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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藝祖) : 문덕(文德)을 소유한 시조(始祖)라는 뜻으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데, 보통은 송(宋) 나라 태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에 대해 청(淸) 나라 고염무(顧炎武)는 “사람들은 송 나라 사람들이 자기 태조(太祖)를 예조(藝祖)로 부르는 것만 알지, 이전 시대부터 태조를 예조라고 해 온 사실은 모르고 있다.” 하였다. 《日知錄 藝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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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기화(氣化)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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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지금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내려 온 것이 당요(唐堯 요임금) 때라 하니, 이때는 중국이 개벽한 지 오래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우리나라에는 혹 인간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氣)가 화(化)했을 리가 혹 있을 듯하다. 그러나 신라 시조 이후로 말하면 곧 중국의 서한(西漢) 시대이므로 우리나라에 인간이 생긴 지도 이미 천여 년이 되었으니, 어찌 알에서 인간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혹 어떤 사람이, “은(殷) 나라의 시조는 어머니가 현조(玄鳥)의 알을 삼키고 잉태하였고, 주(周) 나라 시조는 어머니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느끼어 잉태하였다는 것도 황당하고 괴이하여 믿기 어려우나, 주자(朱子)는 오히려 그럴 리가 없다고 잘라서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자네가 유독 혁거세(赫居世)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입론(立論)하여 이제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하면서 역대의 책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두 삭제해 버리고 시조가 나온 바를 알 수 없다고 쓴다면,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법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현조와 거인의 발자국은 음양(陰陽)의 영감(靈感)에 불과하고, 그 잉태와 낳아 기른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앞서 징조를 보여 주므로, 후세에도 유오(劉媼)가 용(龍)에 감(感)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으니, 사실은 비록 일반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이치는 혹 괴이할 것이 없으니, 어찌 혁거세의 ‘알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말이 울었다.’는 것처럼 괴이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당시의 해모수(解慕漱) 금와(金蛙)ㆍ주몽(朱蒙)ㆍ송양(松讓)을 모두 천제(天帝)의 자손이라 말하고, 알영(閼英)ㆍ탈해(脫解)ㆍ수로(首露)ㆍ알지(閼智)가 모두 부모 없이 태어났다고 함에 있어서랴. 어째서 한쪽에 치우쳐 있는 작은 나라에 어지러이 천신(天神)의 자손이 많은가. 또 하물며 혁거세의 어머니를 혹 말하기를, ‘제실(帝室)의 딸로서 남편이 없는데 잉태하였으므로, 남이 의심할까봐 바다에 띄워 진한(辰韓)에 이르러서 혁거세를 낳고 드디어 신이 되었다……’고 하고, 지금 경주에는 성모(聖母)의 사당이 있으며, 고주몽(高朱蒙)은 《진서(晉書)》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성을 고씨라 한다……’ 하였으며, 김알지(金閼智)는 무열왕(武烈王 김유신(金庾信))의 비문에 소호 김천씨(少昊金天氏)로 가계를 삼았으니, 그 말들이 이리저리 변하여 적확하지 못함에랴. 또 어찌 틀린 것을 답습하여 잘못을 그대로 전하겠는가. 의심스러운 것은 진실로 그대로 전할 수 있으나, 틀린 것은 그대로 전할 수 없다.”고 하겠다. 《동사(東史)》
