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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 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 하면 '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 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다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견해이다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그러나 유한하고 유흠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여클레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로부터와 '칼레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70인역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된 무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졌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역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 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 조차도 구약에 연유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래드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야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혜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 권위를 세 우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땅에서...매면 히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처럼 대치되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용어 사용법에 의하면 '매다'란 '금지하다' 또는 '금지하여 불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풀다'란 '허락하다' 또는 '허락하여 합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 용어를 어떤 행동의 규율을 부가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대치되는 두 용어를 응용해 유대인들은, 인도적이고 자유스러운 힐렐 학파의 랍비들과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샴마이학파의 랍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여지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예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 일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 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에, '그리고 나서', 그 때에'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을 경계하사...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야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웅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때로부터 -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한편 이 표현은 여러 학자들 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그매'를 준비하게 하셨다. 예루살램에 올라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증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엄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에루살렘에 욜라 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한 바였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등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것이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2:4). 그런데 마태가 특별히 이들 각각을 여기에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장로듸' 이란 유대의 열두제자들 가운데에서 재덕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고, '서기관들'이란 '율법사'또는 '교법사'로 불리우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만약 성경의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 삼 일에'란 '사흘반에' 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혀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보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붙들고'란 '프로스'와 '람바노' 취 하다 ,사로잡다 )의 합성어의 중간태 분사로서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간하여'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한 하실을 보여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본문은 헬라어 '히레오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히레오스'를 '호의를 가진', '자비로운', '은혜로운' 등으로 보아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히레오스'가 히브키어 '하릴라'(결코...않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는 70인역에서 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누구와 맞서는 상황에서 '결코',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를 인류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것이다
결국 베드로의 이 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속 사역의 참의미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혈기방자한 인간의 감정을 내세을 때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이 결코...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틀 직역하면 '이일이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단호한 부정의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