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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11) 미사의 준비
온 정성 다해 그리스도와의 만남 준비해야
“회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여야 하며, ‘마음의 준비를 잘 갖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준비는 성령과 회중이 공동으로 하는 일이지만, 특히 집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은총은 신앙과 마음의 회개 그리고 성부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일깨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전례 거행 자체로 받게 되는 다른 은총들과, 그에 따라 차후에 나타날 결과인 새로운 생명의 열매를 받기 위한 전제가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98)
특별한 만남에는 언제나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어떤 의무나 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이라면 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미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다. 식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 타오르게 하고 일상의 고된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새로움을 다시 발견하게 해줄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는 이 만남을 어떻게 준비해왔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는 매일 새벽 5시에 봉헌되는 미사 준비를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곤 했다. 예수님께서 수난 받기 전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성인은 십자가의 제사인 미사 거행을 위해 무려 3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동료 수사들이 농담어린 말로 이것이 너무 과하다고 지적할 때마다 그는 “거룩한 미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듯이 그는 거룩한 미사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열망했던 것이다.
또한 미사를 드리면서 비오 신부는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그는 “나는 미사를 드리기에 합당치 않는 사람입니다. 나야말로 가장 합당치 않은 사제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때문에 그토록 미사 준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에게 미사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과 만나는 가장 값진 은총의 순간이었다. 온 정성과 온 마음을 다해 미사를 준비하고 봉헌했던 이 겸손한 사제의 모습을 통해서 수많은 신자와 순례자들이 또한 미사의 은총을 체험했다.
성 비오 신부는 말했다. “세상은 해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미사에 관한 일화들은 때로 미사를 아무런 감흥 없이 습관적으로 드려왔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사제로서 합당한 준비 없이 주님의 거룩한 제단에 오르곤 했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어떻게 미사를 준비할 것인가? 하느님의 말씀, 특히 미사에서 봉독될 복음과 독서 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함으로써 일상 안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성찬례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되찾아야 한다. 이러한 내적 준비는 자연스럽게 미사 시작 전에 잠시라도 묵상과 침묵의 기도 시간을 갖거나 필요한 경우 고해성사를 통하여 화해를 이루도록 우리 모두를 이끌어 줄 것이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미사 준비에 있어서 집전자인 사제와 봉사자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다.
“사제는 미사를 준비할 때 자신의 취향보다는 하느님 백성의 영적 공동선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미사의 선택 부분들을 고를 때도 미사 거행 중에 특정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과 협의하고 또한 신자들에게 직접 관련되는 부분은 그들과도 협의해야 한다. 미사의 각 부분은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으므로, 미사 거행에 앞서 부제, 독서자, 시편 담당자, 선창자, 해설자, 성가대는 각자 자기와 관련된 부분에서 쓰이는 본문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결코 어떠한 것도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352항)
여기서 말하는 준비란 마치 완벽한 공연이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미사에서 거행되는 신비에 신자들을 능동적으로 참여시키고 하느님의 행위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도록 신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의 영적 공동선’이 뜻하는 바일 것이다.
이밖에도 새 「로마 미사 경본」은 사제가 미사 시작 전에 바칠 수 있는 여러 ‘미사 준비 기도’를 부록에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애롭고 자비로우신 어머니,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가련하고 부당한 이 죄인이 어머니께 피신하여
온 마음과 정성으로 어머니의 보호를 간청하나이다.
어머니,
지극히 사랑하는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곁에 서 계셨으니
오늘 이곳과 모든 성당에서 제사를 봉헌하는
가련하고 죄 많은 저와 모든 사제들 곁에 인자로이 함께하시고 도와주시어
저희가 지극히 높으시고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 앞에
마땅하고 정성스러운 제사를 바치게 하소서.”
(「로마 미사 경본」 부록 VI-미사 준비 기도 1386쪽)
[성체 성혈 대축일 기획] 성체와 성체조배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체성사의 위대한 신비를 기념하고 특별히 성체와 성혈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공경한다. 대축일을 맞아 다른 그리스도교가 성체를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성체 신심을 돌아보고, 성체 신심의 대표적 표현인 ‘성체조배’에 대해 알아본다.
누룩 없는 빵 ‘성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교회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다. 정교회와 성공회도 성체성사를 거행하지만, 가톨릭교회와는 다소 다른 면을 보인다.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회가 성체를 대하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성체에 관한 교리를 되짚어보면 어떨까.
정교회에서 성체로 축성하는 프로스포라(Prosphore)는 누룩이 들어간 빵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라틴 교회의 옛 전통에 따라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여야 한다”(교회법 926항)고 규정하고 있다.
누룩의 유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한 것이 파스카 축제일에 일어났는지 아닌지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온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날 유다인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가톨릭교회는 성찬례 제정, 즉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축제일에 행해진 것으로 본다.
