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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인원, 물량, 예산 등 모든 면에서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했다. 대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감독에서부터 엑스트라까지 1만2천 여 명에 이르는 인원을 캐스팅하고 일사불란하게 동원하고 조정하면서 거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마거릿 미첼이 1936년에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었다. 그해 여름에 출간된 이 작품은 그해 12월까지 100만부가 팔렸으며 이 작품으로 그녀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할리우드의 대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은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책이 발간되자마자 5만 달러를 주고 부랴부랴 판권을 구매했다. 그는 이 판권을 구입한 뒤부터 무려 2년에 걸친 캐스팅 작업을 거쳤다. 셀즈닉은 처음부터 남자 주인공인 레트 버틀러 역할에 클라크 게이블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와 계약관계에 있었던 MGM은 쉽사리 게이블을 놓아주지 않았다. 셀즈닉은 하는 수 없이 게리 쿠퍼를 접촉했는데, 그도 계약 문제가 걸려 있었고 무엇보다도 본인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썩 맘에 내켜하지 않았다.
결국 셀즈닉은 장인이었던 MGM 사장 루이스 메이어를 구슬러 125만 달러에 클라크 게이블을 발탁하는데 성공한다. 여자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을 캐스팅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요란을 떨었다. 셀즈닉이 영화의 선전을 위하여 일부로 가창하게 오디션 쇼를 벌였다는 후문이 뒤따랐다. 전국적으로 공개 오디션을 열었고 오디션에 신청한 인원만 무려 1400명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비비안 리, 진 아서, 수잔 헤이워드를 비롯하여 내노라하는 여배우들 31명이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결국 비비안 리가 발탁되었다. 셀즈닉은 일찍이 비비안 리를 점찍어 놓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면서 한편으로는 영국 배우가 미국의 미녀 역을 맡는데 대한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반발을 막아내려고 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1939년 12월15일 애틀랜타의 로스 그랜드 극장에서 첫 공식 시사회가 열렸다. 배우들은 공항부터 극장까지 리무진 퍼레이드를 가졌는데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연도에 몰려나와서 이 행사를 구경했다.
하지만 나중에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는 스칼렛의 몸종 매미 역으로 나왔던 흑인 여배우 헤티 맥대니얼은 불행하게도 백인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조지아주의 법에 따라 시사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클라크 케이블이 이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시사회에 불참을 시사하자 주최측에서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참석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듬해 열린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3개 부문 노미네이트와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사진, 아틀란타 시내에 펼쳐져 있는 남군 부상병들
이 기록은 1959년 〈벤허〉가 11개 부문을 수상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또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상영시간이 가장 긴(221분) 영화이기도 했다, 1962년 상영시간 222분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기록은 깨졌다. 위에서 얘기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헤티 맥대니얼은 최초의 흑인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기록되었다.
II. 비비안 리의 가슴 시린 이야기
"이 배우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면 연기력은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이 배우만큼 연기력이 뛰어나다면 아마 외모는 그 다음 문제가 아니겠는가?" - 『뉴욕타임스』
"그녀는 우아하고 경이롭게 움직이는 무용수 같은 델리케이트한 눈부신 난초다." - 테네시 윌리암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쓴 희곡작가)
이는 아마 할리우드의 배우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배우는 일생동안 이러한 찬사 속에서 살았고 배우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양극성장애라는 조증 증세로 시달리면서 한 평생을 사랑과 이별로 점철된 파란의 삶을 살았다. 이는 바로 배우 비비안 리를 두고 하는 소리다. 그녀는 잉그리드 버그만, 에바 가드너와 함께 1940년대를 풍미했던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 양극성장애
정신이 유쾌하고 흥분된 상태와 우울하고 억제된 상태가 교대로 나타나거나 둘 가운데 한쪽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병으로 조울증이라고도 한다.
비비안은 1913년 11월 5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벵골 다즐링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8살이 되던 1931년부터 부모님의 적극 지원 속에 런던 왕립연극학교에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3살 연상의 변호사 허버트 리 홀먼과 사랑에 빠져 1932년 12월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결혼생활 중에도 배우의 희망에 차있던 비비안의 우상은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였다. 비비안 스스로 ‘올리비에는 내 삶의 등불’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녀는 올리비에를 끔찍이 흠모했다. 그에 대한 존경은 배우가 되겠다는 비비안의 열정에 더욱 불을 지폈다. 결국 비비안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로렌스 올리비에와 사적 모임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사진, 올리비에와 함께
당시 올리비에는 유명 여배우 질 에이몬드와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비비안 역시 딸을 두고 있는 유부녀였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에서 이것들은 전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올리비에 역시 뛰어난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비비안에게 첫눈에 반하게 됐고 결국 영화 <무적함대>에서 같이 공연하면서 둘은 불륜관계로 돌입한다.
