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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자리에 있더라도 문화적 배경에 따라 참석자들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흔히 동양인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남의 주장을 경청하는 성향이 있다고 인식된다.
국제 학술대회를 가면 여러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보면 중동 사람들은 제 목소리를 내고 유럽 사람은 상대를 설득하려고 들고 동아시아 사람들은 꼭 나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사람 중에도 중국 사람은 목소리를 꽤 높이고 한국 사람은 조용히 경청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식 석상에 치열한 토론을 벌여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물밑 협상을 통해서 사태를 조용하게 마무리를 짓는 것을 좋아한다.
리처드 니스벳은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서양은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동양은 감성적이고 종합적이라고 거칠게 일반화한 적이 있다. 이런 틀을 빌린다면 서양 사람은 자기주장을 꽤 끈질기게 펼치고 동양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서양 사람은 자기-주장적이고(self-assertive), 동양 사람은 자신을 지우는(self-effaceable) 특징을 갖는다고 거칠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이 있다고 해서 모든 동양 사람 또는 모든 한국 사람이 제 목소리를 죽인다는 식으로 일반화시킬 수도 없다. 이것은 통계적 수렴성을 보여주는 문화적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짧은 시간이 아니라 오랜 전통 문화에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성향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내가 이러하므로 다른 사람도 이러하리라!”라고 지레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문화적 특성을 안다면 “사람이 왜 저렇지?”라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뜻대로 잘 드러낼 수 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멸망 위기
전국시대 말에 이르면 진(秦)나라는 경쟁하던 여섯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다. 이를 대표하는 전쟁이 바로 진나라와 조(趙)나라가 BC 262~260에 벌였던 장평(長平) 전쟁이다. 발단은 진나라가 자신과 이웃해 있는 한(韓)나라의 중심부를 공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공격으로 한나라는 영토가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특히 북쪽 17개 현의 상당(上黨) 지역은 한나라 도성과 분리되면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더 이상 한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므로 진나라에 복속(服屬)되든지 아니면 이웃의 조나라에 투항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나라와의 장평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기
상당 태수 풍정(馮亭)은 비상 회의 끝에 조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조나라에 의사를 타진했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재위 265~245 BC)은 재상인 평원군(平原君)과 평양군(平陽君)에게 사태 해결을 문의했다. 평양군은 상당을 인수하면 진나라의 공격을 앞당기게 된다고 보아 거절을 주장했고, 평원군은 굴러들어온 땅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인수를 주장했다. 효성왕은 평원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진나라로서는 손 안에 들어온 땅을 조나라에게 빼앗긴 셈이었다. 진나라는 평양군의 예측대로 조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와 조나라는 장평에서 서로 맞붙게 되었다. 전쟁 초기 조나라 염파(廉頗) 장군은 지구전을 펼치며 진나라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전쟁을 하므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나라는 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스파이를 활용하여 심리전을 펼쳤다. 염파는 진나라와 내통해서 수비에만 치중하고 있고 진나라는 실제로 조나라의 조괄(趙括) 장군을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효성왕은 답답한 전황을 일거에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령관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했다. 이에 맞서 진나라는 비밀리에 사령관을 왕흘(王齕)에서 백기(白起)로 교체했다. 신예 조괄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서 부임하자마자 적극적인 응전을 펼쳤다. 조괄이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며 성채를 나오자 백기는 패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한 뒤 조나라의 퇴로를 차단해버렸다. 이로써 조나라 군사는 본국과 차단되고 진나라에 의해서 포위되었다.
조괄은 전략의 실패를 깨닫고 그 자리에 보루를 쌓은 후 본국의 구원병을 기다리기도 했다. 백기는 승기를 잡기는 했지만 적은 병력으로 조나라의 많은 병사를 오래 포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나라는 급히 현지에서 장병을 모집한 뒤 포위를 더욱 견고히 했다. 그러자 식량 등 물자 부족으로 인해 조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조괄은 46일 만에 탈출하기 위해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백기는 승리를 거둔 후 40만 명이 넘는 포로를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최근 이 생매장지가 발굴되었는데, 뒤엉킨 유골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느낄 수 있다.) 살려주면 언젠가 또 다시 진나라에 칼끝을 겨눌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사기],‘백기열전’) 장평 전쟁으로 조나라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모수(毛遂), 자기 자신을 추천하다
장평 전쟁 이후에 조나라의 위기는 곧바로 닥쳐왔다. 진나라는 BC 257년에 아예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쳐들어왔다. 조나라는 이미 혼자의 힘으로 진나라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효성왕은 평원군에게 초(楚)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고 서로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 오라는 사명을 부여했다.
