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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수사관 이근안, 목사 이근안
![]() ![]() 2008/11/02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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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목사
"목사님 축하드립니다. 다시 태어나셨군요. 성경 말씀대로 이제 거듭 나셨으니 부디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성직자가 되십시오."
단정히 목사 예복을 차려입은 그분을 나는 단상에서 따듯이 포옹했다.
2008년 10월 30일 11시 연지동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39명의 장로회목사 안수식에 나는 참석했다.
이근안 목사, 이분은 격동의 현대사에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세상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그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79년도 총각시절 울산에서였다.
현대중공업에 위장취업한 그는 고정 간첩을 수사하기 위한 베테랑 대공수사관이었다. "현대건설의 사우디 현장에 파견될 안전요원인데 한 두 달간 조선소 현장에 실습을 하러 왔으니 기숙사 한방을 같이 쓰면서 잘 도와주게나" 과장은 내게 그의 신분을 위장하여 소개했다.
그로부터 그는 나와 룸메이트가 되어 그 후 석 달 동안을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인간성이 풍부했다. 외모와는 달리 인정이 많고 자상했다. 그리고 기억력과 학습능력이 비상했다. 나는 그를 형님처럼 따랐다. 나는 곧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솔직히 밝혔다.
내가 그를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판단한 것은 그의 투철한 '국가관'때문이었다. 그 신념과 철학은 내게 감명을 주었다. 그 해 추운 겨울날 그는 갑자기 서울로 올라갔다. 홍성에서 출몰한 무장간첩단사건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그의 소식은 끊어졌다. 5년 후 수원에서 그를 만났다. 참으로 반가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적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후로 11년 그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자수했다. 그 후 7년 수원과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국가 안보를 보위하는 베테랑 대공수사요원에서 하루아침에 그는 언론에 의해 극악무도한 '고문기술자'로 낙인 되어 사회적 벼랑 아래로 추락했다.
세상은 그를 모두 무서워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집은 너무 가난했고 아들도 불행하게 죽었다.
나는 가끔 면회를 갔다. 내겐 그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그는 18년 전 나의 룸메이트였고 자상한 형님일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나 일 때문에 자주 오지 못하는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몇 가지 중요한 진실을 얘기했다. 정치권에 의해 순수 대공이 공안에 끌려든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늘 착찹했다. 그는 분명한 정치적 희생자였다.
나는 몇몇 정치인에게 용서와 화해를 권했다. 그 중 한 분은 이를 실천했다. 품과 그릇이 달랐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걸 보았다. 대단히 양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소 중 종교에 귀의했다. 성경 해설서도 집필했다. 그의 몰입과 집중력은 대단했다. 서예도 상당한 실력이 되어 수준에 이르렀다. 나는 기뻐서 벼루와 종이도 사서 선물했다. 교도소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 보면 일반 죄수들에게 진정한 존경을 받는 모범수가 되었다고 했다.
석방이후 그는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생계가 어려워 아내와 새벽마다 아파트의 공병과 폐지를 수거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에 찌들지 않았고 운명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전국 각지를 돌며 열심히 신앙간증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장애인과 노인들의 재활치료를 위한 무슨 자격증도 땄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목사가 된 날 그의 모습은 너무 행복하고 밝아 보였다. 부인과 딸의 얼굴엔 미소가 돌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유전 - 그러나 이제 평화로운 그의 모습에서 칠십 노년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틀에서 요지부동하는 낙인의 사회ㅡ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모두 손가락만 쳐다보는 세상 - 사람 살려야 할 정치와 언론이 오히려 사람을 잡는 구조적 모순의 사회, 이 시대 이념과 정치의 희생자 '대공수사관 이근안'은 다시 태어나 이 땅에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를 위한 '목사'가 되었다.