올리비에를 만남으로써 비비안은 가정도 버리고 그를 따라 곧장 할리우드로 날아간다. 당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할 배우를 찾기 위해 2년 반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오디션을 진행 중에 있었다. 셀즈닉은 2년 반 동안이나 적격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캐서린 헵번, 조안 크로포드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계속해서 거론됐지만 셀즈닉의 대답은 항상 "NO!"였다. 그렇게 덧없는 시간이 흘러가던 중 셀즈닉은 형 마이론이 한 여성을 오디션 장에 데려온 것을 보았다. 초록빛 고양이 눈에 개미허리의 갸날픈 몸매의, 마치 스칼렛 오하라가 살아나온 듯한 비비안이었다.
마이론은 셀즈닉에게 비비안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스칼렛 오하라를 만나보게나." 25살의 비비안은 이렇게 자신의 배우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된다. 당시 무명 수준의 배우였던 비비안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최종 주인공으로 낙점되자 할리우드에선 이름 없는 영국 배우가 전형적인 ‘남부 출신 미녀’를 연기하게 됐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사진, 영화 <애수>에서 로버트 테일러와...
사실 셀즈닉은 이미 비비안을 점 찍어놓고 영화 홍보를 위해 생쑈를 했다고 뒤에서 쑥덕거렸다. 그러나 셀즈닉의 소신은 확고했고 비비안 역시 자신감에 꽉 차 있었다. 캐스팅 후 비비안에 대해서 긴가민가했던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영화의 개봉과 함께 급반전 된다. 비비안은 그 자체가 스칼렛 오하라였고 신비스러운 매력과 고혹적인 아름다운 외모, 완벽한 연기로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1939년 제1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비안은 당당히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미 예정되었다 할 만큼 언론에서는 "비비안이 여우주연상인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듬해 1940년,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꿋꿋했다. 그들은 배우로서 서로를 존경했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사랑했다. 뜨거운 예술혼과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열정 역시 변함없었다.
비비안은 더 없이 행복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올리비에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나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비비안은 유산을 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이후에도 여러 번 유산을 했다. 비비안은 유산의 충격으로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에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평생을 양극성장애라는 정신 분열증을 앓는다. 그녀는 이후 잦은 감정기복을 공공연하게 노출하면서 영화판에서 함께 작업하기 어려운 배우로 소문이 나게 된다.
한편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우울증이 유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비비안은 끊임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쏟았고 1951년에는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두 번째 아카데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비안은 양극성장애가 심해지고 줄담배와 무리한 촬영으로 인해 결핵까지 걸리게 된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영화와 연극에서도 정신병을 앓는 인물들을 여럿 연기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비비안의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성장애 증상은 결국 올리비에와의 부부 관계도 파탄에 이른다. 그녀는 발작을 시작하면 욕설을 내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올리비에에게 대드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바닥에 쓰러져 울다가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면 매우 부끄러워했다. 이런 증상 때문에 그녀는 정신병원에도 들락날락 했다.
사진, 마릴린 몬로와 함께한 부부
결국 20년 가까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1960년 합의 이혼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올리비에와의 결별은 그녀로서는 인생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올리비에와 비비안은 이혼한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서신을 교환했지만, 이미 예전의 관계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 분열과 착란, 심각한 조울증으로 시달리던 비비안은 1967년 7월 7일 향년 54세로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것은 고양이 한 마리 뿐이었다. 당시 암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죽음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달려왔다.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싸늘한 시신 옆에 주저앉아 "비비안의 죽음은 모두 내 책임이다."라며 흐느꼈다.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올리비에는 비비안이 죽은 뒤에도 22년 동안 더 살았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비비안과 지난날에 함께 했던 사랑을 회상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비비안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것은 세 번째 부인인 플로라이트의 극진한 애정과는 별개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1987년 올리비에의 친구가 올리비에를 찾아갔을 때 그는 TV 속에서 비비안의 영화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고 한다. 비비안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올리비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아는가, 친구? 비비안은 내 사랑이었네....그건 내 인생의 단 하나뿐인 진짜 사랑이었다구."