조나라의 운명은 이제 평원군이 초나라를 설득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 평원군은 초나라를 설득하기 위해서 뛰어난 인재로 보좌진을 구성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빈객에서 20명을 채우기로 했는데, 19명을 찾았지만 마지막 한 명을 찾지 못했다. 바로 이때 모수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서 평원군에게 자신을 추천했다.
모수: “초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길을 떠나는데 사람이 한 사람 모자란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일행에 넣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평원군: “선생은 저의 문하에 머문 지 몇 년이 됩니까?”
모수: “올해로 3년입니다.”
평원군: “뛰어난 선비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같아서 끝이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이 부분이 ‘낭중지추(囊中之錐)’ 고사의 출처이다.) 3년 동안 선생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뛰어난 점이 없다는 말이네요. 그냥 여기에 머물러계시지요!”
모수: “저를 지금이라도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만약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자루까지 보였을 것이니 그깟 끝만 보였겠습니까?”
(‘평원군열전’ 중에서)
평원군은 탐탁지 않았지만 모수를 일행에 포함시켜 초나라로 떠났다. 모수를 보면 앞서 이야기했던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동양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큰소리쳤다가 무능한 인물로 밝혀지면 큰 고초를 치를 수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모수는 자신을 과감하게 베팅하고 있다. 능력은 있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불평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회라고 판단되면 “나는 나를 추천합니다”라는 자천권(自薦權)을 행사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드라마 [비밀]의 주인공 황정음이 실제로 연인과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하면서 전환점을 마련했던 것도 모수자천의 실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 화가 오력(吳歷, 1632~1718)은 8폭으로 된 [인물고사도 人物故事圖] 첫째 그림으로 ‘모수자천’을 그렸다. 모수는 평원군 앞에서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설득의 난제를 단번에 풀다
알렉산드로스 왕(356~323 BC)은 역사에서 정복 군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 북서부까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정복 전쟁 중에서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 중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프리기아 나라를 세운 고르디우스는 신전에 자신의 마차와 신전의 기둥을 단단한 매듭으로 묶어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묶어둔 매듭을 푸는 자야말로 아시아의 왕이 될 거라 예언했다. 알렉산드로스 왕은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한 매듭을 칼로 내리쳐서 끊어버렸다. 한 올 한 올 헤치며 푸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끊어서 풀어버린 것이다. 알고 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평원군은 일행과 함께 초나라에 도착했다.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초나라는 조나라와 동맹하면 진나라의 공격을 불러들이게 되므로 주저했다. 조나라는 동맹으로 생기는 이점을 과장하여 말했다. 시간이 가는 만큼 평원군의 속은 타들어갔다. 구원병이 늦을 경우 진나라가 한단을 함락할 가능성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평원군과 19명의 빈객은 머리를 맞대고 초나라의 주장에 대응하는 대항 논리를 찾았다. 그러면 초나라도 금세 또 다른 논리를 들고 나와서 동맹의 난점을 내놓았다. 시간이 흘러 협상이 끝나지 않을 듯하자 모수는 “합종(合從)이 이로운지 불리한지 두 마디면 끝난다”라고 단언하고는 칼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섰다.
초왕: (다소 당황한 듯이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평원군: “저의 빈객입니다.”
초왕: (모수에게 큰소리를 치며) “당장 내려가지 못할까! 내가 자네 주인과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모수: “지금 대왕께서 큰소리치는 건 초나라의 많은 군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 걸음 안에서 왕은 그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왕의 목숨은 제 손에 달렸습니다.”
(‘평원군열전’ 중에서)
모수는 주도권을 쥐고 합종의 이점을 설명함으로써 초왕(楚王)으로 하여금 동맹을 맺게 했다. 평원군은 초나라의 구원병과 함께 한단으로 달려가서 진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이로써 조나라는 멸국의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평원군은 합종에 적극적이지 않는 초왕을 설득해야 했다. 설득하지 못하면 조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평원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 불리한 처지에 몰리다 보면 적극적이지 못하고 수세적이게 된다. 겨우 대항 논리를 하나 찾아내더라도 파병의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이때 모수는 상황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풀어서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알렉산드로스 왕이 칼로 매듭을 내리쳤던 것처럼, 모수는 칼을 빼려고 칼자루에 손을 대는 안검(按劍)으로 지지부진하던 흐름을 확 끊어버렸다. 상황이 수세적인 논의에서 공세적인 압박으로 일시에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수가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추천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모수의 도전을 보면 자신을 먼저 설득할 수 있어야 상대와 시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면 언제라도 자신을 추천하라! 그리고 이렇게 외쳐라. “나는 나를 추천합니다!”
첫댓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고사성어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개를 거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추천하여 일을 함을 말한다. 감사합니다.
모수가 평원군을 도와 어려움에 처한 조나라를
구했으니 囊中之錐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낭중지추! 잘 배웠읍니다. 평원군, 애첩의 목을 베다!!
으악! 나쁜xx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