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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고후3:1-18절) 얼굴에 쓴 수건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자기 길을 찾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일을 합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 두 개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①자신이 이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직업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 길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즉 사람들은 그 길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 공부를 해야 하고,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며, 치열한 생존경쟁 즉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②우리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혼동함으로써 오늘날 기독교는 무서운 무도덕과 침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복(福)을 받았기 때문이며, 자기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한 것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다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회에서 성공한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이나 열정을 인정받았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경영학(經營學) 즉 직업적(職業的)으로 목회에 성공한 것이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에서 보기 싫은 것이 있으면 수건이나 신문 종이로 덮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곳에 살인(殺人)사건이 일어나 사람이 죽어 있으면 병원에서는 시신(屍身)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 흰 천으로 덮습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시신(屍身)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이 하숙이나 자취할 때, 자장면 같은 음식을 시켜먹고 치우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온다고 하면, 음식찌꺼기가 보기에 좋지 않으므로 신문지나 보자기 같은 것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요즘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을 많이 봅니다.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것입니다. 팬 성도들이 사는 호주에 가면 태양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드시 햇빛을 차단하는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외출하라고 말합니다.
햇빛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존조건 중에 하나지만, 그 빛이 너무 강할 때는 눈이 부시고, 피부가 상하게 되어 좀 차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 그 영광을 보고 돌아온 뒤,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 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모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자신들과 말할 때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모세의 얼굴에서 나던 광채는 그가 하나님의 등을 보고난 뒤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즉시 눈이 멀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핵실험을 하면, 어마어마한 광선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에 고글(goggles)을 착용하거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핵폭발이 일어나면 버섯구름이 나타나고, 방사능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곧 이런 영광이고 에너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영광에 도취되어 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을 많이 합니다. 즉 교수는 명예(名譽)가 있고, 판사와 검사는 영광(榮光)이 있고, 의사는 권위(權威)가 있고, 정치인들은 권력(權力)을 잡으면,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사의 일보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만, 사람들 중에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것도 몰라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이지, 제대로 안다면, 너무나 두려워서 어느 누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일 못지않게 위대한 일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태양광선보다 수십 배 더 강한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춰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회자나 교인은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 너무 재미없다고 여겨서 이것을 회석시켜서 전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희미하게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마치 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자동차 운전하는 것과 같아서 사물(事物)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운전하던 차는 얼마 가지 못한 채, 여기저기 부딪쳐 사고가 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목회자나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을 비춰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고,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Ⅰ.사람의 추천서
고린도 교회를 부흥시킨 뒤,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지역의 전도를 위해 고린도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가 고린도를 떠나자. 새로운 목회자와 장로들이 고린도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이들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배운 사람으로써, 대부분 체계적인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추천서나 자격증 없이 혼자서 주먹구구식으로 전도해서 교회를 세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에게 연락해서 *앞으로 다시 고린도에 와서 말씀을 전하거나, 교회를 지도하려고 하면,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소개서(紹介書), 특히 예루살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추천서(推薦書)를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고린도에서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부흥을 일으킨 것을 전혀 인정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추천(推薦)없이는 사도 바울 마음대로 고린도나 다른 곳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원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모든 교회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복음 자체뿐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예루살렘 사도 외에 다른 사람을 통해 얼마든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주님이 사도 바울을 세워서 복음과 이방인 전도를 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사도들은 사도 바울을 처음 만나자마자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인정해주었는데, 이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자들은 더욱 완고하게 행동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더 이상의 자기 소개서나 다른 사람의 추천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3:1-2절)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사도 바울도 자기를 대신해 믿음의 아들들 디모데나 디도를 보낼 때는 그들을 위한 추천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가야하는데, 갈수가 없는 상황일 때는 디모데나 디도 등 신실한 형제를 보내면서 추천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초대교회 때,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전도하러 왔다거나 선교한다고 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며, 폐를 끼치기도 하고, 헌금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교훈(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오래된 문서⟨디다케⟩를 보면, 교회나 성도, 거짓된 전도자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이 없는 고린도에 거의 맨손으로 들어가다시피 해서 복음의 결실을 거두었고,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곧 하나님이 쓰신 추천서이고. 자기소개서이기 때문에 지금 새삼스럽게 자기소개서나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놀라운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을 알아들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양(羊)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 아닌 사람이 설교할 때는 사람을 웃게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전하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3:2절)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즉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것이 곧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추천서이고 편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 조지 휫필드가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 성공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교회가 없었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목사 안수를 받고, 설교하는 날에 10명 넘는 교인이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아서 남들 보기에 전부 미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조지 휫필드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지 않자. 결국 그는 야외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찾아간 곳은 킹스우드라는 광산촌(鑛山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교회도 없고, 학교와 병원도 없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막 탄광에서 나온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의 얼굴에 두 줄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흘리는 은혜 받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의 종을 보내주셨다*고 기쁜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웨일스에서는 야외 설교를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웰 해리스로 평신도였는데, 당시 평신도는 설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설교를 *권면*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허가도 없이 설교를 했기 때문에 깡패들로부터 몽둥이로 많이 맞았고, 짓밟히기도 했습니다.
