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통합(명/청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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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시좌궁(時坐宮) 그 당시에 왕이 거처하던 궁전.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
2.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일 경술 1번째기사 / 신하들의 조회를 서서 받다
임금이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3.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7일 병진 1번째기사 / 강씨를 왕비로 정하고 현비라 하다
강씨(康氏)를 세워 현비(顯妃)를 삼았다.
4.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1번째기사 / 처음으로 신하들의 조회를 앉아서 받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앉아서 받았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겸양(謙讓)으로써 조회를 받을 적에는 반드시 섰었는데, 이날에는 여러 신하들이 땅에 엎드려 〈앉아서 받기를〉 굳이 청하므로, 이에 앉았다.
5.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2번째기사 / 역대의 사전(祀典)에 대한 상서문. 불경의 백고좌 법석, 7개 도량의 내력을 상고케 하다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신 등이 삼가 역대(歷代)의 사전(祀典)을 보옵건대, 종묘(宗廟)·적전(籍田)·사직(社稷)·산천(山川)·성황(城隍)·문선왕(文宣王) 석전(釋奠)의 제사는 고금(古今)에 널리 통행(通行)되었으며 국가의 상전(常典)인 것입니다. 지금 월령(月令)의 규식(規式)대로 아래에 갖추어 기록하오니, 청하옵건대, 유사(攸司)에 내려 때에 따라 거행하소서.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월령(月令) 《예기(禮記)》의 편명(篇名)인데, 1년 12월의 정령(政令)을 기록하였음. 원구(圜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여러 신묘(神廟)와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나라의 제소(祭所)이니, 다만 모주(某州), 모군(某郡) 성황(城隍)의 신(神)이라 일컫고, 위판(位板)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매양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전물(奠物)·제기(祭器)·작헌(酌獻)의 예(禮...
6.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2일 신유 1번째기사 / 조박이 고려의 성종과 문종을 마전군의 태조묘에서 같이 제사지내도록 청하니 윤허하다
조박(趙璞) 등이 또 상서(上書)하였다. "고려의 성왕(成王) 이 중화(中華)를 우러러 사모하여 문물(文物)을 흥하게 해서, 백성이 그 은혜를 받고 있으며, 문왕(文王) 은 근신(謹愼)하여 부조(父祖)의 왕업을 지켜 세상을 태평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그 생업을 안정하였으며,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키고, 상국(上國)을 잘 섬겨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모두 동방에 공로가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또한 마전군(麻田郡)의 태조묘(太祖廟)에 붙여 제사지내게 하소서." 성왕(成王) 성종(成宗). 문왕(文王) 문종(文宗).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7.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9일 무진 1번째기사 / 대사헌 남재가 임금의 거동시에 대간 등을 수가하도록 청하니 윤허하다
사헌부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인주(人主)의 동정(動靜)은 모든 백성이 보는 바이며, 뒷세상에서 본받는 바이온즉, 창업(創業)의 군주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달 16일의 도승지(都承旨) 신(臣) 안경공(安景恭)의 전지(傳旨)를 보옵건대, 온정(溫井)에 거둥하실 때에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외에 각사(各司)의 성중 애마(成衆愛馬)들에게 시종(侍從)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일의 간요(簡要)함을 숭상하시어, 만약 예절 갖추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신다면, 비옵건대, 대간(臺諫)·중방(重房)·통례문(通禮門)·사관(史官) 각 1원(員)씩이 호종(扈從)하게 하여, 뒷세상에서 경솔한 행동을 할 단서(端緖)를 개시하지 말도록 하소서." 성중 애마(成衆愛馬) 고려 때 숙위(宿衛) 또는 임금에게 근시(近侍)하던 관직. 내시(內侍)·다방(茶房)·사순(司循)·사문(司門)·충용(忠勇)·사의(司衣)·우달치(迂達赤)·속고치(速古赤)·별보(別保) ...