○ 삼한의 옛 전기에, “단군의 아버지는 환웅(桓雄)이며, 부루(夫婁)의 아들이 금와(金蛙)이며, 동명(東明)은 알에서 생겼고, 혁거세는 박[瓢]에서 나왔으며, 석탈해ㆍ김알지ㆍ수로왕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고, 또 탐라의 고(高)ㆍ부(夫)ㆍ양(梁) 세 성은 모흥(毛興)이란 구멍에서 나왔으며, 견훤은 큰 지렁이의 아들이고, 고려 태조는 당 나라 선종(宣宗)의 자손이며, 범증(范增)의 선조는 마니산(摩尼山)에서 나왔고, 손권(孫權)의 선조는 묘향산(妙香山)에서 나왔으며, 북제(北齊)의 태조 고 환(高歡)의 선조는 정주(菁州)에서 나왔고, 송 예조(宋藝祖)의 선조는 탐라에서 나왔으며, 본조의 청해백(靑海伯) 퉁두란(佟頭蘭)은 악무목(岳武穆)의 7대손이다.” 하니, 이와 같은 설은 그 잡다함을 이루 셀 수 없다. 단군의 사실은 오래되고 자세하지 않아서 이치로 따지기 곤란하나 신라의 세 성의 시조와 고구려의 고씨의 시조와 수로ㆍ견훤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 나라와 당 나라 때의 사람들이니, 중국의 경우는 뱀의 몸 복희씨(伏羲氏) ㆍ소의 머리 신농씨(神農氏) 등의 전설 이후에는 듣지 못하였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이런 기괴한 일이 있다 하니, 어째서인가. 우리나라의 문헌이 가장 늦게 나왔기 때문에 이치 밖의 말이 있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는 이른바 제동 야인(齊東野人)들의 말로써 취하여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동문광고》
[주-D001] 제동야인(齊東野人) :
《맹자》에 나온 말로, 제(齊) 나라 동쪽 야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로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야 등 신비스러운 시조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 출전『東典考』 卷12 論氣化
檀君之降 今不可攷 然其降在唐堯世 則此時中國去洪荒未遠 東方想或未有人物氣化之理 恐或有之 若新羅始祖以下 乃在西漢之世 東方之有民物亦巳千餘年矣 豈有卵化之理 或言商周玄鳥巨人迹之說 亦荒詭難徵 而朱子猶不能斷然謂其無理子 獨於赫居世 如是立論 今修東史 盡削歷代簡冊所載之說而筆之 以不知其所自出 無乃不合於疑 而傳疑之法耶 曰此不然 玄鳥巨迹不過陰陽之靈感 其胎孕産育 與人無異 帝王之興有開 必先後世亦有如劉媼之龍感事雖非常理 或不恠 豈如赫居世卵降馬嘶之恠異無理耶 況當時慕解漱金蛙朱蒙松讓皆言天帝之出 閼英脫解首露閼智 皆無父母而生 是何偏方小國擾擾多天神之子孫耶 又況赫居世之母 或言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泛海抵辰韓生赫居世 遂爲神云云 今慶州有聖母祠 高朱蒙則晋書載記云 高句麗之人 自言高辛氏之後 姓高氏云云 金閼智則武烈王(金庾信)碑 以少昊金天氏爲系 其變幻不的如此 又豈可襲謬而傳訛乎 疑固可傳 訛不可傳也(東史) 三韓舊傳 檀君父桓雄夫婁子金蛙 東明卵生 赫居世出於瓢 昔脫解金閼智首露王 皆從天降 又耽羅高夫梁三姓 從毛興穴出 甄萱爲大蚯蚓子 麗祖爲唐宣宗之孫 范增之先出於摩尼山 孫權之先出於妙香山 北齊太祖高歡之先 出於菁州 宋藝祖之先 出於耽羅 國朝靑海伯佟豆蘭爲岳武穆七代孫 如此之說 不勝其紛紜 夫檀君之事邈矣鴻荒 難推以理 而至於新羅三姓之祖 勾麗高氏之始首露甄萱皆漢唐時人 中國則蛇身牛首以後 未之聞焉 獨於東國有此奇恠之事何哉 東方文獻出之最晩 故不經理外之言 無所不有 是所謂齊東野人之說 不可取準矣(同文廣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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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9년 임진(1892) 3월 28일(병술) 맑음
29-03-28[46] 전곡과 무기의 비축을 적임자를 찾아서 맡기고 명하는 일을 부지런히 거행하라고 통제사 민형식에게 내린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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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사 민형식(閔炯植)에게 교서를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한 시대의 보필이 되는 사람을 선발하니 훌륭한 장수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서이고, 삼도(三道)의 인후(咽喉)가 되는 요해지를 맡기니 권력을 위임받은 장수의 위엄을 떨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경에게 한 지방을 맡기는데 내가 마음으로 선발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저 바닷가에 있는 큰 방어진은 참으로 영남(嶺南) 지방의 중요한 진(鎭)이다. 군영을 창설하고 보루를 만들어 거북선으로 수백 년의 환란에 대비하여 왔고, 바다를 끼고 호수를 거점으로 삼아 호부(虎符)로 수천 리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지켜 왔다. 지형은 매우 장대하니 안으로는 많은 보루가 있고 밖으로는 온갖 종족들이 있으며, 형체는 매우 중요하니 왼쪽으로는 전라도와 충청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첩첩이 쌓인 산이 있다. 근래에 비어(備禦)가 점점 소홀해지는 것은 태평 시대에 직무를 게을리 하는 데에 연유한다. 전곡(錢穀)과 무기의 비축은 적임자를 찾아서 맡겨야 하고 망루(望樓)와 전함(戰艦)의 정비는 지금 먼저 해야 한다.
