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빙점] 1. 눈보라가 그친 뒤
눈보라가 창 밖을 비스듬히 흐르듯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흩날려서 날아올랐다가는 이내 다시 옆으로 사라져갔다. 어젯밤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의 흔적이었다. 쓰지구치 병원의 원장 게이조는 이층 서재에 앉아 바람에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시험림의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높이가 족히 20미터나 되는 스트로브소나무의 그루마다 눈보라가 몰아쳐 검은 둥치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어, 요코.’
해질녘의 어스레한 숲을 바라보면서 게이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던 요코가 만일 그대로 죽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만으로도 게이조는 견딜 수 없었다. 겨우 만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요코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결국 자시이라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쓰지구치 집 옆에 있는 시험림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비에이 강변에서 날품팔이 인부인 사이시 쓰치오에 의해 살해된 루리코는 그때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1946년 7월 21일, 가미가와 신사제가 열린 대낮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출장 갔다가 돌아왔을 때.......’
게이조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어둡게 그늘졌다.
그 날 아내인 나쓰에는 평소와 달리 도취된 듯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나쓰에는 어떤 손님이 다녀갔는지 게이조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쓰에는 게이조가 집을 비운 사이에 가정부 쓰기코와 다섯 살 난 아들 도오루를 영화관에 보내고, 루리코를 밖으로 놀러 보낸 뒤 쓰지구치 병원의 안과 의사인 무라이 야스오와 밀회를 즐겼던 것이다.
‘그 사이에 루리코는 살해되었다.’
강변에서 죽은 루리코의 목에 남아 있던 범인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어제 일처럼 당시의 슬픔과 미움도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내와 무라이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루리코가 죽은 후에 나쓰에는 여자아이를 기르고 싶다고 말했다.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쓰에는 불임수술을 받고 있었다.
‘난 어째서 그런 무서운 짓을........’
게이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갑자기 시험림 위에서 까마귀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내다보니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로 커다란 까마귀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질 만큼 많은 무리였다.
게이조의 절친한 친구 다카기 유지로는 삿포로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 다카기가 촉탁으로 있는 유아원에 감옥에서 자살한 범인 사이시의 딸이 맡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게이조는 그 여자아이를 나쓰에에게 기르게 할 결심을 한 것이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게이조는 자조의 웃음을 웃었다.
“여보, 식사하세요.”
문밖에서 머뭇거리는 듯한 나쓰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나쓰에의 조용한 발소리를 들으면서 게이조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게이조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일생의 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했던 18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라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내에 대한 복수심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게이조는 일어선 채 창 너머로 시험림을 내다보았다. 까마귀가 아직도 숲 위에서 요란스럽게 울고 있었다.
‘요코, 용서해 주렴.’
나쓰에한테서 자신이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요코는 결국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요코는 사이시의 딸이 아니었다. 다카기의 친척인 미쓰이 게이코가 남편의 출정 중에 나카가와 미쓰오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였다.
게이조와 다카기는 학창 시절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 다카기가 사이시의 딸이라면서 넘겨 준 요코가 설마 전혀 다른 사람의 자식이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게이조는 다카기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아마도 자신도 다카기의 입장이었다면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누가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자식을 키우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범인의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만일 요코가 정말 사이시의 자식이라면 요코는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게이조는 진심으로 다카기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선생님, 식사하세요.”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 것은 나쓰에의 친구이자 일본 무용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후지오 다쓰코였다. 평소에는 건강미가 넘치던 다쓰코의 동그란 얼굴도 근래 사흘 동안 요코의 간호를 하느라 홀쭉해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선생님.”
다쓰코는 창가에 서서,
“까마귀까지도 기뻐서 난리잖아요.”
하며 게이조를 보고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 보였다. 게이조는 눈을 끔벅거렸다.
“요코에게 미안해서.......”
게이조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예요, 선생님, 그 목소리는......? 게다가 그런 얼굴을 하시고. 생각해 보세요. 요코는 살아났어요. 목숨을 건졌다구요. 그러니 그런 침울한 얼굴은 하지 마세요. 기쁠 때는 기쁜 얼굴을 해야 되잖아요?”
쏘아붙이듯이 말하면서도 다쓰코의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게이조는 창 너머로 요코의 방을 바라보면서 다시 눈을 끔벅거렸다. 다쓰코 앞에 있으면 게이조는 이상하게 자신이 손아랫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의 상처까지 위로 받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다카기 씨는 사흘이나 병원을 비웠잖아요. 한시 바삐 삿포로로 돌아가게 해드려야죠. 그러니 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세요.”