이제 부터 성직자로서 진정한 그의 성공을 위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는 기도한다. 주님 그를 어여삐 여기소서, 그리고 그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꼭 들어주소서... (2008. 10. 31. 블로그 '전원으로 돌아와서' / 노화욱)
고문기술자 이근안씨 목사 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70)씨가 목사가 됐다. 이씨는 30일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예장 합동개혁(총회장 정서영 목사) 목사안수식에서 안수를 받았다. 이씨는 "십자가만 바라보며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교정선교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씨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고문한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씨는 교도소 복역기간 중 3년간 통신신학으로 신학을 공부했으며, 출소 후 서울 사당동 총회신학연구원에서 공부하고 2007년 졸업했다. 작년 12월 목사고시를 통과했으며, 이번에 강도사 39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게 됐다. 이씨는 교회를 담임하지 않고 국내외 전도집회를 다니는 전도목사로 활동할 예정이다. (2008. 10. 31. 국민일보)
'고문 기술자' 이근안, 목사 됐다
교도소에서 신학 공부… '국내 선교 목사' 자격 안수 받아
'고문기술자'로 유명했던 이근안(70) 전 경감이 정식 목사가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은 이씨가 정식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고 31일 밝혔다. 이씨는 지난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목사 임직(任職) 예배에서 다른 전도사 40여명과 함께 안수를 받았다.
이씨는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한 뒤 대공 수사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그는 1985년 민청학련 의장이었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1988년 12월 수배를 받자 잠적했다가 10년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그는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학씨를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70여 일간 감금하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한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지난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씨는 여주교도소에 있을 당시 교도소 재소자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벌이는 한국교정선교회를 통해서 통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출소한 뒤에도 총회신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총회신학측에 따르면 이씨는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전도사 및 강도사 고시도 적법하게 통과했다고 한다.
총회신학 관계자는 "이씨는 완전히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며 "전도사로서 전국으로 다니며 100여회의 집회에서 간증하는 등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해서 '국내 선교 목사' 자격으로 안수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2008. 10. 31. 조선일보 / 김진명 기자)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 되다
장로회 안수 받아… "십자가만 보며 교정선교활동"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고문기술자', '관절빼기의 명수'로 알려진 이근안(70) 전 경감이 목사가 됐다.
이씨는 지난달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다른 전도사 40여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온라인 매체인 브레이크뉴스에 따르면 이씨는 임직식에서 "앞으로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다. 교정선교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임직식에는 이씨의 가족과 고등학교 동창들이 함께 했다.
이씨의 한 지인은 "우리에게는 옥중생활이 힘든다는 말을 한 마디로 하지 않았다"며 "과거는 과거고 이제 하느님을 영접해서 새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1970년 경찰에 입문해 줄곧 대공분야에서 일하며 모두 16차례의 대통령 표창 등을 받으며 특진을 거듭한 끝에 경감까지 고속 승진했다. 당시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돌 정도 였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증언으로 공개 수배돼 12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1999년 경찰에 자수했다.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돼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씨는 7년간 교도소에서 지내면서 100여권의 노트에 성경책을 자필로 옮겨 담는 등 기독교 신앙생활에 열성적이었다. 이씨의 지인은 "이씨가 교도소에 복역하는 동안 부인이 폐지를 모으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왔다"고 전했다.
이씨는 올해 초 한 강연회에서 "수감생활 중 아들이 죽는 등 가정이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목사가 된 이씨는 설교 보다는 신앙생활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2008. 11. 1. 한국일보 / 장재용 기자)
이근안‘고문기술자’에서 장로회 ‘목사’로
“십자가만 바라보는 삶”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70)씨가 지난달 30일 정식 목사가 됐다.
31일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이근안 씨는 전날 장로회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다른 전도사 40여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날 임직식에는 이씨의 가족과 고등학교 동창들이 함께 했다고 알려졌다.
이씨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다"면서 "교정 선교 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매체를 통해서는 "목사가 된다고 해서 설교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정선교회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신앙생활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살겠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 씨는 1970년 경찰에 입문해 줄곧 대공분야에서 일하며 모두 16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받는 등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며 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85년 당시 민청학련 의장이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고문하는 등 많은 인사들을 고문, 민주화 이후 공개 수배돼 12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씨는 1999년 경찰에 자수해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받았고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7년간 교도소에서 생활하면서 이 씨는 100여권의 노트에 성경책을 자필로 옮겨 담는 등 기독교 신앙생활에 열성적이었다고 알려졌다. (2008. 11. 1. 한국재경신문)
이근안 "빨갱이 잡았는데 정권이 바뀌니..."
태안지역 '제1기 아버지학교'에서 목사된 과정·심경 밝혀
지난 5월29,30일 열린 태안아버지학교에서 이근안씨는 특별강사로 초청돼 자신의 재소자시절을 얘기했다.