〈○〉 敎統制使閔炯植書, 王若曰, 揀一代爪牙之士, 思功聽鼙, 寄三道咽喉之方, 威振仗鉞, 委卿方面, 簡予在心, 眷彼海隅之巨防, 實是嶠南之重鎭, 創營開壘, 龜艦備屢百年陰雨之虞, 控海據湖, 虎符鎭數千里保障之地, 形便克壯, 內衆堡而外百蠻, 爲體甚要, 左兩湖而右重嶺, 邇來備禦之漸忽, 蓋緣恬嬉而升平, 錢穀兵甲之峙儲, 待其人而可屬, 樓櫓舟楫之修備, 迨此時而必先。 惟卿, 名祖周孫, 亞卿峻秩, 謹飭之容, 寬厚之度, 宛有世卿家範儀, 宏遠之猷, 壯烈之風, 允矣眞將軍氣像, 早以登庠之藝, 繼勤喉院之勞, 屢試分憂之任, 爰有口碑之譽, 玆授卿, 以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卿其祗服寵命, 益懷良規, 運籌勁略, 鎭嚴荊甌之遐, 制梱重威, 拒干邊城之患。 於戲, 無替丙枕之戒, 克勤申命之休, 金城出屯, 必效充國之進奏, 銅柱立標, 爰讓伏波之樹勳, 故玆敎示, 想宜知悉。 弘文館修撰李舜夏製進 。
행주대첩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 처영(處英)의 의승군(義僧軍)이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이들은 활·칼·창 외에 화차(火車)·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무기를 만드는 한편, 조총에 대비하여 토제(土堤)를 쌓고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또한 조도사(調度使) 변이중(邊以中)은 행주산성과 금천의 중간에서 서울의 적을 견제하며 권율의 부대를 돕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고시니[小西行長]·이시다[石田三成]·구로다[黑田長政]·요시가와[吉川廣家] 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성을 포위·공격했다. 성 안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수차석포·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 마침 충청병사(忠淸兵使) 정걸(丁傑)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우키타·이시다·요시가와 등 일본군 장수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창·칼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포저집 제31권 / 묘비명(墓碑銘) 4수(四首)풍양군(豐壤君) 조공(趙公) 신도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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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경(儆)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성(姓)은 조씨(趙氏)요,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시조(始祖) 휘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벽상개국 공신(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가 되었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또 문하시중평장사가 되었고, 평장사의 4대손인 휘 계팽(季砰)이 승지가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지진(之縝)은 공조 참판을 추증받았고, 조부 휘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을 추증받았으며, 고(考)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로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세임(世任)의 딸이다.
공이 비록 무업(武業)을 닦긴 하였지만 사서(史書)에 널리 통하고 고사(古事)를 많이 알아서 유사(儒士)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늦은 나이에 등제(登第)하긴 하였지만 매우 성망(聲望)이 있어서 사람들 모두가 대장(大將)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즉시 선전관(宣傳官)과 비국랑(備局郞)에 선발되었으니, 이는 바로 신진(新進) 무신(武臣)의 현직(顯職)이었다.
외방으로 나가서 의주 판관(義州判官)이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감찰을 거쳐서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제수받았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진하여 인산 첨사(麟山僉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러 떠나기도 전에 다시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바뀌었으니, 이는 만포가 인산보다 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을 떠나서 중로(中路)에 이르렀을 때 또 강계 부사(江界府使)의 임명을 받았다.
공은 부임하는 곳마다 폐해를 고치고 비용을 절감하고 호강(豪强)을 억누르고 소민(小民)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그리고 공은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결백한 자세를 유지하고 관리를 엄정하게 어거하고 권귀(權貴)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상사(上司)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안정을 취하게 된 것이다. 강계(江界)에 있을 때에 정상(鄭相) 송강(松江 정철(鄭澈) )이 그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공이 고상(故相)의 예(禮)로 대우했다고 시의(時議)가 노하면서 탄핵을 하고는 마침내 법사(法司)에 내려 치죄(治罪)하게 하여 관작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상이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열읍(列邑)의 무비(武備)를 점검하도록 하였는데, 신립이 공을 임명하여 막하(幕下)의 도총제(都摠制)로 삼았으므로 관서(關西)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반드시 침입할 형세였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4월에 왜적이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침략하자 조정이 장수를 선발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공이 영남우도 방어사(嶺南右道防禦使)가 되어 그날 즉시 출발하였다. 그러나 창졸간에 많은 병력을 모으기가 어려워서 함께 내려간 인원이 단지 20여 인밖에 되지 않았으나, 공의 뜻은 이미 자기 한 몸을 잊었으므로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왜적과 싸우게 되면 결코 후퇴하지 않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라고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렀을 때 휘하의 병력이 겨우 100인에 불과하였다. 그때 왜적과 만나자 사졸(士卒)들이 모두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는데, 공이 독려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니 왜적이 마침내 달아났으므로 공이 기병(騎兵)에게 그 뒤를 쫓게 하였다. 공이 몇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뒤에 있다가 왜적 3명이 풀숲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공이 직접 2명의 왜적을 활로 쏘았는데, 왜적 1명이 뒤에서 튀어나와 칼로 쳤으므로 공이 허리와 겨드랑이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에 공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맨손으로 적을 붙잡아 땅에 쓰러뜨리고는 그의 가슴 위에 올라타고서 목을 졸랐으나 손가락이 또 칼날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바로 죽이지 못하였는데, 이때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달려와서 그 왜적을 찔렀다.
