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 | | ⓒ2004 이돈삼 | | 한반도의 최남단 땅 끝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도 건강한 생명력은 그대로 배어 있다. 국토순례의 출발점 '땅끝'을 떠올리며 남으로, 남으로 향하고 있는데 '김남주 생가'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10∼20미터를 지나 겨우 차를 멈춘 다음 후진기어를 넣었다.
고 김남주 시인이 누구였던가? 암울했던 시절, 시대를 밝혔던 횃불이자 투철한 전사였지 않는가. 신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던 실천적 지식인이고 시인이 바로 그였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시가 무기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투쟁적인 구호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아니 요즘엔 그보다 훨씬 빨리 변해간다고 하는데.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건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곳곳에서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안타깝고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 | ▲ 김남주 생가 입구 | | ⓒ2004 이돈삼 | |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김남주 시 '노래'(1977년)의 전문 -
 | | ▲ 장독대를 배경으로 피어 있는 국화 | | ⓒ2004 이돈삼 | | 시인의 생가는 한반도 땅끝으로 가는 길목,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다. 시인의 집은 동생(김석종)이 지키며 살고 있지만 들에 나갔는지 없었다.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돌담장을 에워싼 담쟁이덩굴, 장독을 배경으로 핀 국화꽃만 애잔하게 다가온다.
이리저리 시인의 체취를 찾다가 갑자기 떠오른 구절이 있었다. "나는 나의 시가…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랬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었다.
나 또한 학창시절, 그 구절에 절대적으로 공감을 했었다. 또 감동을 하고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구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고인의 표현대로 하나의 장식품으로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시인의 몸은 이미 이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호흡은 여전히 거칠기만 한데…. 만추의 햇살이 봄날의 그것처럼 따스하고 유난히 눈을 부시게 만드는 오후였지만 나의 뇌리에서는 호사가, 장식품이란 단어가 맴을 돈다.
 | | ▲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 전경 | | ⓒ2004 이돈삼 | |
 | | ▲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들어가는 길. 도로에서 800여미터 떨어져 있다. | | ⓒ2004 이돈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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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도 울님처럼 잊어지지 않고 학창시절의 의로운 길에서 그 시인을 마음속으로 라도 안아주시는 님의 지극한 정성이 눈물 겹도록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군요 올리신 자료에 감사드리며 김남주 시인님의 체취를 저도 한번 느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