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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는 달☜
생명의 양식(진리의복음)을 등한히하면, 사탄에게 영생(永生)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행28:1-31절) 멜리데의 기적과 로마 전도
본문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어떻게 로마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래서 사도행전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큰 부흥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는 바울과 그의 선교 팀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이 증거 된 것과, 또 사도 바울이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끝부분을 보면서 두어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죄수(罪囚)의 신분으로 사용하셨을까?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갑자기 끝나버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끝 부분을 보면, 어떤 글을 끝내는 형식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라든지, 아니면 또 다른 당부 사항 일 수 있을 텐데,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의 하숙집에서 2년 동안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갑자기 끝을 맺어버립니다.
이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기록자 의사(醫師)누가가 여기서 갑자기 체포되거나, 아니면 죽는 바람에 글을 마치지 못했다는 추측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후에 다른 책을 쓰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이 부문에서 끝나게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도행전이 여기서 끝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쭉 우리들의 사도행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사도행전이 기록된 이후, 지금도 성령의 역사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기적과 능력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후에도 우리 각자가 기록자가 되어서 자신의 사도행전을 기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음 생활하면서 당한 핍박과 반대,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돌아와서 세례를 받는 일들을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에서 마친 사도행전이 세계는 물론 오늘날 우리나라 4/3이 불신자로써 여러 가지 사정으로 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는 팬들을 통하여 생명의 복음의 씨가 계속 심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유대인들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로마 황제의 재판을 청구함으로써 로마로 압송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죄수(罪囚)의 몸으로 압송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마 유대인 기독교인들과의 관계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롬15:20절)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쓰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쪽의 사도들과 복음을 전하면서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오늘날 교인 쟁탈전)
그런데 애매한 곳이 로마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원래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돌아와서 교회를 세운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는 사도 바울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는 바람에 로마에 유대인들이 모두 다 떠나버리고, 이방인 신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경적인 지식(智識)이나, 복음(福音)에 대한 믿음에서 너무나 취약(脆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도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입장에서는 신앙적으로 보면, 자신이 당연히 로마에 가서 이방인 신자들을 돕는 것이 옳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유대인들이 추방된 틈을 타 로마에 들어가서 자기 진지(陣地)를 구축했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로마서 끝 부분 15:22절에서 자기가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로마에 가는 것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공격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다음 빌립보서를 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 시위대 감옥(監獄)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바울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이 기회를 잡아서 로마를 완전히 자신의 영역(領域)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바울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다툼으로 하나 기쁨으로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증거 되면 자신은 만족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아무리 그리스도인이요, 복음 전도자라고 하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약(弱)한 본성(本姓)으로 인해‘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주님이 이 일을 바울에게만 맡겨 두셨다면, 그는 내내 로마에 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고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체포(逮捕)되어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로마로 끌려감으로 인해, 결국 바울은 강제로라도 로마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를 떠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서야 이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아서 보스포르스 해협을 지나서 빌립보로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로마에 오게 되는 과정도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도 토공의 막가파를 통하여 전도 양육한 소중한 생명들과 재산 모두를 강탈(强奪)당했을 때, 낙심하고 절망했지만, 롬12:17-21절)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재기(再起)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황소 같은 고집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없으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Ⅰ.멜리데의 기적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면서 로마 교인들의 정식 초청을 받아 최고로 좋은 유람선을 타고, 음악을 감상하고, 그것도 특실(特室)에서 편안히 잠을 자면서 로마에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바울이 로마에 오면서 남는 기억은 바다에서 보는 멋진 노을과 또 식사 때마다 나오는 최고급 요리와 선상의 음악 연주회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엄청난 광풍(狂風)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결국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함으로 인해, 배에 함께 탔던 276명 중,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전원 다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의 행복(幸福)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만 행복(幸福)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위기(危機)를 피하기 위해서 자기만 살려 고 도망을 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축복(祝福)은 배(船)가 침몰하는 줄 알면서도 끝까지 남아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구조(救助)하고, 최후에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죄수(罪囚)가 아닌, 자유인(自由人)의 몸으로 유람(遊覽)하듯 로마에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마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苦難)가운데 있을 때, 더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위기(危機)가운데 비참하게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危機)가 닥쳤을 때, 그 위기(危機)에 처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生命)을 우리 믿는 자의 손에 맡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죽지 않도록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은 모두 바울의 믿음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대한 사탄(詐誕)의 공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항상 긴장(緊張)하게 만듭니다.
28:1-3절)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 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보름동안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광풍(狂風)에 밀려서 어디론가 이르렀는데, 그곳은 그들의 목적지인 로마 밑에 있는 시실리 섬 바로 아래에 있는 멀리데 라는 섬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거리를 광풍(狂風)에 떠밀리면서도 배가 뒤집어지거나 암초(暗礁)나 모래톱에 걸리지 않고, 모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기적이었습니다.