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성체로 축성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성체성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완성된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전례헌장을 통해 성체성사를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47항)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 마치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 양을 바친 것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 순명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공회는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서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은 가르치지만, ‘성체’ 그 자체를 강조하지는 않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가 미사의 희생제사 안에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전례헌장 7항)한다고 가르친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년)는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을 통해 성체와 성혈의 성변화에 관해 밝힌 바 있다. 이 교령을 통해 교회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바치신 것이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항상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서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 빵의 온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온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빵의 모습은 형태에 불과하고, 그 실체는 빵이 아닌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성체 신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하므로, 마땅히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한다”면서 “이 공경은 우리가 성당을 찾을 때든 병자 영성체가 이루어질 때든, 우리가 성체를 만나는 모든 순간에 언제나 두드러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거룩한 시간 ‘성체조배’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성당. 미사 시간도 아니지만, 신자들이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어떤 신자는 서서, 어떤 신자는 무릎을 꿇고, 어떤 신자는 기도의자를 사용하는 등 모습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성광에 모셔진 성체 한 곳에 모여 있다. 바로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신심행위, 성체조배의 모습이다.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고 공경하는 교회는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성체조배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구속주회 창설자이자 교회학자인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성체조배로 보낸 시간은 일생 중 가장 귀하고 유익한 시간”이라며 “15분간의 성체조배로 얻은 것은 24시간 동안 다른 신심 행위들로 거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교회가 이렇게 성체조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체조배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직접 나아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욱 긴밀하게 느끼고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사 중 거행된 성체성사가 공동체적인 만남이자 성사였다면, 성체조배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신앙의 신비」를 통해 “조배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 그리스도께 대한 합당한 흠숭의 실천, 감사의 뚜렷한 표시, 사랑의 모정”이라고 밝혔다. 또 성체조배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것”이라면서 “지상에서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없으며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는데 이보다 더 큰 효력은 없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체 앞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침묵 유지’다.
이 침묵은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저서 「가르멜의 산길」에서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일치에 이르기 위해 외적·내적 침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내적 침묵을 지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도문을 소리 내지 않고 외우면서 잡념을 없애거나 하느님과 자유로운 형태로 대화하며 친교를 나누는 방법은 누구나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 내적 침묵은 모든 인간적인 사고를 멈춘 채 오직 하느님께 매료되는 ‘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자들의 성체 신심을 올바로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도직단체가 실천하는 방법을 따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천주교지속적인성체조배회’는 ▲ 경건한 마음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 조배에 앞서 주님께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적어도 1시간 이상 조배할 것을 권고한다.
한국천주교지속적인성체조배회 김명관(안셀모) 회장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달으면 이를 이웃에게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며 “더 많은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성경과 전례, 그 불가분의 관계
교우들은 성물과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거나 집과 사무실, 공장 등에 새로 입주하면 사제에게 축복(Benedictio)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복인 은총을 기원하는 행위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자 교회 공동체가 꼭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데 유독 성경은 축복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읽고 들음으로써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그냥 집에 둔다고 해서 복을 받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듣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느님의 참된 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이 가장 큰 생명력을 얻는 곳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전례 헌장> 7항)하는 전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례 역시 성경을 통해 활력을 얻습니다. 곧 성경과 전례는 호환성을 지닙니다. 성경이 낭독되고 묵상되는 마당을 전례라고 하면, 전례는 성경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할 힘을 얻습니다.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1993년에 발표한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라는 문서에서 ‘전례는 말씀이 선포되는 마당으로서 성경과 핵심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합니다. “전례, 특히 성찬례 거행을 그 정점으로 하는 성사 전례는 성서 본문의 가장 완전한 현실화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전례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그리스도 주변에 모인 믿는 이들의 공동체 한복판에 말씀의 선포가 자리 잡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 나오기 전에 이탈리아의 전례학자인 마르실리(S. Marsili)는 성경과 전례의 관계를 더 넓은 지평에서 설명했습니다(1974년). 이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관계를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읽힌 사건이 전례에서 실현됩니다. 이렇듯 성경은 전례에서 해석이 지성적으로 힘든 연구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의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항상 구체화됩니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성서 본문의 가장 완전한 현실화’와 마르실리의 ‘성경에서 읽힌 사건이 전례에서 실현’이라는 표현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1963년 12월 4일)에 폭넓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대화하며 구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전례 헌장> 5항을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구원 활동을 하시는 방식이 구약과 신약에 따라 다르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히브 1,1)하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며, 노아 때 일어난 대홍수, 바벨 탑 사건, 이집트 탈출 사건으로도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둘째,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한 분에게 집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 당신의 아들,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을 보내시고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도록 육신과 영혼의 의사가 되시고, 하느님과 사람의 중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도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청원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전례 기도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셋째, 구약이 참된 구원 곧 파스카 신비를 구현하기 위한 준비라면, 신약은 그것이 실현되는 시기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이 일은 구약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위업으로 준비되었으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특히 당신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신’ 그 신비를 통하여 성취하셨다”(<전례 헌장> 5항).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전례 헌장> 6항은 신약 이후 사도에게 이어진 교회 시대의 구원 활동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서 파견되신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을 파견하시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아들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사탄의 권세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아버지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는 소식을 알리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선포하는 구원 활동을 모든 전례 생활의 중심인 희생 제사와 성사들을 통하여 수행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어 당신이 하신 복음 선포와 구원 활동이 교회 전례를 통해 지속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고백하는 마당이 바로 교회의 사명을 기본으로 수행하는 ‘전례’입니다.