8.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9일 무진 2번째기사 / 공신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임금과 중궁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러 공신의 부인들도 또한 중궁(中宮)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9.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8일 정축 1번째기사 / 예부에서 보낸 상제에 따라 죽은 황태자에게 거애하다
임금이 평주(平州)에 있었는데, 행재소(行在所)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태자의 상복(喪服)을 입고 거애(擧哀)하였다. 서울에 있는 각 관사(官司)에서도 또한 이날에 거애하였다. 권중화(權仲和)가 예부(禮部)에서 기록해 보인 상제(喪制)를 가지고 왔는데, 1. 복제(服制)는, 최복(衰服)은 마포(麻布)를 써서 제조하고 또 조포(粗布)를 써서 제조하며, 건(巾)은 사모(紗帽) 위에 싸서 쓰게 하고, 띠[帶]는 뒤로 드리우게 하며, 마질대(麻絰帶)는 백일 만에 벗게 하고, 최복(衰服) 참최(斬衰)나 자최(齋衰)의 상복. 1. 13일 동안 음악을 정지하고, 3일 동안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1개월 동안 시집가고 장가감을 정지하고, 13일 동안 대사(大祀)와 소사(小祀)를 정지하는 것이었다. 대사(大祀)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단(社稷壇)·원구단(圜丘壇)의 제사.
10.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14일 임진 1번째기사 / 예문춘추관에서 사관의 입시 사료 수집 등에 관한 일을 상언하니 윤허하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서 세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였다. "1. 매양 정전(正殿)에서 만기(萬機)를 재결(裁決)하고 신료(臣僚)들을 접견할 때에는, 원컨대,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좌우에 입시(入侍)하게 하여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참예해서 듣도록 하소서. 사신(史臣) 사관(史官). 1. 겸관(兼官)으로서 수찬(修撰) 이하의 관직에 충당된 사람은, 원컨대, 각기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사초(史草)로 만들어서 모두 본관(本館)으로 보내게 하소서. 본관(本館) 춘추관(春秋館). 1. 본관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아문(衙門)에 직접 공첩(公牒)을 보내어, 무릇 시행한 것이 정령(政令)에 관계되고 권계(勸戒)에 전할 만한 것은 명백히 공문서로 보내게 할 것이며, 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매양 그 철의 마지막 날에 조례(條例)를 모두 써서 본관으로 보내어 기록에 빙고(憑考)하게 하고, 이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
11.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18일 병신 1번째기사 / 달이 묘성을 가리다. 임금이 수창궁에서 성절을 축하하는 의식을 행하다
달이 묘성(昴星)을 가리웠다. 임금이 수창궁(壽昌宮)에 거둥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축하하는 예(禮)를 거행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
12.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19일 정유 1번째기사 / 상의중추원사 황희석이 상복을 입은 채로 알현하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황희석(黃希碩)이 왔다. 희석(希碩)은 임금이 즉위하기 전에 부친의 상(喪)을 당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최복(衰服) 차림으로 와서 임금을 뵈었다. 최복(衰服) 상복(喪服).
13.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0일 무술 2번째기사 / 증조모의 기일이므로 조회를 정지하다
황증조비(皇曾祖妣)의 기신(忌辰)인 까닭으로 조회를 정지하였다.
14.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3일 신축 1번째기사 / 절비의 기일이므로 조회를 정지하다
임금이 절비(節妃)의 기신(忌辰)인 까닭으로써 조회를 정지하였다.
15.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2번째기사 / 의흥 친군위를 사열하다
의흥 친군(義興親軍)을 사열(査閱)하였다.
16.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7일 을축 1번째기사 / 진안군 이방우에게 4대 조상을 제향케 하고, 신주를 효사관에 안치토록 하다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 에게 명하여 사대(四代) 선조를 제향(祭享)하게 하고, 신주(神主)를 효사관(孝思觀)에 임시로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이방우(李芳雨) 태조의 아들.