극심한 고생과 고통은 겪었지만, 결국 그들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경험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때로는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죽으라고 헤맨 것 같은데, 나중에 뒤돌아보니까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오게 되었고, 시간적으로도 별로 손해 본 것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때때로 안개 속에 헤매는 것 같은 막연하고, 막막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걸음을 정확하게 인도하십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묵상(默想)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의 일행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때. 그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로써 결국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276명 전원이 다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육지에 올라왔다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은 무인도(無人島)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그곳 토인(흙인)들이 이들에게 어떠한 태도들 보일지가 변수(變數)였던 것입니다.
또한 겨울 바다에 빠졌던 276명의 몸을 말리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원주민(原住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직접 나무를 날라다가 불을 피워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충실한 죄수(罪囚)의 신분으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할 수 있도록 손수 나뭇가지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불을 피웠습니다.
이때 사탄(詐誕)은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정말 아차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져 왔던 나뭇가지들 사이에 독사(毒蛇)가 한 마리 숨어 있었는데, 바울이 나뭇가지를 태울 때, 뜨거우니까 독사(毒蛇)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손에서 떨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영적(靈的) 전쟁(戰爭)이 끝난 줄 알았는데, 사탄(詐誕)은 독사(毒蛇)를 통하여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끝까지 사탄(詐誕)이 틈타지 못하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사탄(詐誕)은 언제든지 바울을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즉 사탄(詐誕)은 우리 주위에 많은 저격(狙擊)병들을 감추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완전히 사탄(詐誕)의 시험에서 피할 수는 없지만, 철저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공격 가능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에게 독사(毒蛇)가 덤벼들었던 것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지쳐서 나몰라라 하고 누워버리니까 사도 바울이 부모의 심정으로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하다가 독사(毒蛇)에게 물렸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큰 불상사(不祥事)는 없었지만, 자칫 잘못했더라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모두 허사(虛事)가 될 뻔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독사(毒蛇)에게 물린 것은 토인(흙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토인들은 바울이 독사(毒蛇)에게 물린 것을 보고, 금세 미신적(迷信的)인 생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4절)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토인들은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전말(顚末)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인들은 이 사람들을 신(神)이 도운 사람들이라 해서, 호의적(好意的)인 대접을 해 주었는데, 이제 그 중, 한 사람은 독사(毒蛇)에게 물려서 죽게 되었으니, 신(神)이 그(바울)를 가려내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사람이었지만, 졸지에 살인자(殺人者)로 둔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종들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즉 바울도‘네가 옛날에 스데반을 죽게 했는데. 이제 그 벌을 받는구나.’라고 미신적(迷信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갈 때는 어떤 사탄(詐誕)의 독(毒)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태연하게 손에 달린 뱀을 흔들어 불에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몸이 붓거나, 상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이 독사(毒蛇)의 독(毒)마저도 주님의 종의 몸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치열한 영적(靈的) 전쟁(戰爭)을 하는데, 독사(毒蛇)의 독(毒)은 우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독사(毒蛇)의 독(毒)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독(毒)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독(毒)을 쏘아대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고, 입 안에 들어가면, 온 몸이 붓게 됩니다.
그것이 일종의 사탄의 저주입니다.
발람이 모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咀呪)하려고 했던 것이 곧 이런 영적(靈的)인 독(毒)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咀呪)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잘 아는 사람이 갑자기 분노(忿怒)에 찬. 독(毒)이 들은 불화살을 쏠 때, 상하지 않도록 늘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합니다.(엡6:17절 참조)
잘못하면 그런 독(毒)때문에 한 평생 망치는 수도 있고, 그런 독(毒)이 빠져나가 회복되는데, 몇 달씩 걸리기도 합니다.
6절)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神)이라 하더라.”
토인들이나, 사도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지만, 전혀 해를 입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신적(神的)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를 신(神)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지만, 바울에게 성령(聖靈)의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데, 큰 밑천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같이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나면, 한 순간에 모두 친구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음에서 건짐 받은 생명의 동창생입니다.
게다가 독사(毒蛇)가 바울을 물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능력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결같은 겸손함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또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독사(毒蛇)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 소문이 퍼지자 섬의 최고 우두머리인 보블리오 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 동안 대접했습니다.
그러니까 배에서 표류했던 사람들은 바울로 인해 졸지에 섬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바울과 기독교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友好的)인 감정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보블리오 라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열병(熱病)과 이질(痢疾)에 걸려서 누워 있는데,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하니, 그 노인(老人)의 병(病)이 나아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섬에 있는 다른 많은 병자(病者)들이 다 바울에게 와서 기도를 받고,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그 사람들로부터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배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접을 그들도 다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로 데려가면서 그로 하여금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福音)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奇蹟)과 능력(能力)을 체험하게 되고, 또 많은 영혼(靈魂)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Ⅱ.성도들의 환영
사도 바울 일행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후,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 배의 이름은‘디오스구로’였습니다.