왜적이 육지로 올라온 지 열흘이 채 못 되어 경성(京城)까지 올라왔는데, 우리나라는 대소(大小)의 장리(將吏) 모두가 소문만 듣고도 흩어져 달아나기만 하였을 뿐 감히 왜적과 맞서서 싸우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공이 홀로 110인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을 거느리고 왜적과 육박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패주시켰으며 또 죽이고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공이 만난 왜적이 비록 큰 병력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왜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이 부상당한 상처가 심해서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호남(湖南)의 구례현(求禮縣)으로 가서 조섭(調攝)하였다. 그러다가 상처가 모두 아물기도 전에 병든 몸을 이끌고 국가를 위해서 다시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6월에 연천(漣川)에 이르렀을 때 대부인(大夫人 모친 )을 만나 열흘 정도 머물렀다. 이때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 권징(權徵)이 계청하여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가을에 대부인이 별세하였는데, 순찰사가 기복(起復)을 청해서 공이 다시 대장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공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당시에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독성(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용인(龍仁)의 왜적이 공격해 왔다. 그러나 여러 의병과 관군은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휘하의 수십 기병(騎兵)을 인솔하고 성원(聲援)하면서 왜적을 따라 진퇴(進退)하며 끝내 피하지 않자 왜적이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물러나 돌아갔다. 권공(權公)이 공의 의리에 감격한 나머지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왜적 사이에 출입할 적에 기내(畿內)의 장교(將校) 중에 한 사람도 응원하는 자가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성원한 사람은 오직 조경(趙儆) 한 사람뿐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공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였다.
당초에 수원 부사인 김취려(金就礪)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이 부사의 일을 행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김취려가 스스로 나왔으므로 공이 사양하고는 물러나 광주(廣州)의 농사(農舍)로 돌아온 뒤에 상제(喪制)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권공이 공을 중군장(中軍將)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공이 의리상 감히 물러날 수 없어서 곧장 나아왔던 것이다.
계사년(1593) 정월에 중국 군대가 평양(平壤)과 개경(開京)의 왜적을 소탕하고는 머지않아 경성(京城)을 수복하려고 하자, 권공이 군영을 옮겨 중국 군대와 힘을 합치기로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먼저 지형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하고는 마침내 밤에 강을 건너 군대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 하나를 구했으니, 이곳이 바로 행주(幸州)이다. 그리하여 곧바로 돌아와서 보고하자 권공이 행군하여 그곳에 가서 진을 쳤다.
이때 권공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대거 출동하였으니 왜적도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목책(木柵)과 같은 것은 설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고립무원의 우리 군사가 왜적의 많은 군사와 가까이 있으니, 성에 목책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나, 권공은 이 건의를 듣지 않았다. 이때 마침 체찰사인 정공(鄭公 정철(鄭澈) )이 양천(陽川)에서 권공을 불러 상의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권공이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공이 제군(諸軍)에게 목책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도록 하였으나 제장(諸將)이 따르려 하지 않자, 공이 “군중(軍中)에서는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법도가 있다.”라고 설득을 하니 제장이 모두 공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이틀 사이에 목책을 설치하는 일이 이루어지자 대중이 마음속으로 매우 든든하게 여겼으며 권공 역시 와서 보고는 기뻐하였다.
목책을 설치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왜적이 과연 무리를 총동원하여 쳐들어왔다. 그들의 병력은 7, 8만 명쯤 되었는데, 당시 행주에 주둔한 아군은 5, 6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활을 쏠 수 있는 자는 겨우 70여 인에 불과하였다. 왜적이 새벽부터 행동을 개시하더니 조금 뒤에는 몇 리에 걸쳐 그들먹하였으며 해가 뜨자 칼빛이 온 들판을 가득 메웠으므로, 군사와 백성들 모두가 겁에 질려서 핏기가 없었다. 왜적의 무리가 성책(城柵) 아래까지 다가왔으나 성책 안의 사람들 모두가 결사적으로 싸웠으므로 왜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달아났다. 그 뒤에는 왜적이 병력을 나누어 번갈아 공격을 하면서 전자(前者)가 물러나 휴식을 취하면 후자(後者)가 그 뒤를 이어 공격하곤 하였는데, 이와 같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정오를 넘기는 동안 왜적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렸다.