17.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1일 무인 1번째기사 / 조회하고, 조반에게 잔치를 베풀다
임금이 조회를 보고, 조반(趙胖)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18.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6일 계미 2번째기사 / 개국 공신에게 교서를 내리고, 옹주와 택주에게 인신을 내려 주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등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주고, 여러 옹주(翁主)와 택주(宅主)에게 인신(印信)을 내려 주니, 공신 등이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민도(李敏道)에게 내린 교서는 간의 대부(諫議大夫) 이문화(李文和)가 지은 것인데, 그의 복서(卜筮)·의약(醫藥)의 기능(技能)까지 아울러 일컬었었다. 민도(敏道)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공훈을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한다 하면서 이러한 몇 가지 일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은 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임금이 명하여 이를 고치게 하였다.
19.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11일 무자 1번째기사 / 조회를 보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20.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18일 을미 1번째기사 / 수창궁에서 황태손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을 갖다
수창궁(壽昌宮)에 거둥하여 황태손(皇太孫)의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천추절(千秋節) 황태자·황태손(皇太孫)의 생일.
21.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1일 무술 1번째기사 / 조회를 보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22.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일 정미 1번째기사 / 동북면 8개 능의 제사를 사맹월과 납일에는 종실이, 명절에는 도순문사가 지내도록 하다
임금이 교지를 내렸다. "동북면(東北面)의 8능(陵)에 사맹월(四孟月)과 납일(臘日)에는 특별히 종실(宗室)과 대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삭망(朔望)과 시속의 명절에는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
23.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25일 신미 1번째기사 / 4대 조상의 납일 제사를 지내다
납일(臘日)에 사대(四代)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었다.
24.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25일 신미 2번째기사 / 원종 공신 유만수 등이 임금에게 음식을 대접하다
원종 공신(原從功臣) 유만수(柳蔓殊) 등이 임금에게 잔치를 베풀어 드렸다.
25.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윤12월 6일 임오 1번째기사 / 시위병을 사열하다
임금이 시좌궁(時座宮)의 북문 밖에 나가서 시위병(侍衛兵)을 사열하고는 측근의 신하를 돌아보며 일렀다. "병법(兵法)에, ‘정제(整齊)된 깃발을 맞이하지 말고 정돈된 진지(陣地)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이를 이름일 것이다."
26.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윤12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 입춘이라 여러 신하들이 조회에서 축하드리니 봄 번자를 내리다
입춘(立春)에 여러 신하들이 조하(朝賀)하니 봄 번자(幡子)를 내려 주었다. 번자(幡子) 표기(標旗).
27.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윤12월 19일 을미 1번째기사 / 임금이 현비와 함께 의화 궁주 안씨의 집에 가서 연회를 즐기다
임금이 현비(顯妃)와 더불어 의화 궁주(義和宮主) 안씨(安氏)의 사제(私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28.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윤12월 28일 갑진 1번째기사 / 개국 공신이 임금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헌수하다
개국 공신(開國功臣)들이 임금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각기 차례대로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고는, 한껏 즐기고서 파하였다.
29.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일 정미 1번째기사 / 백관의 조하를 받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새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가지다.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비로소 조정(朝廷) 제도의 관복(冠服)을 입었다. 예(禮)를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이 전(殿)에 앉아서 중외(中外) 관원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안렴사(按廉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들이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은 역대의 제왕이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강목(綱目)의 그림[歷代帝王爲學爲治綱目之圖]을 바치고, 교주 강릉도 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 정탁(鄭擢)은 사상보(師尙父) 가 단서(丹書)를 받들어 무왕(武王)을 경계한 그림[師尙父奉丹書戒武王之圖]과 《대학연의(大學衍義)》 2부를 바쳤으며, 알도리(斡都里)는 산 범[生虎]을 바쳤으므로, 이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였다. 조정(朝廷) 중국. 사상보(師尙父) 강...
