그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야곱이 잃었던 아들 요셉을 생전에 본다는 감격 때문에 애굽 이주를 너무 쉽게 결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신자는 격한 감정이나 흥분이 가라앉게 되면 냉정해지고 이성적 판단을 하게 된다. 야곱도 헤브론을 출발했지만 여행 도중에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이며 반대로 애굽은 아브라함에게 곤경을 준 땅이요, 부친 이삭에게는 ‘입국 금지 명령’이 내려진 땅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마음으로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야곱이 헤브론을 출발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물었다면 이러한 고뇌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삶의 이정표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더라면 섣부른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둘째, 야곱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선에 도착하자 가나안 땅을 벗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이방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의 삶을 드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이다.
야곱이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조상 때부터 언약해 오신 하나님을 찾은 것이며 이삭과 맺은 언약이 자신과 후손들에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희생 제사가 야곱의 마지막 희생 제사라는 점이다.
그가 애굽에 내려가 살 동안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조건이나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야곱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언약의 하나님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손자들도 많이 태어났고 며느리들도 많이 들어왔다. 그의 가족이 70명이 된 것을 보더라도 예전의 야곱 가정이 아닌 것이다. 그는 애굽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가족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언약을 새롭게 갱신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이상 중에’ 라는 이 말은 야곱이 밤에 꾼 꿈의 일종으로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한 특별한 방법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종종 전하셨으며 성경이 완성된 오늘 날도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상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야곱의 이름을 ‘야곱아 야곱아’ 라고 반복하여 부르셨다. 이때 부르신 야곱의 이름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호칭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이전의 야곱을 상기시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을 중첩해서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지극히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드린 희생 제사를 크게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내리시고자 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다.
마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는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신다.
사실 야곱의 고민도 선조들에게 내리신 언약을 신앙 안에서 깊이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말씀 신앙이 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야곱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신속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그의 신앙이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문자적으로는 ‘나는 엘이라. 네 아버지의 엘로힘이니.’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는데 먼저 하나님의 이름인 ‘엘’이라 하시고 그 다음에 ‘엘로힘’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이방신과 비교할 수 없는 위엄 있고, 강하며, 능력있는 탁월한 존재를 과시하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신 것은 당신은 창조주 하나님인 동시에 조상들과 언약하신 언약의 하나님이며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의지를 밝히신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의 확고한 의지를 밝히신 후에 그에게 애굽에 내려가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로 보건대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경황 중에 애굽 이주의 결정을 내린 야곱은 이 경솔한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 걱정하며 기도하였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네 가지 구체적인 약속을 하셨다.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것같이 벧엘에서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언약으로 축복하신 비준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벧엘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어 주겠다는 확약으로 그것이 애굽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이는 먼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야곱의 후손은 애굽인에 비해 비할 수 없이 연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4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인을 능가할 정도로, 애굽인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둘째,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사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 두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애굽인들과 함께 기거하며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굽의 문화와 풍속, 애굽인의 정치와 경제와 법률에 무뢰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애굽의 이방 종교는 그 무엇보다 야곱의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그 삶의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만 하는 것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안전과 보호와 후원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진정 하나님의 동행 여부는 야곱의 생존과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이었던 것이다.
셋째, 반드시 야곱을 인도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시겠다는 것이다.
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변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협의적으로는 야곱이 비록 애굽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나 자식들이 그의 유언을 따라 선조들이 장사된 가나안 땅 막벨라 동굴에 시신을 장사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러나 광의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한 후에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회복함으로써 성취된 것이다. 이 같은 이중적 성취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죄악된 세상인 지상의 일을 벗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에 대한 보증이요 예표인 것이다.
넷째, 요셉이 그의 손으로 야곱의 눈을 감긴다는 것이다.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고 그 아들의 효도를 받을 것이며 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게 되고 요셉이 야곱의 장례를 엄숙하게 잘 치를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라.’ 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야곱도 그러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는 것이 지복이며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는 자식이 효도를 다하는 자식이라고 한다. 야곱은 조상들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천수를 다하고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하였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은 후 하나님의 반복된 언약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불안과 초조감이 사라지고 여호와께서 주신 비전으로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제 절망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었으며 바로가 보낸 황금마치를 타고 그들의 가축을 이끌며 당당하게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때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가족의 수는 며느리 외에 66명이었다. 그리고 야곱 자신과 애굽에 있는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합하면 모두 70명이 된다.
그러나 자부들과 딸들과 상당수의 목자들과 종들을 합하면 그 수는 백 명이 넘었을 것이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이며,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지 215년 후인 B.C 1876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야곱의 애굽 이주는 곧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 애굽에서 종노릇 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의 전조가 되는 것이다.
