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불교 탐방기-6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복드 칸 겔룩빠 중심 법통
글 | 이치란 박사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 서열은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바 후툭투(복드 칸)이다. 달라이 라마는 대승불교에서 자비보살인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hvara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며,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그리고 제3 서열인 복드 칸은 몽골과 관련이 있다. 먼저 차례로 알아보자. 이런 사전 지식이 없으면 달라이 라마 제도와 현대 티베트 불교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 1959년 중국의 침략으로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달라이 라마의 주요 집무처였던 포탈라 궁. 현재는 박물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1645년에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주요 현자들이 지목한 라싸와 주요 사원들 사이에 있는 명당에 포탈라 궁을 지었다. 포탈라 궁은 637년에 쏭짼감뽀가 지은 거대한 요새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
제3대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쵸(Sonam Gyatso,1543〜1588)로서, 그에게 처음으로 ‘달라이 라마’란 칭호가 부여된다. 이 칭호는 1578년 몽골국의 통치자 알탄 칸(Altan Khan)이 소남 갸쵸에게 부여했다. 알탄 칸이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의 환생자라는 것을 소남 갸쵸가 선포해준 데 대하여 보답으로 바친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남 갸쵸는 비로소 달라이 라마가 되고, 제1대와 제2대 달라이 라마는 사후에 추존됐다. ‘달라이 라마’ 칭호는 몽골 통치자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남 갸쵸는 2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 선택된 다음, 라싸에 있는 유명한 데풍 사원(Drepung Monastery)에서 판첸 소남 닥파(Panchen Sonam Dragpa1478〜1554)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판첸 소남 닥파는 겔룩파 전통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 15대 간덴 띠파(수장)였다. 겔룩빠소속으로는 3개의 사원 대학이 있었는데, 드레펑 사원은 그 중 하나였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된 판첸 소남 닥파는 겔룩빠를 창시한 쫑카빠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1539년 ‘툴쿠’라고 하는 화신(化身)으로 즉위한다. 판첸 소남 닥파는 2대와 3대의 스승이었고, 계속해서 판첸라마 환생의 법맥을 이어가게 된다.
▲ 몽골제국이 멸망한 후의 15세기 북원(北元)의 세력판도
이제 간단히 정리하면 ‘달라이 라마’란 칭호는 몽골 제국의 후예인 알탄 칸이 부여한 칭호이며, 판첸라마는 2.3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환생한 서열 2위의 지위으로 간주 된다. 지난 90년대 인도 다람살라에서 링 린포체라고 하는 동자승이 한국에 온 것을 알 것이다.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에서 일종의 스승의 개념인데, 상사(上師) 또는 화상(和尙)이란 의미로 큰 스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때로는 재가(在家) 린포체도 출현하기도 한다. 링 린포체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라마가 환생한 분이다. 티베트 불교의 서열 2위인 판첸라마의 환생 맥은 현재 중국본토에서 이어지고 있다.
제3대 달라이 라마가 명실상부하게 탄생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몽골 국의 알탄 칸과의 관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이후, 소위 황금가지 출신인 왕족이 아니면 몽골의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이후 몇 개의 칸 국으로 나누어지고, 칭기즈칸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이었던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되면서 중국과 몽골지역에 대원제국(원 世祖)을 세웠다. 몽골제국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존속하다가, 한족(漢族) 출신으로 한 때 승려였던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워서 몽골의 잔존세력을 몽골고원 사막 북쪽으로 밀어냈다.
북원 시대(16세기) 할하 몽골 중심부인 옛 몰골제국 수도 카라코룸에 압타이 사인 칸이 세운 에르덴 죠 사원
알탄 칸이 등장할 때 까지 몽골제국은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가 알탄 칸에 의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다시 몽골제국인 원을 세웠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황금가지 직계인 쿠빌라이 후손이었지만 몽골 국민들은 확실하게 믿어주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항상 북원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장군으로서 여러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다스려서 북원을 세워 권태중래의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가지에 대한 불신으로 민심을 얻는데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칭기즈칸의 황금가지라고 증명하는 어떤 극적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는 정통성 입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으로부터의 황금가지 정통성을 증명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알탄 칸은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쫑카빠가 창종한 겔룩빠를 선택하고, 당시 겔룩빠의 수장인 소남 갸쵸를 몽골 고원에 초청하여 국민들에게 법문을 내려달라고 했다. 소남 갸쵸는 알탄 칸이 쿠빌라이 칸의 환생임을 선포했고, 알탄 칸은 소남 갸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전임의 두 분에게도 제1대와 제2대의 달라이 라마 칭호를 추존했다. 알탄 칸의 통치는 중국 북부 지역을 비롯해서 티베트까지도 영향력이 미쳤던 것이다.
