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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평 열린문교회에 와서 선교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선교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가 있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나님과 이웃을 바로 사랑할 수가 있고, 선교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바로 선교를 바로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늘 생각하고 있는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선교란 무엇입니까? 선교의 선구자이시고 선교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집이나 고향이나 나라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선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와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독일의 저명한 선교 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선교를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사람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셨습니다. 함께 사는 삶의 동기는 긍휼과 사랑이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마14:14).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자기 나라와 고향을 떠나 누군가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선교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었고,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선교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선교였고, 최권능 목사님이 만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 천당’을 나타내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선교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의 후손 4대가 모두 미국을 떠나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것이 곧 선교였습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둘째,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놀아주셨다는 말은 없지만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셨고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대화도 하시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9:10).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 선교는 누군가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자기의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나사로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11:11). 선교는 반드시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는 반드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는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글의 일부를 여기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선교사 한 사람과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젊은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선교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블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명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씨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너무 기뻐했다. 유치부 어린 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정예찬 2000.6.10’ 하루 오후에는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다 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제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명과 한인 선교사 20여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 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 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먹으면서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저들과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선교는 “모든 것을 내어주며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며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2). 선교는 유창한 설교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는 심오한 신학 강의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는 대단한 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헌신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기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순교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피로 사신’ 교회라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와 선교는 자기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순교로 이루어짐을 암시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내가 나를 관제(피 제사)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조선의 선교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시작되었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단순한 순교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고, 조선의 구원 역사와 선교 역사를 새로 쓰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선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셀라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의 구원 역사와 선교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무엇입니까?
선교는 누군가를 찾아가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그 누군가와 함께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며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교적 삶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삶입니다. 오직 주님의 성육과 주님의 공생애와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사랑의 가치관에 붙잡힌 사람들만이 조금씩, 조금씩 흉내 내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삶과 죽음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나타난 선교하는 두 교회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안디옥 교회이고 둘째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이후 이방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는데 주님의 뜻을 이룬 선교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특징 7가지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의 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행11:19). 안디옥 교회의 씨앗은 스데반의 순교의 피였고 안디옥 교회의 기초는 피난민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순수한 교회였고 보배로운 교회였습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더라”(행11:24). 믿음도 성령충만도 중요하지만 착함을 구비하지 못한 믿음과 성령충만은 교회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 튼튼하게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협력 목회로 부흥 발전한 교회였습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6). 착한 사람 바나바는 심각한 과거를 지닌 사울을 데려다가 그를 격려하고 그를 내 세우면서 협력 목회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넷째,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다섯째,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 인종, 다 계급, 다 사회 교회였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안디옥 교회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여섯째,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교회였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행13:2).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일곱째, 안디옥 교회는 결국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에 총력을 기울인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안디옥교회는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했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가서 주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기지가 되었고 세계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가 선교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착한 사람 바나바의 믿음의 헌신과 사랑의 봉사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사람 선교에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착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 사도 바울이 가장 사모하고 가장 사랑한 유럽 선교의 기지가 된 빌립보 교회의 모습과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빌1:8)고 고백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 나의 사모,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라고 불렀습니다(빌4:1). 빌립보 교회의 특징 세 가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5).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15). 둘째,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4:15).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예한 봉사하는 교회였고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셋째,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빌립보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쁨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는데 그때 그 기쁨은 간수에게 전염되었고 루디아에게 전염되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기쁨과 승리는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대로 전염되었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선교하는 교회가 된 배경에는 루디아의 아름다운 믿음의 헌신과 사랑의 봉사가 있었습니다. 루디아의 헌신과 봉사의 모습 세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루디아는 영혼을 열었습니다. 루디아는 소아시아 두아디라에서 온 이방인 여자였습니다. 루디아는 자주 천 장사하는 사업가였습니다. 루디아는 사업에 성공했고 어느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크고 좋은 집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공허했습니다.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소에 가보곤 했습니다. 안식일마다 강변 기도처소에 가서 영혼을 열고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루디아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했지만 루디아도 자기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14). 그래서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변에서 온 가족과 가솔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셋째, 루디아는 손을 열었습니다. 손을 연다는 것은 도움의 손을 편다는 말입니다. 손을 연다는 것은 지갑을 열고 집을 연다는 뜻입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도움의 손을 폈고 지갑을 열었고 집을 열었습니다.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15). 루디아는 사도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루디아는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았습니다. 결국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교회가 되었고 유럽 선교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음과 손과 발이 열려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가서 마음과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사람과 선교의 사람이 됩니다.
가평 열린문교회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아름다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진 안디옥교회와 같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선교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과 마음과 손과 집을 활짝 연 루디아의 봉사로 세워진 빌립보교회와 같은 열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선교하는 아름다운 열린문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서 누군가와 “함께 살고” 누군가와 “함께 놀아주고” 누군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제물 되는 삶을 살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예수님 닮고 사도 바울을 닮은 선교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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