그러자 왜적이 이번에는 긴 나무를 모아 누대 모양의 높은 교자(轎子)를 만든 뒤에 수백 인이 메고 올라와서는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인을 태워 아군의 진중(陣中)에 사격하였다. 이에 공이 지자총통(地字銃筒)을 가져오게 하여 포전(炮箭 장군전(將軍箭) )마다 대도(大刀) 두 개씩을 묶게 한 뒤에 왜적의 교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발사하게 하니, 마치 천둥이 진동하듯 포탄이 날아가면서 교자가 산산조각이 나고 교자 위에 있던 왜적의 지체(肢體)가 갈가리 찢겨 땅 위로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왜적이 더 이상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를 못하였다. 그러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지자 도망가기 시작하였는데, 공이 용감한 40명의 기병을 내보내 추격하게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를 “우리의 용기만 보여 주면 되니 끝까지 추격하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에 기병이 몇 리까지 추격하다가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태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도 모두 중상을 입어서 신음하는 소리가 며칠 동안이나 끊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대첩(大捷)을 거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순찰사와 제장(諸將)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의 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성책을 설치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전투가 한창일 때에 공이 시석(矢石) 가운데에 우뚝 서서 장사(將士)들을 독려하기를 “땅의 형세가 유리한 데다가 사람들이 또 화합하여 단결하였으니 우리는 필승을 거두리라고 확신한다. 또 승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물러나서는 살아날 길이 없으니, 물러났다가 똑같이 죽기보다는 차라리 왜적을 죽이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사람들이 크게 분발하였다. 순찰사가 힘이 빠져서 막사(幕舍)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강변으로 내려가서 도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므로, 공이 순찰사를 모시고 나와서 군중(軍中)에 보이며 “대장이 여기에 계신다.”라고 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와 같은 공의 행동 모두가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왜적이 그동안 팔도(八道)를 횡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그들이 대패한 전투로는 오직 평양(平壤) 전투와 이곳의 전투뿐이었다. 그런데 평양 전투로 말하면 용감무쌍한 6만의 병력을 가지고, 깊이 들어왔다가 고단해진 왜군을 섬멸한 것이니, 그 형세가 마치 바윗돌로 달걀을 눌러 으깨는 것과 같았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이곳의 전투로 말하면 수백 명의 병력을 가지고 7, 8만이나 되는 강대한 왜적을 상대하였는데도 그들을 크게 무찔러 퇴각하게 하였으니, 평양 전투와 비교하면 난이도에 있어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고 할 것이다.
이때에 중국 장수인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 )이 바로 얼마 전에 벽제(碧蹄)에서 패하고는 하루 내내 달아나 봉산(鳳山)으로 회군(回軍)해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라 안의 사기가 모두 저상(沮喪)되어 있었음은 물론이요, 제독 역시 왜적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다시 군대를 출동시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행주 대첩의 소식을 듣고는 처음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다가 노획한 수급(首級)과 기장(器仗)을 앞에 진열해 놓자 제독이 크게 기뻐하면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이에 왜적이 방금 패한 데다가 중국 군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즉시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상이 이 일을 무척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는 뜻으로 순찰사에게 두 자급(資級)을 더해 주고 공에게는 하나의 자급을 더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삼았다. 그리고는 경성이 수복된 뒤에 유홍(兪泓)을 유도 상신(留都相臣)으로 삼고, 공을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대가(大駕)가 돌아오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국(局)을 하나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한 뒤에 절강(浙江)의 진법(陣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 국의 명칭을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고 하고는 공을 그 대장으로 삼았다.
당시에 큰 난리를 겪은 뒤라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으므로 군병이 되어 급료를 받고 싶어 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일이 분분하게 일어났는데, 공이 한 길 담장을 뛰어넘거나 미곡 1석(石) 무게의 바위를 들어 올리는 자들만 들어오게 한 뒤에 하나하나 시험을 치르게 하고 사정(私情)을 두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병이 모두 나이 젊은 정예 군사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열심히 훈련시키면서 매달 교육 과정을 설정하고는 반드시 직접 살펴보았으므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기예(技藝)가 정묘(精妙)해지고 융진(戎陣)이 정제(整齊)되기에 이르렀다. 상이 간혹 강습하는 것을 친림(親臨)하곤 하면서, “오합지졸을 훌륭한 장수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겠는가.”라고 하고는 전후에 걸쳐서 공에게 구마(廏馬)를 하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갑오년(1594) 가을에 서쪽 변방의 사태가 걱정스러웠으므로 특명을 내려 공을 순변사(巡邊使)로 삼고는 경보(警報)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파견하려고 하였는데 끝내 경보가 없었으므로 가지 않았다. 북방의 번호(藩胡)가 배반하고 심처호(深處胡) 쪽으로 들어갔으므로, 조정이 변고를 걱정하여 북병사(北兵使)을 뽑아서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공이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는데, 유상(柳相)이 아뢰기를 “군병을 훈련시키는 일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 변동시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 곤수(閫帥)에 결원이 생길 때에도 병조에서는 감히 공을 의망하지 못하였다.
을미년(1595)에 강도가 연서(延曙)와 벽제(碧蹄) 사이에 출몰하면서 길을 가는 중국 군사를 죽이곤 하였는데 군현(郡縣)에서 잡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계책을 세워서 강도를 체포하니 중국 장수가 크게 기뻐하였다. 상이 공에게 하나의 자급을 더해 주도록 명하자 대관(臺官)이 지나치다고 논하였는데, 대관이 누차 아뢴 뒤에야 윤허하고는 공에게 구마를 하사하였다.