하웰 해리스는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 죽었는데, 너무나 많이 맞아서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하웰 해리스나 조지 휠필드는 교회로부터 설교를 하도록 허락 받지 못했습니다. 즉 하웰 해리스는 세 번이나 목사가 되고자 지원했으나 모두 거부당했습니다.
또 조지 휫필드는 가는 곳마다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교회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너무 은혜를 받아서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서 아무도 설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런던 교회당도 없이 공원에서 설교 할 때, 8만 명 정도가 모여서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비가 내려도 가는 사람이 없었고, 밤새 비를 맞아 가면서 회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교인들 중에 기도하다가 탈진해서 쓰러져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목회자들은 조지 휫 필드를 광신자(狂信者)라고 욕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 있는 설교를 하시고,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고지시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회당 설교를 금지시켰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갈릴리의 호숫가에서 설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많은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교인들이 올바른 말씀을 듣기 원하고, 올바른 말씀을 들으면 기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기도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엄청난 힘이고 재산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더 많은 성공(成功)의 우상(偶像)이 교회 안이나 목회자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진정한 복음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드는 폭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믿고, 성경만 붙들면, 북한의 수소폭탄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부흥 자체가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Ⅱ.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가 부흥되고 커지면서 인간적인 자격과 인간적인 가르침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점점 세련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적(敵)은 바로 이 세련(polished)되고자하는 욕심이고, 사람들에게 자장가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야망(野望)입니다.
3:3절)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이제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이 시내산 광야에서 받았던 율법이 새겨진 돌 판과 복음의 능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 시내산까지 왔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언약이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을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뒤, 온 시내산이 불붙는 중에 모세만 산(山)정상으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서 40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 개의 돌 판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십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십계〉를 보면, 모세가 산(山)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받는데, 하나님이 불을 갖고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을 돌 판에 새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말씀 하나하나가 불같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偶像)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죽도록 섬기는 이상 *이 세상 어느 군대(軍隊)나 어느 왕(王)도 그들을 해칠 수 없게 능력의 불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세나 천사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육성(肉聲)으로 전해주신 하나님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 마음 판에 성령으로 새겨주셨습니다.
그러면 불과 성령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두 개의 돌 판은 던지면, 깨어지는 그냥 단단한 돌(石)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다름 아닌 *돌 같이 단단한 마음을 녹여서 부드럽게 만들어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돌(石)보다 더 단단한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돌(石)보다 단단하고, 철판(鐵板)보다 단단하고 다이아몬드(diamond)보다 견고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녹인 그 능력으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7:20절)...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산이 들려져 옮겨지는 것은 큰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강도 8 이상의 지진(地震)이 일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2008년 중국 스촨성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났을 때, 산(山)이 쪼개지면서 굴러 강(江)에 떨어지는 바람에 거대한 호수(湖水)가 생겼습니다. 이런 것이 곧 산(山)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부흥이 일어나게 될 때, 이 세상에 상상할 수 없는 큰 영적 지진(地震)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사탄의 나라는 갈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3:4-5절)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여기서 *우리에게서 났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 창작(創作)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위대한 사상(思想)을 말하고, 새로운 이론(理論)을 말하면, 위대하다고 칭찬과 인정을 해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思想)과 이론(理論)으로는 영혼(靈魂)을 살릴 수 없고, 돌같이 단단한 마음을 녹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상(思想)이나 이론(理論)은 모두 추측(推測)이나 가설(假設)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알아주고 권위를 인정해줍니다.
복음은 인간의 독창적인 사상(思想)이나 이론(理論)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요, 그분이 주신 약속(約束)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세상적으로 검증(檢證)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3:6절)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율법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음을 전제(前提)로 하고 준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망하지 않고, 살기 위해선 율법의 가이드라인(guideline)을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은 고속도로의 가이드레일과 같습니다. 가이드레일은 일단 고속도로 안에 들어온 자동차가 안전하게 운전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가 그 가이드라일을 들이받고, 넘어가 낭떠러지나 골짜기로 떨어졌다면,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속도로의 가이드레일은 생명을 지켜주는 선(線)이자 죽음을 경고하는 선(線)인 것입니다. 이것은 고속도로 밖에 있는 차들을 고속도로 안으로 들어 옮기거나 고속도로 위에 있는 차에 새 엔진을 달아서 더 빨리 달리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므로 율법 밖에 있는 자들도 모두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새 능력을 주셔서 더 잘 달리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이드레일이라면, 복음은 새 엔진입니다.