▲ 에르덴 죠 사원을 건립한 압타이 칸과 왕비
이에 앞서서 알탄 칸은 1569년부터 소남 갸쵸를 초청한 바 있었으나, 소남 갸쵸는 응하지 않다가 티베트 밖의 나라에서 통치자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데에 측근들과 인식을 같이하고 또 알탄 칸으로부터 티베트 불교의 포교를 허용한다는 조건 제시에 1571년 사절단을 몽골에 보내서 탐색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 몽골의 현실은 너무나 북방 민족으로서의 야수성에다가 동물살생을 밥 먹듯이 하는 등, 생명경시와 고위층의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사절단은 이런 풍습을 중단하고 동물 살생을 자제하는 등의 조건을 내세웠지만, 알탄 칸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소남 갸쵸 겔룩빠 수장이 직접 와야 한다는 강한 요청에 의해서, 긴 여행을 별로 내키지 않았던 소남 갸쵸를 측근들이 설득하여 1577년 몽골을 방문하여 권위를 맞교환한 것이다.
▲ 당나라 문성공주가 토번의 쏭짼감뽀 왕에게 시집갈 때의 길에 세워진 청해성 시닝 근교 당번고도 표지석
이후 알탄 칸은 황금가지로서의 신분을 확실하게 인정받고 통치하다가 1582년에 서거 했다. 소남 갸쵸는 제3대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여 신정에 가까운 권위가 부여됐다. 1585년에 다시 몽골에 와서 몽골 국의 왕자들과 부족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제3대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로부터도 중국에 남아있는 몽골 족을 위하여 초청을 받는 등 주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3대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 방문을 앞두고 1588년 45세의 나이로 몽골에서 티베트로 돌아가는 길에 입적하게 된다. 티베트는 몽골과 지리적 교통로가 뚫려있었다.
당나라 때도, 당번고도(唐藩古道)라고 해서, 지금의 사천성 지역이 아닌 청해성의 시닝(西寧)을 지나서 청장고원(靑藏高原)을 넘어 토번(吐藩 티베트)의 서울 라싸로 갔던 것이다. 당나라 때, 문성공주가 쏭짼감뽀 왕에게 시집갈 때도 이 당번고도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 3대의 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만 제4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의 직계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 겔룩빠의 제5대 달라이 라마인 아왕 롭쌍 갸초(1617년~1682년) 초상화
제4대 달라이 라마 욘텐 갸쵸(Yonten Gyatso 1589〜1617)는 몽골에서 태어났으며, 제3대 달라이 라마의 측근들에 의해서 제 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이런 사실을 티베트에 통보하고 욘텐 갸쵸를 옆에서 보호하게 된다. 욘텐 갸쵸는 알탄 칸의 증손자뻘이 된다. 욘텐 갸쵸는 10세 때인 1599년 티베트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고, 티베트와 몽골은 더욱 가까워지면서 티베트 불교는 몽골 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제 4대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해서 겔룩빠의 수장에 의해서 제4대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고, 데풍 사원 대학에서 제4대 판첸 라마의 제자가 되어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면서 1614년 구족계(비구계)를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데풍 사원의 주지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티베트인들은 그가 몽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616년 동굴사원에서 특별 수행정진을 하다가 1617년 27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 가장 막강했던 제5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게 된다.
