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은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105mm 견인포 부대를 예하 보병여단 (과거 연대)으로 내리며 트럭형 자주포로 만들어 화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155mm자주포 포병부대를 전방의 철책사단의 포병에도 배치했다.
문제는 최근까지 보병3사단(백골부대)에 있던 105mm포병대대가 (71포병대대) 장비를 교체하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고 아예 해체 되면서 부대의 명칭까지 사라졌고 군단소속의 155mm자주포 대대가 그 자리에 배치되며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없어진 71 포병대대는 동란시기 창설 역사가 오래되고 전공도 있었다.
1973년 3월7일 휴전선 표지판 보수작업시 북한군이 국군에게 총격을 가해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단장 박정인 준장의 지시로 포격을 가해 북한군 진지를 박살 내 국군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전 7사단 지역에서도 북한군의 도발에 포격을 한 사건도 있었다.(정봉욱 7사단장)
북한은 그 이후 3사단을 가장 무서워 했고 90년대 초와 ( 김승겸대위의 전공: 현재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90년대 중후반에도 우리군 GP에 사격을 했다가 대응사격으로 응징을 당했고 피해를 본 북한군은 백골부대를 두려워 한다.
문제는 70년대 초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실미도 부대도 해체하면서 무장탈영을 단행 문제를 일으키자(8.23난동사건) 인천을 책임졌던 33사단장 박정인 준장을 해임했던 적이 있다.
실미도 사건의 경우 비밀리에 만들어진 특수부대가 일으킨 사건임에도 박정인 장군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임이 된다.
얼마 후 징군은 휴전선을 방어하는 3사단장에 발령을 받아 임명되어 책임지역 장병들을 독려하고 위축 되었던 백골 부대의 정체성을 정립하며 부대는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북한군의 도발에 포병사격을 가해 응징했다는 이유로 바로 해임이 된다.
젊은 시절 북한정권을 피해 월남 육사6기로 입교 6.25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후방 각지에서 임무에 충실했던 장군은 그렇게 군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포병사격을 가했던 포병대대는 육군의 전력강화로 해체가 되는데 승리한 포병부대의 전통과 역사보다는 신형장비로 편제된 포병부대에게 우선권을 준 것 같다.
부대의 사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걸 생각했다면 그리고 승전의 역사를 생각했다면 부대의 명칭을 남겼으면 어떠했을 까? 싶다.
현재 용인에 있는 지상작전 사령부는 3군 사령부를 기반으로 하지만 원주의 1군 사령부의 마크를 사용한다.
유형의 장비와 시설도 중요하지만 무형의 자부심과 역사 또한 군에겐 거다란 핵심전력이다.
과거 박정희 정부 땐 화해 무드에 벌어진 충돌이라는 이유로 박정인 장군을 해임했다.
그러나 당시엔 언론도 군당국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부대 구조조정에 따른 변화는 군병력 감소와 함께 화력체계의 변화에 따른 부대의 해체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승리한 부대의 명칭과 역사는 남기고 살려야 했다.
군내부의 원칙이 있었겠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정권차원의 문제라고 보는 이들이 많고 심지어는 북한의 눈치를 본다며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좌파정권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언론은 사실 확인이나 이유를 설명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갈등요인을 만든다.
부대의 구조조정에 따른 부대의 역사와 전통을 이름으로 남기고 이어 나갔으면 어떠했을까? 조금더 신중했으면 어떠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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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의 해체와 역사성 그리고 박정인 장군
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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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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