Ⅲ.하나님의 말씀의 영광
3:7-8절)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처음 시내산(山)에서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머지않아 하나님 말씀을 시시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신나는 말씀도 아니고 전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말씀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받으러 시내산(山)꼭대기에 올라간 뒤 4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모세가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바라던 신앙에 따라 금송아지 우상(偶像)을 만들고, 기분이 좋아서 그 앞에서 춤을 추면서 뛰어다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빨리 산(山)에서 내려가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산(山)아래쪽으로 내려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는데, 여호수아는 전쟁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전쟁이 얼어난 소리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취해서 떠드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고 춤추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언약을 새긴 두 돌 판을 던져 깨뜨려버렸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율법만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데려갈 자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차가운 돌(石)에 적은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과연 무엇이 달라질까?
모세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모세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강한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실망한 그에게는 이 실망감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山)위로 다시 올라오라고 하시면서 그를 반석(磐石)틈에 두고,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등을 보고 모세에게 얼마나 강한 카리스마(charisma)가 생기고, 영광의 빛이 나타났는지, 이스라엘 백성은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두려움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과 만날 때는 *얼굴에 수건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얼굴 피부의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는 그 수건을 벗고, 빛나는 얼굴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영광이 지나갈 때,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셨습니다.
과연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보았을까?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중에서 가장 밝은 부분은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가장 밝은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질이신 그리스도이시요, 그분의 복음(福音)*입니다.
여기서 율법(律法)이 하나님의 영광의 등이라면, 복음(福音)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의 영혼을 치료해 주십니다. 즉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이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얼굴을 뵙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은 모세보다 *강한 능력과 카리스마(charisma)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볼 수 없어서 수건을 써달라고 한 것같이 지금도 복음의 광채를 볼 수 없어서 수건을 쓰고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듣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14-15절)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사람들이 수건을 덮어씌우는 것은 대개 실체(實體)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음식을 다 차려놓은 뒤, 파리나 먼지가 음식위에 앉지 못하도록 보(褓)를 씌우곤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먼저가 있어도 어떤 음식이 놓여 있는지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음식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음식을 먹을 수도 볼 수도 없고, 손님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인이 없을 때는 가구(家具)나 소파에 천을 덮어 먼지가 쌓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가더라도 주인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소파에 앉을 수도 없고, 가구(家具)를 사용할 수도 없는데, 천이 덮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결혼식 때, 신부의 얼굴에 면사포(面紗布)를 쓰게 해서 신부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신랑이 가장 먼저 신부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객들은 신랑이 면사포(面紗布)를 들기 전에는 신부가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맛이 있지만. 수건을 쓴 사람은 거기에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것을 먹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율법의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복음의 비밀(秘密)을 먹을 수 있고, 그 축복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수건을 쓴 채, 보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들의 교만(驕慢)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사상(思想)이나 인정(認定)을 좋아해서 인간의 지식(知識)이라는 수건을 쓰고, 스스로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보지 않고,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습니다.
3:17절)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하나님은 영(靈)이시기에 인간의 제도(制度)나 지식(知識)의 얽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靈)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자유 함은 방종(放縱)이 아닙니다.
이 자유는 모든 계급(階級)이나 속박(束縛), 인간적 차별(差別)을 모두 다 벗어버리는 진정한 기쁨의 자유를 말합니다. 즉 진정으로 수건 벗은 자들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쓸 수 있습니다. 이미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진리 안에서 마음껏 수영하면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인간의 궤변(詭辯)에 속지 않는데, 모두 이차적인 가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굴이 아니고, 얼굴을 가리는 수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를 들어서 어떤 곳에서 무슨 사정이 있어 중요한 사람이 올 때까지 캄캄한 방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합시다. 그동안 사람들은 너무나 답답할 것입니다. 즉 몇 시나 되었는지, 아침인지 밤인지 낮인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도착해서 환하게 불이 켜졌다고 합시다. 그때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일단 방이 환해져서 기분이 좋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있는 방이 대단히 화려했던 것입니다.
그 방에는 온갖 화려한 장식(裝飾)과 샹들리에(chandelier)가 있고, 상해진미(山海珍味)가 차려져 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유명한 주인공(主人公)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 거울은 결코 희미한 거울이 아닙니다. 이 거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反射)하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 하나님의 빛난 영광을 반사(反射)하는 거울처럼 되어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빛나게 되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주저함 없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寶座)를 향하여 나아가서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비밀(秘密)이고, 성령의 능력이며, 우리에게 인간적인 수건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 시간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모든 요6:27절)...영생하도록 있는 썩지 않을 양식”을 배불리 먹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을 다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33장 *영광스런 주를 보라*
☞소통과 합력의 달☜ ▣ 매일 새벽 마다 합심하여 기도할 제목
요14:13절)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약속하신
주님! Ⅰ.열방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Ⅱ. 동탄에 성경연구원 금년 내 설립할 동역자를 보내주소서.
Ⅲ. 신실하고 충성된 후임자와 일꾼들을 보내 주옵소서. 아-멘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롬8:28)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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