▲ 데풍 사원은 간덴 사원, 세라 사원과 함께 티베트 불교 겔룩빠의 3대 사 원 가운데 하나이다. 라싸의 서쪽 약 5km 밖의 산 아래에 위치한다. 이 사원은 제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남 갸초’가 1578년에 몽골의 수장 알탄 칸에게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고 나서, 17세기에 제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수장으로서 포탈라 궁에 주거지를 옮길 때까지 달라이 라마의 거주 사원이었다. 그 후도 역대 달라이 라마는 데풍 사원에서 수행을 쌓았다. 1959 년 티베트 봉기 이전에는 이 사원에는 15,000명의 수행 승려가 있었다
제5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달라이 라마는 명실상부한 신정의 지위에 오른다. 아왕 롭쌍 갸쵸(Lobsang Gyatso, 1617〜1682)인 제5대 달라이 라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내란에 휩싸인 중앙 티베트를 통일시키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독립국으로서의 티베트 주권을 확립하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유럽의 탐험가들도 만나 주어 견문을 넓힌 분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대(大) 제 5대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붙는다. 제5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와 신정의 왕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40년간 종교와 행정수반으로서 통치했다.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적 식견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티베트의 내분을 종식시켰다.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아와 중국과 그 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유럽의 여행자들을 알현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아왕 롭쌍 갸초는 또한 청나라의 순치제하고도 만났다.
제1대 달라이 라마는 겐둔 둡(Gendun Drup 1391〜1474)이며 그는 사후에 제1대 달라이 라마로 추존(追尊)된 분이다. 이 분은 목동 출신이었는데 지금 서장(西藏) 자치구 시가체시에서 네팔 가는 방향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나탕 사원에서 라마가 되었고, 후에 주지가 된 분이다. 나탕사원은 위짱 지역에서 네 번째 큰 사원이다. 제2대 달라이 라마는 겐둔 갸쵸 팔쌍(Gendun Gyatso Palzangpo 1475〜1542)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그가 제2대 달라이 라마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는 네 살 때 1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공포되었다. 1대나 2대의 전기(傳記)를 소개하려면 내용이 상당히 길다.
티베트 불교는 서하와 원나라를 거치면서 그리고 북원 시대에 몽골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오늘날 몽골불교가 티베트 불교의 전통으로 확립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0세기에 이르면 티베트 불교에 대한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몇 개의 종파가 각축을 벌이게 되었고, 13세기에는 몽골제국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개혁불교가 나타나게 되고, 그 주인공은 쫑카빠(1357~1419)였는데, 그는 동 티베트의 암도 지역인 지금의 청해성 시닝 시 부근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큰 스님이 되고 나서는 현세의 이익을 비는 주술(呪術)을 배척한 계율 준수의 종파를 창시했는데,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동남쪽에 있는 간댄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 개혁불교운동을 전했는데, 이 종파를 겔룩빠(Gelugpa=黃帽派)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 파의 종지는 티베트와 동 티베트 중국 몽골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계율을 중시한 겔룩빠는 대처(帶妻)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윤회(輪廻)에 의한 전생설(轉生說)로 후계자를 얻었다. 뒤에 겔룩빠는 라싸의 포탈라사(寺)와 시가체의 타시룬포사(寺)로 분화, 쫑카빠의 두 명의 제자가 각각 라마의 칭호를 가지고 이들 사찰들을 근거로 하여 법맥(法脈)을 유지하였고 이런 전통은 몽골과 중국 청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방문했던 승덕(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황제의 피서지) 피서산장의 수미복수지묘 티베트 사원
몇 년 전 내몽골 기행에서 필자의 관심은 동북 삼성과 내몽골의 불교문화였는데, 다니다 보니 여러 가지 주제가 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상고사인 고조선. 부여. 숙신.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이고, 우리 한민족과 관련이 있는 역사유적과 강역을 지나간다는 설렘이었다. 여기에다가 한 세기 전의 청나라와 만주족 등이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주제는 잠시 뒤로 하고 장전불교에 국한해서 현장을 답사한다는 원칙과 몽곡족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조 중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주목 하게 되었다.
특히 황교문답(黃敎問答=라마교에 대한 문답).반선시말(班禪始末=반선(판첸)의 내력).찰십륜포(札什倫布=반선을 만나다)를 정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