30.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7일 계축 1번째기사 / 인일이므로 여러 신하들이 조하하니, 녹패 등을 주다
인일(人日)에 여러 신하들이 조하(朝賀)하니, 인승(人勝) 녹패(祿牌)를 내려 주었다.
31.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 영안군을 시켜 큰 군기의 귀신에게 제사 지내게 하다
영안군(永安君)에게 명하여 둑신(纛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홍둑(紅纛)·흑둑(黑纛) 둘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므로 제사지내게 한 것이었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 둑신(纛神) 대가(大駕) 앞에나 군중(軍中)에서 대장(大將)의 앞에 세우는 기(旗)의 한 종류이니, 곧 기의 신(神)임.
32.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8일 갑자 1번째기사 / 임금의 행차시 각사가 수종하기를 청하였으나, 형조의 1인만을 수종케 하다
간관(諫官) 안경검(安景儉) 등이 상언하였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제왕(帝王)의 기업(基業)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여 주니,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는 것도 자손이 본받게 되므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가(大駕)가 남방으로 순행하면서 다만 삼군(三軍)만 거느리고 백관(百官)은 참여하지 않으니, 신 등은 그윽이 불만스러움이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각사(各司)에서 한 사람씩 대가에 따라가기를 허가하고, 이를 후세(後世)의 법으로 삼게 하소서." 임금이 다만 형조(刑曹)의 한 사람만을 대성(臺省)과 같이 대가(大駕)에 따라가게 하였다.
33.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21일 정묘 3번째기사 / 이색이 와서 죄를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하다
이색(李穡)이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34.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24일 경오 1번째기사 / 설장수가 와서 죄를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하다
설장수(偰長壽)가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35.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5일 경진 1번째기사 / 어가가 청주에 이르니 관민이 맞이하다
청주에 이르니 목사(牧使) 진여의(陳汝宜)와 판관(判官) 민도생(閔道生)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御駕) 앞에 절하였다.
36.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2번째기사 / 좌시중 조준 등이 국호 받은 것을 진하한 전문
문하 좌시중 조준 등이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이황(李滉)을 보내서 전문(箋文)을 받들어 진하(陳賀)하게 하였다. "성인(聖人)이 왕통(王統)을 창시(創始)하였으니 문득 기자(箕子)의 옛 봉토(封土)를 다스리었으며, 황제의 명령이 아름다웠으니 조선(朝鮮)의 미호(美號)를 주었습니다. 종사(宗社)에 영광이 오고 신민(臣民)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순제(舜帝)의 문명(文明)보다 지나쳤으며, 탕왕(湯王)의 용지(勇智)에 필적(匹敵)하셨습니다. 구가(謳歌)의 따른 바에 순응하고 역수(曆數)의 돌아온 바를 받아서 하민(下民)을 다스리는 인덕(仁德)을 미루어 넓히고,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절에 더욱 근실히 하셨으니, 한 장의 종이에 열 줄 되는 조칙이 먼저 그 이름을 바루게 하였으매, 억년 만년의 기업(基業)이 지금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신 등은 성상의 병위(兵衛)를 모시지 못하여, 비록 빨리 달려가는 반열[駿奔之班]에 나아가지 못했사오나, 즐거이 도성(都城...
37.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1일 병신 1번째기사 / 좌시중 조준이 행재소에서 임금을 알현하다
좌시중 조준이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謁見)하였다.
38.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4일 기해 1번째기사 / 의비의 기일이므로 회암사에 가서 중들을 공양하다
의비(懿妃)의 기신(忌晨)이므로 임금이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중들을 공양(供養)하였다.
39.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6일 신축 2번째기사 / 세자가 어가를 장단에서 맞이하다
세자(世子)가 어가(御駕)를 장단(長湍)에서 맞이하였다.