병신년(1596) 7월에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한산(韓山)과 홍산(鴻山) 사이에서 기병(起兵)하였는데, 며칠 사이에 그 무리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일이 보고되자 도성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조정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빈청(賓廳)에 나아가서 정예 군사 5, 6백 명을 데리고 가서 사로잡아 오겠다고 청하였다. 대신이 즉시 공의 말을 아뢰며 공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공을 위유(慰諭)하면서 술을 하사하고 보내었다. 공이 길을 떠나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이몽학이 패사(敗死)했다는 말을 듣고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정유년(1597) 가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하였는데 호남 지방을 거쳐 올라오면서 장차 기전(畿甸)을 육박할 형세였다. 이때 좌상 김응남(金應南)이 영상 유성룡(柳成龍)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훈련도감은 본디 영상이 만든 것이었고 또 영상이 그 도감의 제조(提調)로 있었으므로, 영상이 정고(呈告 휴가 신청 )한 틈을 타서 좌상이 중국 장수의 뜻을 빙자하며 도감의 군병을 출동시켜 왜적을 막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도감의 일을 잘못되게 함으로써 영상을 밀어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래 도감이 설치된 이래로 상을 시위(侍衛)하는 일은 전적으로 도감의 군병을 활용하였는데, 왜적이 이미 침입한 상황에서 상이 경성을 떠나야 할 일이 혹시라도 생길 경우에는 시위하는 일을 허술하게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영상이 강력하게 그 일을 반대하며 쟁집(爭執)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좌상의 주장을 따라서 공을 보내며 도감의 군병을 출동시켰다가, 영상의 말을 듣고는 그 군병을 나누어 절반의 병력은 서울로 돌아와 시위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공이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간 군병의 숫자는 400명에도 차지 않았다.
그런데 공이 행군하여 용인(龍仁)에 도착했을 때에, 도원수(都元帥) 권공(權公 권율(權慄) )이 입조(入朝)하여 공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와 함께 진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그곳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다. 때마침 왜적이 소사(所沙)에 이르렀다가 중국 장수 마귀(麻貴)에게 패하여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상(金相)의 당인(黨人)들이 공이 두류(逗留)했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중로(中路)에서 공이 머물러 있었던 것은 권공의 뜻이었던 만큼 공의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행해지지 않아서 공이 예전과 같이 직책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무술년(1598) 봄에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특명으로 판윤에 제수되었는데, 예전에 공을 논핵(論劾)했던 자가 다시 논하면서 “사람과 직책이 서로 걸맞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이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또 이르기를 “사람과 직책이 서로 걸맞지 않는 현상은 온 조정이 모두 그러한데, 인재를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는 없는 일이다. 조경(趙儆)은 참으로 이 직책에 합당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23일 동안 논핵하는 일이 계속되자 상이 윤허하였다.
기해년(1599)에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옮겼다. 그로부터 6일째 되는 날에 회령 부사(會寧府使)의 자리가 비게 되자 근도(近道)의 병사(兵使)로 비의(備擬)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마침내 공이 낙점을 받고서 회령 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회령부는 번호(藩胡)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사로 취임한 자들이 대부분 염가(廉價)를 통사(通事)에게 주어 돈피(獤皮 담비 가죽 ) 무역을 하게 하였고, 통사는 또 그 값을 깎아서 번호에게 나누어 주고는 정수(定數)를 바치도록 요구하였으므로 번호가 통곡하고 원망하여 배반하고 떠나가는 자들이 많았다. 공이 부임하자 곧바로 통사를 파직시키고 단지 통역하는 한 사람만을 남겨 두고는 돈피 무역을 마침내 근절시켰으므로 번호가 모두 열복(悅服)하면서 칭송해 마지않았다.
경자년(1600)에 노추(奴酋 누루하치 )의 지역을 토벌할 적에 공이 좌영 대장(左營大將)이 되었는데, 급기야 오랑캐의 소굴에 이르렀을 때 남녀가 모두 도망가 숨고 부락이 텅 비어 있었다. 병사(兵使)가 야음(夜陰)을 틈타 오랑캐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둘러 군대를 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대군이 국경 밖으로 나왔으니 오랑캐에게 위엄을 떨쳐 보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지금 서둘러서 돌아간다면 날이 어두워진 산골에서 무슨 환란을 당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나, 병사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단기(單騎)로 먼저 빠져나가면서 공에게 후위(後衛)를 맡게 하였다. 그런데 오랑캐가 돌아가는 길을 차단한 결과 아군 가운데 오랑캐 수중에 떨어진 자가 많았고 병사 역시 하마터면 적에게 잡힐 뻔했다가 간신히 면하였는데, 공은 후위를 맡아 서행하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행군을 하여 공이 거느린 부대만 유일하게 온전하였다. 우리나라의 경내로 들어와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태반이 따라오지 못하였으므로, 병사가 우독(牛犢) 100여 두를 오랑캐에게 주고 군사들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승리했다고 보고하며 공로를 논하였다. 그리고는 감사가 공에게 말하기를 “병사의 공로도 공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번의 전투는 패한 것이요 이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공로를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공로를 보고할 적에 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감사와 병사는 모두 가자(加資)되었지만, 공에게는 상이 없었다.
