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전삼용 요셉 신부님
승천하신 이유
유대인인 에스델은 페르시아 아하스에로스왕의 통치시대 때 그 임금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인들의 모함으로 제국 전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전멸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함의 중심에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또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하만이란 고관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여왕은 왕에게로 향합니다. 유대인이기에 유대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라고 허락한 왕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임금을 설득합니다. 이에 임금은 하만보다 여왕인 에스델을 더 믿고 사랑한다는 것을 에스델과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증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델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면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고 오시지 않는다는 예수님 승천의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쉬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은총과 복이신 성령님을 얻어내어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성당 분들과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저도 매우 즐겁게 술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연세 많으신 한 자매님께서 고기를 싸서 저에게 오셨습니다.
당연히 받아먹었어야 했지만 그 전에 너무 많이 먹은 까닭에 저는 저에게 오신 자매님께 약주를 따라드리며 그것을 마시시고 또 절 주시기 위해 싸오신 안주도 제가 먹은 것으로 생각할 테니 함께 드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매님은 술도 드시고 당신이 싸오신 안주도 당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쌈이 얼마나 컸던지 한참동안을 씹으셔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당신이 고기를 드시지 않는데 제가 먹으라니 감사하게 드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하라니 드시지도 않는 고기를 억지로 드신 것입니다.
저는 배가 부르더라도 그것까지 받아먹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저는 못 드시면 드시지 마시지 왜 그러셨냐고 나무라면서도, 미안하고 사랑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드시지 못하면 안 드신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사제가 시키니 순종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자매님을 안아주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인데 어떻게 그렇게 겸손하게 사제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하느님께서도 내가 그렇게 당신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무엇이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아버지께 사랑받으시기 때문에 승천하셔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성령님을 청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에스델과 같이 당신께서 아버지께 다른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아니시면 어떤 누구에게도 아버지께서 당신 성령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얻어내실 수 있으셨던 분은 오직 성모님뿐이셨습니다. 성모님은 기적을 원하시지 않는 아드님께,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시며 은총을 얻어내십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그것을 위해서 승천하여 아드님 곁에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생각해봅니다. 저에게 기도와 안수를 청하는 수많은 신자들, 그들을 보면 언제나 ‘왜 예수님과 성모님께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하면서 제 삶을 후회하게 됩니다. 더 사랑받아야 더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은총을 더 얻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은총을 주시는 분께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이기양 신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오늘 독서 말씀은 참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죄수와 간수의 관계가 뒤바뀐 듯한 인상을 받지요. 일반적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면 두려움에 떨며 간수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보통 죄수의 모습인데 오늘 독서에서는 오히려 간수가 죄수 앞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죄수인 바오로와 실라스는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반면에 간수는 칼을 빼어 자살을 하려고 하지요. 죄수와 간수와 완전히 뒤바뀐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는 자유인인 반면에 자유로운 간수는 마치 자유를 뺏긴 사람 같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인간 이상의 모습을 보게 된 간수는 너무나 놀라서 온 마음으로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16,30)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16,31)
바오로 사도의 이 말 한마디에 간수는 그 날 밤으로 온 가족과 함께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독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16,31)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길거리 버스 정류장 천막에서 이 말씀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말씀이 나온 배경이 오늘 독서 말씀인데 이 배경을 모른 채 길거리에서의 글귀만 보면 말씀은 별 감흥이 없이 빈소리로만 다가옵니다.
왜 버스 정류장에 써 있는 말씀은 빈소리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이 한마디에 어떻게 간수와 그 가족은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언어의 움직임, 즉 말의 힘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버스 정류장에 쓰여진 사도행전 16장 31절의 말씀이 아무런 감동이 없었던 것은 행동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죽음 앞에서도, 그리고 혹독한 매질과 감옥 안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살면 돈이나 권력, 죽음 앞에서 흔들리고 불안하고 초조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태까지 간수들은 그런 사람들만 보아왔지요. 죄수가 되어 감옥에 온 사람들은 모두가 절망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을 보고 간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면 돈이나 권력,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세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돈에 관심이 많고 재물에 집착한다면 돈의 노예가 되고, 당연히 돈 많은 사람의 노예가 됩니다. 또 권력에 관심이 많으면 권력 높은 사람 앞에서 절절 기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로지 자녀 교육에만 관심이 있다면 선생님 앞에 가서 어떻게 하면 점수를 많이 받을까 눈치를 보며 쩔쩔매게 됩니다.
정말 자녀를 당당하게 키우고 싶고 그런 것에서 자유롭다면 주눅들 필요가 없겠지요. 육신에 관심이 많은 요즈음 외모나 건강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점점 거기에 끌려 다니게 되고 심해지면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하느님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지면 거기에 종속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대로 우리의 몸은 따라가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이나 돈, 권력이나 교육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 분을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모진 형벌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주 예수를 믿으시오.” 이 한 마디는 그렇게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이 말씀으로 한 순간에 바뀌었지요.