2.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의 가족들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의 명단이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모계에 따라 기록되었다. 이 애굽 이주 가족의 수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26절에는 66명으로, 출애굽기와 신명기에는 70명으로, 사도행전에는 75명으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각 기록이 일치하지 않으나 주축 인물들을 기록한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스라엘 선민 공동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70명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의 실현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 ‘완전’ ‘승리’ ‘안식’ 이며 완전 숫자인 10이 합쳐져 70이 되었으며 야곱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 아래 애굽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이 명단은 특징이 있다. 첫째, 모계별로 기록되었다. 둘째, 단순한 한 가족의 명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의 근간이 되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명단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70명으로 맞추어 기록되었다.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 나라 전체를 지향하는 예언적 숫자라 할 수 있다.
‘르우벤의 아들 하녹’
르우벤은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하녹이며 ‘시작’ ‘헌신’의 뜻으로 ‘에녹’이라는 이름과 어원을 같이 한다. 에녹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하녹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하녹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애굽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실질적인 제 1세대의 첫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차남은 ‘발루’인데 그 이름의 뜻은 ‘구별된 자’이며 삼남은 ‘헤스론’으로 ‘닫힌 자’ ‘에워싸인’이라는 말이고, 사남은 ‘갈미’인데 ‘포도를 만드는 자’ 라는 의미이다.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시므온은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여무엘’은 일명 ‘느무엘’이라고도 전해지며 그 이름의 뜻은 ‘전능자의 날’이라는 뜻이다. ‘야민’은 ‘오른 손’ 이라는 말이며, ‘오핫’ 은 ‘결합’이라는 뜻이고 ‘야김’은 ‘그가 승리한다.’ 라는 말이며, ‘스할’은 ‘순백색’이라는 말이다.
스므온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렇다면 이상의 다섯 아들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출신 여인들을 취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므온은 가나안 여인을 첩으로 둔 것 같다. ‘사울’은 ‘희망’이라는 뜻이다.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게르손’은 ‘게르솜’이라고도 부르며 ‘이방에서 나그네 돠었다.’ 라는 뜻이며, 그핫‘은 ’고핫‘이라고 부르며 ’회집하다‘ ’모이다‘의 뜻이며, ’므라리‘는 불행하다’ ‘무정하다’라는 말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모두 제사장들로서 출애굽 이후 회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맡게 된다.
‘유다의 아들은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유다는 가나안 여인 수아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은 ‘엘’로서 ‘간수자’라는 뜻이며, 다말과 결혼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오난’은 ‘강하다’ 라는 뜻으로 형이 죽자 계대 결혼법에 의해 형수인 다말을 취했다.
그러나 형수와 자기 사이의 후손이 자기 이름을 잇지 못할 것을 알고 형수와 동침했으나 땅에 설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애굽행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셀라’는 ‘무기’라는 뜻으로 어리다는 핑계로 형수와 결혼하지 않았다.
‘베레스’는 ‘터짐’ ‘파괴’ 라는 뜻이며 ‘세라’는 ‘바위’라는 이름이다. 시부 유다와 며느리 다말 간에 태어난 쌍둥이 자식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추잡스러운 아들이다. 그러나 후손을 잇겠다는 강한 집념의 며느리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로서 후일 메시야가 바로 ‘베레스’의 가문에서 태어나며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베레스’는 ‘헤스론’과 ‘하몰’을 낳았는데 ‘헤스론’은 르우벤의 아들과 동일한 이름이며, ‘하몰’은 자비를 경험한 자‘라는 말이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아와 욥과 시므론이요’
‘돌라’는 ‘벌레’라는 뜻이며, ‘부아’의 이름의 뜻은 명확하지 않다. ‘욥’은 ‘박해받는 자’ 라는 말이며, ‘스므론’은 ‘찬양하는 자’라는 뜻이다. ‘욥’ 이라는 이름이 민수기나 역대기에서는 ‘야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자신을 돌이키는 자’ 라는 뜻이다.
잇사갈의 아들 ‘욥’이 욥기의 저자는 아니다.
‘스블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알르엘이니’
이 세 아들의 이름의 뜻은 각각 ‘두려움’ ‘상수리나무’ ‘하나님이 병들게 하심’ 이라는 뜻이다. 레아에게서 아들 여섯 명, 손자 스물세 명, 증손자 두 명, 딸 디나가 출생했다. 디나가 야곱의 식구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세겜의 사건 후에 출가하지 않고 아비 집에서 계속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레아는 이미 가나안 땅에서 죽었을 것이므로 본문에서 33명이라고 한 것은 가장인 야곱을 포함시킨 숫자이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론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갓은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의 이름의 뜻은 각각 ‘갈망’ ‘축제’ ‘쉬게하다’ ‘수고하다’ ‘여호와를 예배하다.’ ‘야생 나귀’ ‘영웅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아셀은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보유하신다.’ 이며 차남의 이름은 ‘평평하다’로 삼남과 쌍둥이 형제인 것 같다. 사남은 ‘선물’이라는 뜻이며 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출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셀의 손자 ‘헤벨’은 ‘친교’라는 뜻이며 ‘말기엘’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이다. 이들은 모두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아들들이다.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온’ 땅은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고센 지방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이며 ‘태양의 성’이라는 뜻이다. ‘아스낫’은 ‘태양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이며 요셉의 아내이다.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낭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실제로 베냐민이 가나안 땅에서 낳은 아들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올 때 베냐민의 나이는 20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사실은 가나안이라는 지역적 한계성을 고집하지 않고 장차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어떻게 정착했는가를 관심을 두고 기록했을 것이다.