신축년(1601)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어 돌아갔다가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탐라(耽羅)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서 준마(駿馬)를 생산하는 것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났으며, 또 공장(工匠)이 많아서 본부(本府)에 소속된 자들이 5, 6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섬 안의 토지가 척박하여 곡식이 귀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말을 기르는 한편으로 가죽 신발과 같은 종류의 피혁(皮革) 제품을 만들기도 하여 의식을 해결하였다. 그런데 관리들이 으레 말을 많이 취하고 잡물(雜物)을 만들게 해서 한편으론 권귀(權貴)를 섬기며 한편으론 자신을 살찌웠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땅으로 여겼다.
하지만 공은 부임한 뒤로 몇 개월이 지나도록 말 한 필도 취하지 않았다. 정의(旌義)의 백성 중에 거의 1000필 가량의 말을 기르는 자가 있었는데, 양마(良馬) 1필을 끌고 와서 공에게 바쳤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백성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목사가 부임하는 그날에 바로 말을 잡아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말을 구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와서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그 말을 받지 않고는 군관 등을 단속하여 겁매(劫買)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부(府)의 장부를 즉시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공장에게는 단지 상공(上供)하는 물품만 제작하도록 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부역을 시키지 않았다. 제주에서는 녹비(鹿皮)를 상공하였는데, 그 숫자가 1년에 50령(領)이었다. 그리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사냥을 크게 하였는데, 그 이름을 진상렵(進上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목사가 그 틈에 사리(私利)를 꾀할 목적으로 사냥을 하여 간혹 한 달을 넘기기도 하였으므로, 군민(軍民)과 노약자들이 기아에 시달리며 피곤에 지친 나머지 한 차례의 사냥에 사망에 이르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8월에 한 번 사냥을 하되 그 숫자가 채워지기만 하면 곧바로 중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흉년을 맞아 기근이 들자 공이 아침저녁으로 제공하는 식사의 양을 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달에 감한 곡식이 10석(石)이 넘었는데, 이 곡식으로 제주의 기민(飢民)과 입번(入番)한 군사들을 진휼하게 하는 한편, 양 현(縣)에 명하여 기민을 진휼하도록 하였다. 공이 비병(痞病)으로 사직을 하자,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온 경내에서 성안으로 모여들어 공에게 머물러 있어 줄 것을 청한 이들이 하루에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또 수십 인이 바다를 건너가서 체찰사에게 정장(呈狀)을 하여 머물러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체부(體府)가 위에 보고하니, 백성의 소원대로 공을 머물러 있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공이 병이 매우 고질화되었다고 말하면서 파직을 청하여 돌아왔다.
계묘년(1603)에 황해 병사(黃海兵使)에 임명되었다. 본영(本營)에서는 예전부터 군인에게 목면(木綿)을 징수하였는데, 사람마다 5필씩 내게 하면서 조량목(助糧木)이라고 이름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3필을 감하여 2필만 납부하게 하고는 모두 무미(貿米)를 가지고 군향(軍餉)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체직되어 돌아갈 무렵에는 비축한 미곡이 무려 5000여 석에 이르렀다. 유영경(柳永慶)이 수상(首相)으로서 국혼(國婚)을 계기로 팔도에 뇌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자 제도(諸道)에서 대부분 바리로 실어다 주며 그 요구에 응했는데, 공이 보낸 것은 유독 보잘것없었다. 대개 공이 남에게 선물을 많이 주지 않는 것은 평생 늘 행해 온 일로서, 유영경에게만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뒤에 비국(備局)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천거할 때 공이 으뜸으로 꼽혔는데, 유영경이 공의 이름을 붓으로 지워 버렸다.
갑진년(1604) 겨울에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했으며 자헌(資憲)의 품계로 올렸다. 병오년(1606)에 북방의 번호(藩胡)가 보고하기를, 심처호(深處胡)가 삼수(三水)를 경유해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다. 대신(大臣)이 의논하여 공을 남도방어사 겸 영흥부사(南道防禦使兼永興府使)로 삼았으니, 이는 심처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영흥부는 인삼을 상공(上供)하는 일과 관련한 고질적인 폐단을 안고 있었는데, 공은 응당 상공할 액수를 헤아려서 받아들이고 폐해가 있는 것은 곧바로 없애 버렸다. 8개월이 지난 뒤에 병으로 돌아왔다. 공이 외임(外任)에서 체차되어 돌아오면 그때마다 다시 훈련대장의 직책을 맡곤 하였다.