40.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7일 임인 1번째기사 / 계룡산에서 돌아오니 백관이 맞이하고, 채붕과 나례를 설치하다
임금이 계룡산으로부터 이르니, 백관(百官)들이 용둔(龍屯) 들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오니 채붕(綵棚)과 나례(儺禮)를 시좌궁(時座宮) 문밖에 설치하였다. 성균관의 학관(學官)이 여러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가요(歌謠)를 불러 올렸다.
41.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1일 병오 1번째기사 / 도당에서 임금을 위하여 시좌궁에서 잔치를 베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임금을 위하여 시좌궁(時座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42.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10일 을묘 1번째기사 / 목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 의 기신(忌晨)이므로 조회와 저자[市]를 정지하게 하였다. 목왕(穆王) 목조(穆祖).
43.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13일 무오 1번째기사 / 도당에서 의비와 현비의 3대 조상을 봉증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도평의사사에서 황비(皇妃) 의비(懿妃)의 3대(代)와 중궁(中宮) 현비(顯妃)의 3대(代)를 봉증(封贈)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44.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4월 2일 병자 3번째기사 / 명으로부터 인장이 도착하기 전이므로 예전대로 교지에 국왕 신보를 쓰다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조정(朝廷)의 인장(印章)이 내려오기 전에는 무릇 반행(頒行)하는 교지(敎旨)와 차제(差除) 등의 일은 국왕(國王)의 신보(信寶)를 쓰게 하소서." 조정(朝廷) 중국. 차제(差除) 임명. 신보(信寶) 옥새. 그대로 윤허하였다.
45.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4월 6일 경진 4번째기사 / 왕사 자초를 접대하고 비단을 하사하다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대궐 안에서 접대하고 채색 비단[綵帛]을 내려 주었다.
46.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4월 30일 갑진 1번째기사 / 환왕의 기일이므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중들에게 궐내에서 불경을 읽게 하다
황고(皇考) 환왕(桓王) 의 기신(忌晨)이므로 임금이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중들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경(經)을 외게 하였다. 환왕(桓王) 환조(桓祖).
47.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6월 28일 임인 1번째기사 / 예조 전서 이민도가 종묘, 적전의 제사에 7일간 재계하는 것 등을 규례로 삼도록 청하다
예조 전서(禮曹典書) 이민도(李敏道)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나라를 보유(保有)하는 전례(典禮)는 제사(祭祀)가 큰 것이 되므로, 옛날 사람이 제사지낼 때를 당하면 7일 동안을 재계[戒]하고 3일 동안을 재계[齋]하므로서 천신(天神)이 감동하고 인귀(人鬼)가 흠향하게 되니, 모두 자기로 인하여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제사지낼 때는 조상이 있는 듯이 여기며, 신(神)에게 제사지낼 때는 신이 있는 듯이 여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종묘(宗廟)와 적전(籍田)의 제사에는 반드시 7일 동안을 재계하고, 3일 동안을 재계하여 몸소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시어 뒷세상에 법을 전하고, 만약 유고(有故)하면 세자(世子)로 하여금 이를 섭행(攝行)하게 하소서."
48.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1일 갑진 2번째기사 / 정사를 볼 때에는 계문한 후 평전에 들어오도록 명하다
임금이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일렀다. "날마다 정사를 청단(聽斷)할 때에 대소 신료들이 문득 보평전(報平殿)에 들어와서 보고하니, 매우 행동이 거만하고 무례하다. 이제부터는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여금 문을 파수하여 고찰하게 하고, 계문한 후에야 들어오게 하라."
49.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 익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 성을 시찰하고 수창으로 거둥하다
황증조(皇曾祖) 익왕(翼王) 의 기신(忌晨)이기 때문에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익왕(翼王) 익조(翼祖).
50.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1번째기사 / 수창궁에서 성절을 하례하고 시좌소로 돌아오다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수창궁에서 하례하고는 시좌소(時坐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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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001)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위태로운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본국(本國)002) 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003) 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孽)004) 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