다쓰코가 앞장서서방을 나갔다. 게이조는 여전히 요코의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에서는 단젠(솜을 두껍게 둔, 소매가 넓은 일본옷)차림의 다카기, 대학생인 도오루, 도오루의 친구인 기타하라, 그리고 나쓰에, 다쓰코가 식탁에 둘러앉아 게이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샹들리에 풍의 전등이 밝게 비치는 식탁의 전골 냄비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었나?”
방금 자고 일어난 듯한 다카기가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얼굴을 게이조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도오루는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모두들 눈이 푹 들어가 있었다. 요코를 간호하느라 오늘 아침까지 꼬박 사흘 밤을 샌 탓인지 저마다 지쳐 있었다. 요코의 상태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간호사 두 사람에게 뒷일을 맡기고 모두들 오후까지 잠을 잤으나 여전히 잠이 부족했다.
“아, 미안하네. 서재에 있었어.”
게이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쓰에 옆에 가서 앉았다. 다쓰코가 맥주를 땄다.
“이번 일로......여러분께 폐를 끼쳐서......덕분에 요코는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
게이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뭘........여하튼 다행이야, 쓰지구치.”
다카기가 먼저 잔을 들었다.
“천만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라구요.”
다쓰코는 갑자기 그 우아한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도오루는 자신의 상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요코의 유서를 생각했다. 그는 유서 내용을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도오루 오빠
지금 요코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오빠입니다.
요코가 누구를 제일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오빠, 죽어서 미안해요.
요코
요코는 기타하라를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쓰지구치 집안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오루를 친오빠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 것은 도오루를 이성으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도오루는 옆에 앉아 있는 기타하라를 쳐다보았다. 기타하라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으나 갑자기 다카기에게 얼굴을 돌렸다.
“다카기 선생님, 요코의 어머니에게는 다른 자식이 있나요?”
“응, 있지. 사내아이 둘.”
“어머, 그럼 요코에게도 형제가 있는 거군요. 동생이에요, 오빠예요?”
다쓰코가 젓가락을 멈추고 다카기를 보며 물었다.
“음, 오빠와 동생입니다.”
“오호, 형제가 둘이나.....”
아버지는 달라도 요코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개 무량한 듯 게이조가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는 달라도 요코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개 무량한 듯 게이조가 맞장구를 쳤다.
‘요코에게도 형제가 있었구나!’
도오루는 갑자기 발을 걷어 채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코의 오빠로 자란 도오루로서는 요코에게 오빠와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선뜻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오빠는 나만이 아닌가?’
도오루의 감정은 미묘했다. 그는 요코의 오빠인 동시에 애인도 되고 싶었다. 그 어느 위치도 다른 사람에게 치매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요코의 어머니 집은 오타루라고 하셨지요? 그곳 주소가 어떻게 되죠?”
잠이 부족한 도오루의 목소리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잠겨 있었다.
“주소? 주소는 알아서 뭐하려고? 설마 그들 모녀에게 눈물의 상봉이라도 주선해 주려는 건 아니겠지?”
농담 섞인 어조였지만, 다카기의 커다란 눈이 번뜩였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요코가 만나고 싶다고 한다면 말이에요. 요코에게도 자기 친부모를 만날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치로 따진다면야 아마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도오루, 그쪽에는 그쪽 가정 형편이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남편이나 아들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살고 있어. 그러니 찾아가는 일만은 삼가 줬으면 해.”
일이 이렇게 되어 다카기는 요코의 친부모를 밝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쓰지구치 집 사람들만 알고 있어야 했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요?”
도오루가 힐난하는 듯이 다카기를 쳐다보았다. 요코는 자살까지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요코를 낳은 어머니는 딸을 유아원에 맡기고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다니. 도오루는 분노를 느꼈다.
그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요코는 생모나 형제도 만나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것이 요코를 독점하려는 감정과 모순된다는 것을 도오루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맥주 잔을 입에 댔다. 맥주는 씁쓸했다.
“다카기 씨, 당신 손에 수갑을 채워야겠군요.”
도오루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린 다쓰코가 중재하듯이 말했다.
“어째서요?”
기타하라도 도오루의 시무룩한 얼굴을 흘끔 바라보면서 다쓰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잖아요, 기타하라 씨? 의사가 환자의 비밀을 누설한 걸요. 의사법 위반이 되는 셈이지요. 안 그래요, 쓰지구치 선생님?”
게이조는 웃었다.
“아무튼 좋아요, 내 손에 수갑을 채욷은 풀든. 요코는 다시 살아났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안 그래요, 나쓰에 씨?”
아까부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쓰에는 얼굴을 들고 살며시 끄덕였다.
도오루는 그런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살을 기도한 요코가 다시 살아난 것은 중환자가 목숨을 건진 것과는 다르다. 몸의 상처는 치유할 수 있어도 마으믜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는다. 도오루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