반면에 버스 정류장 비닐 천막에 쓰여진 “주 예수를 믿으시오.”는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빈소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 삶으로 살면서 외칠 때 말은 힘이 있고 감동이 살아 움직이지요.
선교를 할 때도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전하고자 할 때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 “예수님을 한번 믿어보시지요.” 한다면 그것은 빈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 있는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주 예수를 믿으시오.” 이 한 마디가 삶을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성령의 이끄심대로 열심히 살 때 하느님의 말씀 선포는 힘을 받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처럼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 해도 결실은 없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다녀도 힘없는 빈소리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요.
우리의 삶의 첫 번째 자리는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자식과 남편 다음으로 하느님을 두는 것, 이 정도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제일 위에 두지 않는다면 자녀 교육도 올바로 되지 않습니다.
자녀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마는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만이 돈에서도 건강에서도 가족에게서도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보여준 바오로와 실라스의 자유로운 모습과, 말 한마디로 간수와 그 가족의 삶을 바꾸는 힘의 바탕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자녀에게 힘이 안 되고 남편과 부모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주님께 대한 나의 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자식보다도 남편보다도 부모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하느님이 첫 번째이시라는 확신이 서게 되면 두려움 없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삶에서 나오는 내 말 한마디는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지요.
믿는 이들에게 희망과 평화를 가득히 내리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노성호 신부
아름다운 이별
저는 아직 인사이동을 몇 번 안 겪었지만, 인사이동은 슬프면서도 기쁜 일로 기억됩니다. 정들었던 본당을 떠나게 되어 슬프고, 새로운 본당에 부임한다는 설렘과 기대가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인사이동 당일에 울음과 웃음이 교차해야 당연할 텐데, 어느 본당에서는 울음이, 어느 본당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 오신 신부님이 별로 반갑지 않은 분이라면 울음이 끊이지 않고, 가시는 신부님이 이번에 가시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고 생각되면 웃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겠지요. 올해는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그러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웃으면서 만났더라도 눈물로 헤어지는 경우가 많고, 좋은 만남이었다 하더라도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웃으면서 만나고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과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만나서 그와 함께 살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별이 이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는 의미 있는 시간임을 깨닫고,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지요.
분명 우리들은 예수님과 헤어져야 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다시 오셨고, 우리는 그분과 새로운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청주교구 노성호 신부
*****************
오창일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만, 그 대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5).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매일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 있는 그림자가 있었지요. 그림자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게 잘해주었고 그림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질투 많은 바람이 그에 곁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왜 그림자에게 잘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지." 하고 말했지요. 바람이 다시 말합니다. "아니에요. 그림자는 당신이 기쁘고 밝은 날만 잘 보이지, 어둡고 추울 때는 당신 곁에 있지 않았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항상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에게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가버려라." 하고 말해버렸지요.
그러자 그 한 마디에 그림자는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그 후 그는 바람과 함께 즐겁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잠시 스친 바람은 그저 조용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너무나 초라해져 버린 그는 다시 그림자를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림자야, 어디 있니? 다시 내게 와줄 순 없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말에 어디선가 그림자는 다시 나오고 조용히 그에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다만 어두울 때는 당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난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아마도 당신은 저를 바라 볼 수가 없었나 봐요.”
우리는 힘이 들 때 정작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그리고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픔은 두 배가 되어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단지 그 분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림자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히 어두움으로 표시될 수 있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는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이 잠시 계시지 않다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파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5).
파견을 받은 성령께서는 그 계획을 다시 취하시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온전히 실현하십니다. 곧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계획을 해석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당신을 충실하게 하십니다(성령의 기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 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자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장미도 심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해, 두해 그는 정성스럽게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이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귀퉁이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헤아리고 헤쳐나갈 때 분명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모든 일의 시작에서부터 끝을 당신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과 겸손을 보여 주셨으며, 협조자이신 성령께 당신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안배해주시는 성령의 뜻을 따라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살도록 합시다. 오늘도 그분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부산교구 오창일 신부
***********
경 규봉 신부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와 찬미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복음을 전하던 바울로는 점귀신이 붙은 어떤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낸다. 여종은 자신의 힘으로는 악령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악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악령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악령이 나가기 전까지 여종은 얼마나 악령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이제 악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여종이 악령에 사로잡혀 점을 쳐줌으로써 돈을 벌었던 주인은 바울로가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로와 실라를 박해하고 고발한다.
오늘날에도 여종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며, 그들을 통하여 돈을 벌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포주가 아닌가?
그처럼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0-12) 하고 말씀하시며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불행이 닥쳐올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시련과 고통은 악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행복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다.
바울로와 실라는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다.
밤, 밤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이요, 특히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시편 119,62 참조).
바울로와 실라는 자신들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박해 중에 더욱더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도와 찬미, 찬양을 들으시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울로와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감옥 안이나 밖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자 간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가 그를 찾아와 격려하자 틀림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14,11.15 참조).
그래서 간수는 자신이 신들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는 그에게 중요한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바울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끌어주시고, 기도와 찬미,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전주교구 경 규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