1980년대 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씨가 목사가 되면서 파장을 낳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자신의 고문으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참회가 없이 스스로 용서 받았다면서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마치 영화 <밀양>에 등장한 유괴살인범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
그럼에도 이근안씨는 출소한 지 이틀만에 첫 간증집회를 시작으로 약 160여 차례 교회와 기도원을 다니면서 간증을 하고 있다. 그는 목회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지금처럼 집회를 다니거나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의 교화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한다.
그는 또 지난 5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태안의 '평화로운동산'에서 열린 태안지역 '제1기 아버지학교'에 특별강사로 나서, 자신은 빨갱이만 잡았는데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 돼있었다고 말하면서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고, 자신의 가장 큰 피해자 김근태 전 장관과는 2005년 12월 31일에 김 전 장관이 교도소로 찾아와서 끌어안고 화해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그는 출소 직후에 어려웠던 가정사와 아들의 죽음, 그리고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 돼 있더라"
특히 그는 수감시절 정기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그 목사가 "당신은 울분의 주먹을 풀어라, 안 그러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말에 화가 났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 손에 성경을 쥐고 또 한 손에 울분의 주먹을 쥔 것이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의 녹취록.
"(교도소 복역 중 어느 목사님이 자신을 만나러 와서) 한 달에 한 번 오겠다고 하면서 한 시간 (성경을) 가르치고 가더니 그 뒤로 몇 번 오더니 '울분의 주먹 풀어라, 안그러면 세례 못받는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 울분의 주먹을 쥔 건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빨갱이 잡기에만 열심히 했는데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라고? 임금이 바뀌니까 충신이 역적되는게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나는 불만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용서해야겠다고 다짐한 후 교도소 내에서 통신으로 신학공부를 했고, 전도사 고시를 거쳐 출소 후 강도사 고시에 합격했다고 밝혔다.
"그래도 반성을 했습니다. 나 자신부터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그 목사님에게 신학공부 좀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죄수 신분에 신학대학을 어찌 다니려고 하냐'고 했지만 '사람은 안 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통신신학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일주일만에 목사가 다시 왔길래 나는 어느 대학에 합격됐냐고 했더니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 8학기 과정에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와 교도소 측의 허락을 받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 자신에게 고문당한 피해자인 김근태 전 장관과의 화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성경을 쓰고 공부한 이후에) 재소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성경에 대해) 질문하고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던 중에 2005년 김근태 (전) 장관이 섣달 그믐날 교도소를 찾아와서 화해했습니다. 끌어안고 화해했습니다. 이어 출소해서 두 달 있다가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출소한 지 이틀만에 간증을 부탁받고 지금까지 1년반동안 159번째 정도 하고 있습니다."
"출소 후에 처자식들 처참하게 살고 있는 모습 보고..."
또 그는 자신이 출소 후에 돌아간 가정이 엉망이 돼 버린 사실도 고백하고, 그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기 싫어서 믿음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내가 목회활동을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와보니 큰아들이 회사 연구소에 다녔는데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고, 둘째아들은 심장마비로 죽고, 막내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또 아내는 새벽부터 나가서 빌딩 화장실 청소 하고 길거리의 파지나 빈병을 모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니) 나는 남편이 아닌 짐이었습니다. 목숨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될까. 오히려 자식들에게 좌절과 비극만 줄 것 아닐까. 새롭게 살아보자고 다짐했고, 다음날부터 아내가 새벽에 나갈 때 함께 나가서 청소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아들들도 직장생활 하고 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 자리에 모인 아버지들에게 인생의 난관에 부딪힐 때 좌절하지말고 새롭게 출발하는 용기를 갖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한편 이날 열린 '태안 아버지학교'는 두란노에서 개최하는 아버지학교의 지역모임으로, 기름유출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태안 지역의 가정과 아버지들이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약 80여 명의 참가자들이 5월 29, 30일 이틀간 열렸으며 특별강사로 이근안씨를 비롯해 일명 '용팔이'로 알려진 김용남씨도 강의를 했다.
덧붙이는 글
강의 내용은 '충서아버지학교' 카페에서 '태안 희망1기 아버지학교'의 '이근안형제 간증' 편으로 10여분에 걸쳐 녹화한 것입니다. (2008. 11. 3. 오마이뉴스 / 진민용 기자)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 목사로 변신한 내막
십자가 찾는 목사님…안보 의식은 그때 그 경감?