‘삼키다.’ ‘어린 약대’ ‘하나님의 의견’ ‘돌아다니다.’ ‘즐거움’ ‘형제 같다’ ‘우두머리’ ‘갈망’ ‘덮다’ ‘도망하다’ 라는 뜻의 이름들이다. 라헬은 두 아들과 손자 열두 명을 낳아 합계 십사 명의 자손을 두었다.
‘단의 아들 후심이요’
일명 ‘수함’ 이라고 민수기는 기록하고 있으며 ‘서두르는 자’ ‘성미가 급한 자’ 라는 뜻이다.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납달리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의 분배하심’ ‘비슷하다’ ‘형상’ ‘보답’ 이라는 뜻을 가졌다. 라헬의 몸종 빌하는 아들 두 명과 손자 다섯 명을 낳아 모두 일곱 명의 자손을 보았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가족으로 애굽에 이주한 자는 요셉의 가족을 제외하면 66명, 포함시키면 70명이다. 이것은 조장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인친 표시인 동시에 충만한 번영과 완전한 구원을 예표한 것이다.
3. 야곱과 요셉의 재회
이별의 한 마디고 못한 채 헤어진 야곱과 요셉의 만남이 드디어 20년 만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유다의 대표성이 인정받는 장면이다. 2차 애굽 방문의 공적으로 인해 야곱은 유다를 신임하게 되었으며 가족을 대표하여 그를 먼저 보낸 것이다. 요셉은 유다의 방문을 받고 총리의 권세를 나타내는 모든 의식과 절차에 따라 고센 땅으로 올라가 아버지를 맞이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만나는 것을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겼든지 자신의 성장한 모습과 평안하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낱낱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보이고’라는 말은 ‘세밀하게 관찰하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인간 앞에 나타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 상봉은 실로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과의 만남, 한 시 동안도 잊지 못했던 사랑하는 아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형제 상봉 때와는 달리 목을 어긋 맞춰 얼마동안 울었다.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얼싸안고 울었던 것이다. 실로 극적이고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자식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다. 요셉 사건으로 인해 평소 야곱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은 원한이 잠재해 있었다. 그러나 요셉을 만나는 순간 그와 같은 한이 풀린 것이다.
야곱은 요셉을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한 모습과 훌륭한 인품과 늠름한 기상을 보는 순간 이제 죽어도 좋을 만큼 만족하고 기쁘고 감사했기 때문에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던 노부의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 야곱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더 바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스라엘 민족은 대대로 목축업을 주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것은 척박한 산지와 기후 조건이 목축업 외에는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굽인들은 풍부한 수자원과 비옥한 땅, 광활한 농경지로 인해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살았다.
때문에 목축하기에 알맞은 땅인 고센 땅은 애굽인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땅이었다. 애굽인들은 목축업을 가증히 여겼는데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애굽인들은 특유의 배타성이 있었고 거칠고 야만적인 유목민들을 싫어했다. 역사상으로 볼 때 애굽은 야만의 유목민들에게 종종 침략을 당했던 것이다.
둘째, 애굽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동물을 유목민들은 천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가증히 여긴 것이다. 당시 농경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가축을 매우 성스럽게 여겼고 일종의 신으로 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축업을 하는 자들은 애굽 신전의 제사 참여가 금지되었고 애굽인과의 결혼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저들이 ‘가증히 여긴다’는 말은 ‘구역질이 나다.’ 라는 뜻으로 몹시 혐오하고 싫어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 족속인 애굽인들의 이러한 경향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동화되지 않고 제한된 지역인 고센 땅에서만 살도록 하여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천한 노에로 전락하여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지만 결국 이 고난은 하나님이 내리신 변장된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애굽은 오늘 날의 전형적인 세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인들이 멸시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형제들이 자기 직업을 사실대로 밝히기를 원했다.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애굽인들에게 멸시를 받아 이방 우상을 섬기는 애굽인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감으로써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과연 나의 종교와 삶의 정체성을 확실히 밝히고 세상적 시류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세상에 적응하고 굴종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가.
멸시와 핍박과 불이익이 두려워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우선은 당장 육체적 유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세상에 동화되고 흡수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다.
*눅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성도들은 애굽으로 상징된 세상의 삶을 지양하고 고센 땅으로 상징된 하나님 신앙의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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