무신년(1608) 2월에 국상(國喪)을 당하자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호위(扈衛)하였다. 6월에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에 임명되었다. 호위한 공로를 인정하여 공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논하여 개정하였다. 그리고 뒤에 다시 공을 탐람(貪濫)하다고 탄핵하여 파직하였는데, 여기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공이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재직할 당시에 보장(堡將)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후궁(後宮)의 친족이었다. 그가 죄를 지었으므로 축출해야 마땅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궁금(宮禁)과 깊이 교분을 맺고 있으니, 절도사(節度使)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서 마침내 그를 축출하였는데, 당시의 감사는 바로 정사호(鄭賜湖)였다. 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상 정공(鄭公)을 존경할 만한 인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다고 들었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쉽게 알 수 없는 점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곧장 정(鄭)의 귀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와서 그가 마침 대사헌으로 있었기 때문에 공을 탄핵한 것이었다. 공의 청근(淸謹)함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 정(鄭)이 비록 옛날에 유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탐람하다고 무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늘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면서 기탄없이 행하는 자’라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공은 국상을 당한 이래로 소식(蔬食)을 하면서 오랫동안 위장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제옹(臍癰)의 병을 얻어 기유년(1609, 광해군 1) 3월 8일에 동문(東門) 밖의 자택에서 작고하였으니,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3일 동안 철조(輟朝)와 철시(輟市)를 하였다.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부의(賻儀)를 하였으며, 관에서 장례에 관한 일을 돕게 하였다. 이해 4월 21일에 광주(廣州) 하도(下道) 동천촌(凍川村)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평생토록 뜻을 면려하고 몸을 단속하면서 다른 범인들과는 다르다고 자처하였다. 크고 작은 외직(外職)을 모두 6, 7회나 거치는 동안 모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영암과 제주 같은 곳에서는 비석을 세워서 공의 덕을 기리기도 하였다. 공은 소싯적부터 권세 있는 자들을 섬긴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잘 섬겨서 승진한 자들을 보면 비루하게 여기면서 그들과 함께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일찍이 외방의 직책을 맡고 있을 적에 후궁(後宮)이 사람을 보내 귀하지도 않은 기물을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지극히 구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인신(人臣)의 신분으로 궁금(宮禁)과 통하는 것은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집안은 항상 빈한해서 현달한 벼슬아치의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이라고 해야 단지 몇 칸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누추하기 그지없었다. 공이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어느 것이나 모두 마음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책임만 메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대부인(大夫人)을 봉양하며 효순(孝順)한 것이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친상을 당했을 적에 비록 대란(大亂)을 만난 탓으로 말을 타고서 전쟁터를 분주히 누비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삼년상의 기한 안에는 변함없이 소식(素食)을 하였다. 그 당시로 말하면 난리를 당했기 때문에 비록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제(喪制)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때였다. 이처럼 공의 지조(志操)와 환업(宦業)과 행검(行檢)은 모두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공의 형제는 3인이다. 백씨(伯氏)인 휘(諱) 엄(儼)은 일찍 죽어서 후사(後嗣)가 없고, 중씨(仲氏)인 휘 간(侃)은 나의 조고(祖考)이니 공의 아우이다. 부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딸이다. 아들은 5인이다. 장남 굉중(閎中)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수를 지냈고, 다음은 치중(致中)이고, 다음은 극중(克中)이고, 다음은 상중(尙中)이고, 다음 시중(時中)은 현감이다. 손자와 증손으로 남녀가 모두 몇 사람이다.
공이 작고할 때 나의 나이도 이미 삼십을 넘었는데, 어려서부터 공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에 공의 음성과 모습이 아직도 귀와 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 공의 사적(事蹟)을 기록하려니 비감을 금하지 못하겠는데,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이라도 과장되게 수식하여 후세를 속이려고 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위대하도다 공의 공훈이여 / 偉哉厥勳
사직이 이 때문에 안정되었도다 / 社稷以安
외물에 응할 때는 정대하였고 / 應物之正
자기를 지킬 때는 엄격하였으며 / 守己之寒
집안에서는 효성스러웠고 / 孝修於家
관청에서는 성실하였나니 / 勤著于官
이와 같은 미행 모두에 대해 / 凡此美行
사람들이 흠잡지 못했나니라 / 人莫之間
묘비에 이런 사실을 새겨서 / 刻茲墓碑
후세에 길이 보이려 하노니 / 以示無極
공의 모든 자손들이여 / 凡公子孫
이것을 보고서 본받을지어다 / 視此爲則
[주-D001] 땅의 …… 확신한다 :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시가 이롭다 해도 땅의 형세가 유리한 것보다는 못하고, 지리상으로 유리한 형세도 사람들이 화합하여 단결하는 것보다는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 북방의 …… 들어갔으므로 :
북도의 오랑캐로서 강 건너 변보(邊堡) 가까이 살며 무역을 하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을 ‘번호(藩胡)’라 하고, 백두산 북쪽에 사는 여러 오랑캐로서 아직 친부(親附)하지 않은 자들을 ‘심처호(深處胡)’라고 한다
첫댓글 임하필기 제13권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대로 말하면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서 월주(越州)의 땅을 경계로 삼았는데 이는 곧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도읍했던 곳이며 ,또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을 경략(經略)하였는데 이는 곧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시중(侍中)에게 올린 글에 보면 백제도 일찍이 중국의 제로(齊魯) 지방을 침공하여 이를 뒤흔들어 놓은 일이 있다고 한다
연암집 제6권 별집
살펴보건대, 장주(漳州)에는 신라현(新羅縣)이 있는데 당 나라 시대에 신라가 조공을 바칠 때 거쳤던 지역이었습니다. 또 “신라가 오(吳)ㆍ월(越)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泉州)와 장주 지역의 유속(遺俗)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의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직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