지난 10월 30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70) 씨가 목사 임직식을 가졌다.
그는 "지금은 한국교정선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며 "교정 선교 활동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2월 한 보수단체가 주최한 외교안보포럼에 강연자로 나선 그의 발언은 남영동 대공분실 이근안 경감을 연상케 했다. 그는 "내가 직접 조사해 간첩 혐의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이 국가기관에 의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나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됐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지난 10월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지난 1984년 67일 동안 불법감금된 채 이 씨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고(故) 이장형씨 사건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재심 공판을 기다리다 지난해 췌장암으로 사망한 고(故) 이장형씨는 "이근안을 용서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직자로서 교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도덕적 양심과 실천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고(故) 이장형씨 사건 등 아직 재심 공판이 남은 사건들이 많다.
무기징역 복역 7년만에 전격사면…10월 30일 출소 2년 만에 목사 임직식
'고문기술자'에서 '인간백정'까지 별명은 섬뜩하지만 백발 성성한 노인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다"
한때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가 목사가 된 이근안씨(70)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며 "앞으로는 교정 선교 활동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이 씨는 지난 10월 30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목사 임직식을 가졌다.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그가 출소 후 2년 만에 목사가 된 것이다.
그가 목사 임직실을 하던 날은 공교롭게도 목요일이었고, 어김없이 탑골공원에서 목요집회를 벌이고 있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떠올랐다. 민가협은 1989년 고문혐의로 공개수배 된 이씨를 잡기 위해 현상금을 걸고 자체 공개수배를 진행했었다.
그 후 20여 년, 민가협은 여전히 찬 바닥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고 있고, 목사가 된 이 씨는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목회자가 된 이 씨와 그의 신앙심을 의심하거나 거론할 의도는 없다.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새 삶을 선택한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다만 과거 그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최소한의 사과 한마디 없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난센스 같았다.
칠순의 그도 한 인간일 뿐
당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는 '이근안'이란 이름이 붙은 책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만들어 놓은 자리였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들이었다. '고문기술자', '관절빼기의 달인' 심지어 '인간백정'까지, 섬뜩한 별명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 씨도 이제 칠순 넘은 노인이 됐음을 새삼 깨달았다.
당일 오전 11시 그곳에서는 40여 명이 목사 임직식을 가졌지만 백발이 성성한 이 씨가 유독 한눈에 들어왔다. 출소 당시 한쪽 다리는 절었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지 안수를 받기 위해 단상에 오르는 걸음걸이가 힘찼다.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는 그의 모습을 볼 때는 세간의 선입견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종교가 없는 기자에게는 온전히 한 인간으로 다가왔다.
지인 등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악수하며 잡은 그의 손은 세간에 알려진 '솥뚜껑'처럼 크지 않았다. 출소 후 언론의 빗발친 관심과 보도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그인지라 어렵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시종일관 목사로서의 새 삶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간증을 하러 다니느라 바쁘게 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한 그는 "한국교정선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며 "교정 선교 활동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밝혔다.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도 교회를 차리고 설교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재소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에 더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전했다.
과거사에 대해 질문하자 담담하게 "앞으로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그는 부담스러운 듯 난색을 표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출소 당시 다리 절었지만 안수받던 날 걸음걸이 힘차…“나도 피해자!”
한국교정선교회 운영위원으로 활약…"평생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다"
과거사’ 질문에 황급히 자리 피해
그러나 고교 동창들로부터 이 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동창들은 “옥중생활이 힘들었는지 우리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은 동창들과 모임을 자주 갖고 있다”며 “과거는 과거고 이제 하나님을 영접해서 새 사람이 됐다”고 전했다.
최기동(72세) 씨는 "(이근안은) 유도를 잘하는 건장한 친구였는데 지금은 당뇨 합병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이 고향인 이 씨는 6·25 때 내려와 중학교 때까지 대전에서 살았고 고교 시절부터 서울에 거주했다고 한다. 고교시절 우연히 택시강도를 만나 격투 끝에 잡아 경찰에 인계하게 된 것이 이 씨가 경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도 말했다.