그리고 배가 시칠리의 수도인 수라구사에 정박했다가 드디어 이달리아 본토인 레기온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배로 보디올에 도착했는데, 보디올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곡식(穀食)이 하역(荷役)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와서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로마 기독교인들을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만나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13-15절)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튼 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에 오는 것을 주저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과연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먼저 조심스럽게 로마서를 적어서 여 집사인 뵈뵈의 손으로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가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아직 로마에 도착도 하기 전, 로마서가 이미 먼저 이곳에 보내어져서, 많은 크리스천들의 신앙을 붙들어 주었고, 이곳 크리스천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로마서의 저자가 죄수(罪囚)의 신분으로 보디올 항구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몰려와서 열렬하게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고, 자신은 비록 죄수(罪囚)의 몸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이렇게 로마에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예루살렘에서 부흥은, 그 곳에서 잡히고, 감금(監禁)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로마에서는 충분히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밭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는 전 세계의 권력(權力)이 집중되어 있고, 모든 향락(享樂)과 사치(奢侈)와 방탕(放蕩)함이 집중되어 있는 사탄의 도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사도 바울을 로마에 보내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도시(都寺)는 사탄(詐誕)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곳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을 빼내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탄(詐誕)의 도시 안으로 들어가 죄인(罪人)들을 빼앗아서 복음의 역사를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복잡하고 소란한 도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Ⅲ.로마에서의 복음 전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역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로마에 오게 된 배경과 복음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17-20절)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협조하느냐? 반대하느냐? 에 따라 바울이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야반도주해야 할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유대인들 중에서 높은 자들을 초청해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대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와서 재판(裁判)을 받는 이유가 무슨 죽일 죄목(罪目)이 있어서도 아니요, 자기 민족을 재판(裁判)해서 불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소망(所望)에 대한 견해 차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과 유대인들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소망(所望)이 이스라엘의 정치적(政治的)인 독립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부활이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설명을 듣고, 유대 지도자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어떤 편지나 무슨 말을 들은 것은 없지만 좌우간 예수교는 어디서든지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데,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로마 방문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가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신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자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도 있어서, 의견이 서로 분분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사야말씀을 생각하면서 사6:9절)...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탄식(歎息)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먼저 복음을 가지고 이들을 설명한 것은 유익(有益)이 있었습니다. 즉 유대인 자신들은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얻은 유익(有益)이었습니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적극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바울은 마음 놓고 로마의 자기 셋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대단한 활동의 자유를 준 것입니다.
28-3l절)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이 사는 셋집을 중심으로 만 2년을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로마에 정착해서, 이제는 로마에 붙들려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던 사람이 한 곳에만 붙들려서 있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쇠사슬로 매어놓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로마 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아주 강한 교회로 세워집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여러 곳에 복음을 들고 다니면서 보따리 장사같이 복음을 전했다면, 이제 로마에서는 한 곳에 정착해서 안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나이가 들면, 체력적으로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해서 심령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년이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시위대 감옥(監獄)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증거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감옥(監獄)안에서 그 유명한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저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저도 말년에 토공으로 하여금 성도들과 재산을 모두 찬탈당하고 14년간 셋집에서 성경 66권을 강해하여 이 보물(寶物)을 사랑하는 팬들의 카페를 통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은 갑자기 끝나게 됩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갔던 복음은 이제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사도행전을 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심령 부흥이 일어나야 하고, 모든 핍박들을 믿음으로 이겨야 하고, 사탄(詐誕)의 종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말씀의 무기(武器)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詐誕)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육신의 남은 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무조건 열심만 내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 사탄(詐誕)의 세력에 매인 자를 풀어서 하나님께 데려온다는 것은 고도(高度)의 어려운 군사 작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로마에 일어났던 기적과 심령 부흥이 오늘날 우리들을 통해서 이 나라와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가 506장 *땅 끝까지 복음을*
▣알림
☞ 교갱원 설립할 創立member(마28:18-20/롬8:28)
37개 셀(cell)공동체는 열방의 죽어가는 소중한 생명을 멸망에서 구령할 사명있습니다.
20년 씨뿌리고. 잃은영혼찾고. 성례전과 수련회하기에 적합한 동탄 황금어장(漁場)에 교갱원을 설립할 創立member를 찾습니다. ※카톡회원들도 적극 동참합시다. 교갱원 주춧돌 동판에 創立member 이름을 새겨 후손들에게 영구적(永久的) 기념이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創立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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