인간과 대화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부, 사람이 되신 말씀인 중재자 성자, 그리고 하느님을 지향하게 하며 성자의 뜻에 따르도록 이끄는 성령에 의해 말씀은 전례 안에서 교회를 생동케 하는 원천이 됩니다. 또 전례는 선포된 말씀이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되게 합니다.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성호경과 십자성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누구일까? 너무 빤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 중심을 두는 때가 많아 가끔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시작하면서, 삶의 중심이며 원인인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십자성호를 그으며 고백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짧은 고백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큰 사건, 곧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재현하는 미사 때 바치는 첫 신앙 고백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신앙 고백문인 성호경은 중세 때부터 기도를 시작할 때 첫머리에 사용하는 관용구였는데,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미사를 시작할 때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4세기에 교회는 사제가 제대 앞 층계에서 봉사자들과 함께 바치는 층하경(“주의 제단에 나아가리다”와 시편 43편과 고백 기도로 구성)을 시작 기도로 미사에 도입했다. 그 층하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른 미사 개정 작업 초기에 없어지고, 십자성호가 일반적으로 기도와 예식의 시작 기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개정안 작업 때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하여 그대로 존속하는 대신 그 위치를 제대 인사 다음으로 옮겼다.
성호경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구절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성호경과 십자성호를 두 가지 면, 곧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이라는 차원과 세례를 상기시키는 기도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신앙 고백 차원에서 볼 때, 성호경은 구원의 원천이 삼위일체 하느님임을 드러낸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렇듯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성찬례에서 그 성사적 현존을 찾아야 한다. 십자표를 하면서 외우는 성호경은 우리 구원의 원천이자 목적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동시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십자성호는 세례를 상기시키는 동작이다. 곧 초기 교회에서 십자성호와 성호경은 ‘세례’를 위한 동작이자 호명이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의 물에 의해 새로 태어나고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로 입적되었다. 세례받은 우리는 구원하시는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잠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성호경과 동반하는 동작인 십자성호가 교회 예식에 들어온 시기는 2세기경이다. 당시의 입교 예식을 보면 주례자가 예비신자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하였다. 4-5세기경부터는 사제가 오른손으로 사람이나 사물에 십자를 그어 축복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12세기부터는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를 긋는 형식이 전례에 도입되었다. 현재와 같이 크게 긋는 십자성호는 이미 5세기경에 나타나지만 널리 보급된 시기는 13세기부터이다. 초기에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넘어가는 형식이었지만(동방식 또는 그리스식), 13세기부터 서방 전례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형식으로 바뀌어 퍼졌다(서방식 또는 라틴식).
성호경과 십자성호는 미사의 시작 부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 십자가 제사의 재현이다. 이러한 십자가 제사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성호경과 십자성호로 제사를 바치는 데 필요한 마음의 자세를 갖춘다. 신앙의 핵심 전례를 거행하면서 세례 때 고백한 신앙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한다. 그리고 신앙의 신비를 하느님의 이름과 그분의 도움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래서 미사를 마칠 때에도 비슷한 마음의 자세로 사제가 성삼위의 이름으로 내리는 축복을 받으면서 십자성호를 긋는다.
예전에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 남성 구역모임에 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식사 전후 기도를 합니까? 그 기도를 할 때 성호는 긋습니까?” 참석한 분들이 돌아가면서 대답을 했다. 그중에 한 분이 “긋기는 하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려 “어떻게 긋는데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분은 작은 소리로 “남들이 보지 못하게 배꼽에 긋습니다”라고 답했다. 참석자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왜요?” 하고 되묻자, “제가 신자로 잘 살지 못하는데 성호까지 그으면 신자라는 것이 드러나 다른 신자들에게 욕을 먹일 것 같아 그렇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십자성호를 그으십시오.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신자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로 잘 살고 있다’고 답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권고했다.
모든 기도의 시작과 마침에 성호경과 십자성호를 할 때는 로마노 과르디니가 《거룩한 표징》에서 당부한 것처럼 했으면 좋겠다. “올바로 십자성호를 긋도록 하자. 천천히, 크게, 이마에서 가슴으로, 이 어깨에서 저 어깨로, 이렇게 하다 보면 온몸이 십자가의 표시와 하나가 됨을 느끼게 된다.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어깨에서 어깨로 그어 나가는 성호에 모든 생각과 정성을 쏟으면 십자성호가 몸과 마음을 감싸 주면서 나를 거두고 축복하고 거룩하게 함을 절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면 자신도 거룩하게 되고 보는 사람도 경건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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