최 씨는 절친한 이유도 있겠지만 "칠순이 넘은 나이다 보니 숨길 것도 없다"며 그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한번은 이 씨가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모 교회 봉사활동에 참여해 간증을 하자 수많은 노숙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 씨의 간증은 그만큼 호소력이 있고 잘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제 이 씨는 대공 경찰 시절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안보의식은 아직 경감 이근안(?)
이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 씨에게 고문을 당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 씨와 김 전 장관이 대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씨는 김 전 장관에게 사과했지만 김 전 장관은 "용서할 마음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이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장관은 "사죄하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근안을 보며 차마 용서하지는 못했다"며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혹시 내가 또 둘리는 것은 아닐까? 또 둘리면 과거에 당한 것의 곱배기로 당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고 솔직한 심경을 고백했었다.
이는 출소 후 이 씨의 말과 행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난 2월 14일 국제외교안보포럼 조찬강연회에 강연자로 나선 이 씨는 20여 년 전 언론이 자신에 대해 보도한 내용들은 억측과 왜곡, 과장이었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특히 지난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분실에서 경찰조사 중 고문치사로 숨진 박종철 군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당시 그는 경기도 대공 분실장으로 경기도 내 경찰서에 근무중이었다고 밝혔다. 또 전기고문을 한 사실은 있지만 1.5볼트 건전지를 사용했고 눈을 가리는 방법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해 실토케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관절빼기의 명수'라는 별명에 대해서도 학창시절 유도와 합기도 등을 해 관절꺾기는 알아도 관절빼기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말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그의 '대공방첩'에 대한 신념은 우려와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강연 중에 그는 “친북 반미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진보라는 좌파들과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넣어야 한다’고 하는 대통령, 친북반미 운동경력이 유일한 훈장인 386 세대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직접 조사해 간첩혐의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이 국가기관에 의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고까지 말하는 등 사죄와 반성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전두환 정권 시절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으로 꼽히는 고(故) 이장형씨 사건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고(故) 이장형씨는 재심 공판을 기다리다 지난 2006년 12월27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이근안을 용서하고 싶다”였다고 한다.
보수단체 안보포럼 참석해 강연…안보의식은 아직도 대공분실 이 경감?
"고 박종철 군과는 일면식도 없다" 일축…'관절빼기 고문'은 할 줄 몰라
고(故) 이장형씨는 지난 1984년 간첩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잡혀가 67일동안 불법감금된 채 이근안 씨에게 전기고문과 목욕탕에 얼굴 처박기, 발가벗긴 채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지난 1986년 국가보안법위반 등의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15년 만에 사면됐었다.
아직 진실을 속단하거나 이근안 씨를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씨의 범죄 사실 인정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함주명 씨 등의 사례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함 씨는 지난 1983년 이 씨에 의해 45일 동안 불법구금된 채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받고 "고정간첩으로 암약해왔다"는 허위자백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05년 7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이씨의 발언은 우려를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그는 목회자다.
황지우 시인은 “사람들이 지옥을 생각해낸 것은 고문에 대한 체험에서였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 1980년 계엄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연루 무기징역 선고 받았던 강용주 씨는 "고문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사람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파괴하고 다시는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도록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을 근원에서부터 깨뜨려 버리는 것"이라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상상한다면 바로 그건 고문의 고통일 것”이라고 말했다. 목사가 된 이 씨가 이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
정치활동 안하는 조건으로 목사임직
신학대학원 졸업를 앞둔 이 씨에게 대학 총장은 목사 임직을 시켜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씨의 대학원 지도교수에 따르면 "이근안 씨의 목사 임직을 두고 신학교 내부적으로 토론을 벌였다"며 "결과는 목사 임직 허가였지만 정치활동을 안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지도교수는 "이 씨 스스로도 교정선교회 활동에만 충실할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종교가 피아를 구분하고 이념에 휘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교리를 실천하는 교인과 성직자의 잘못일 것이다. 더불어 성직자라면 도덕적 양심과 실천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고(故) 이장형 씨 조작간첩 사건처럼 아직 재심 공판이 남은 사건들이 많다. 지난 2006년 이 씨가 출소하자 시민단체들은 당시 자행됐던 고문수사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도 한때 지인들에게 "이제 마음의 짐을 벗고 싶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목사 임직을 한 이때 성직자로서 양심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2008. 11. 7. 뉴스앤조이. 브레이크뉴스 / 설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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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귀걸이/코걸이'.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