III. 바다로의 진군과 셔먼 장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북군이 애틀란타 시를 공략할 때 시민들이 “셔먼이 온다!” “셔먼이 온다!”라고 소리들을 지르면서 난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북군의 장군 셔먼은 그야말로 남부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1964년이 되자 그랜트가 지휘하는 북군이 리치먼드에 웅크리고 있는 리 장군의 남군에 총 공세를 펼 때 그랜트 휘하의 셔먼은 조지아로 진격해 남부와 리치먼드 간의 교통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먼저 애틀란타 시의 공략에 나섰다. 조지아 주의 수도인 애틀란타는 남부지역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물산의 집산지였다.
1864년 9월, 셔먼은 4개월의 개고생 끝에 애틀란타를 점령했다. 이후 셔먼은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면서 대서양 연안으로 진군하는 그 유명한 '바다로의 진군(Sherman's March to the Sea)'을 시작했다. 진격하면서 걸림돌이 되는 소규모 남군들을 박살내며 조지아 주를 초토화시키며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에 쾌속으로 도달했다.
셔먼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를 진격하면서 이 지역 역시 철저하게 초토화시켰다. 그는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극도로 엄한 군율을 시행했고 남군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때마다 그는 “만약 주민들이 내 혹독한 처사에 대하여 투덜거린다면 나는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그들이 정 평화가 아쉽다면 먼저 그들 스스로가 전쟁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군하는 도중 거추장스러운 장애물과 철로는 깡그리 파괴했다. 만나는 마을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잿더미를 만들어 셔먼은 남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억으로 남았다.
사진, 셔먼의 진군로(파란색 화살표)
그의 부하들은 이제 약탈의 광인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장롱 속까지 샅샅이 뒤져 값나가는 물건들을 수거했고 부인들의 옷가지들은 고향의 아내들에게 보냈다. 책들도 불태웠고 피아노와 가구들도 철저하게 때려 부수었다. 당시 셔먼군이 진군하는 동안 자기 손으로 양키들을 목매달아 죽였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고 말한 남부 여성들은 부지기수였다.
날씨는 쾌청했고 본대를 따라다니는 군악대는 신바람이 나서 ‘존 브라운의 시신(존 브라운은 굳은 신념을 가진 노예 해방론자였다. 노예들의 반란을 계획하고 병기 창고를 습격하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노예 해방론자들에게 큰 정신적인 자극을 주었다)’을 연주했다. 거침없이 진군하는 병사들은 군악대에 맞추어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를 목이 쉬도록 불러댔다. 흑인들이 길가에 몰려나와 하느님의 전사들이 도착했다고 열광했다.
이렇게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를 초토화시키면서 진격한 셔먼 군대는 리의 군대를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렇게 탄약과 무기, 그리고 식량이 거덜 난 남군은 결국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그랜트의 북군에 항복했다. 셔먼의 이와 같은 인정사정없는 초토화 작전은 남북전쟁을 종결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
윌리엄 테쿰세 셔먼(1820~1891)은 1820년 2월 8일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시에서 성공한 오하이오주 대법원 판사인 찰스 로버트 셔먼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간 이름이 상당히 특이해서 평생 이목을 끌었다. 이는 셔먼의 아버지가 당시 유명했던 인디언 추장처럼 강인해지라고 테쿰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해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다가 소령으로 예편한 뒤 은행 지점장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루이지애나 군사학교의 교장으로 1860년에 부임했다가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북군에 여단장으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빛나기 시작했다.
사진, 북군의 진격
전쟁 초기에는 동부전역에서 활약하다가 1861년 그랜트의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 공략전에서 보급을 맡아 평생 그의 친구가 되었다. 1862년 이후 셔먼은 그랜트 휘하에서 샤일로 전투, 빅스버그 포위전, 채터누가 전투 등 주요 전투들을 치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랜트와 친분을 쌓으면서 그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의 전략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현대전을 정의하는 총력전에서 상대방의 전투수행역량과 의지를 뭉개버리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한 점이다.
전략기동의 달인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맹의 중심지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 노스캐롤라이나를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드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결국 셔먼의 예상대로 이런 초토화 작전에 시달린 남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는 남부 연맹의 수도였던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 근처에서 접전을 벌이던 리와 그랜트의 싸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셔먼은 골초에다 성미가 급하고 말이 많았지만 직관력이 발군이었다. 성격도 얼마나 독특했든지 한때 “셔먼이 미쳤다”는 신문 보도가 나와 직위해제를 당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전쟁은 지옥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총력전을 창안해 현대전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전장을 지옥처 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남부인들은 그에게 북부의 악마, 파괴자 양키 등 온갖 저주가 담긴 별명을 붙였다.
사진, 북군의 초토화 작전
남북전쟁 이후 셔먼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그랜트는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육군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임명했다. 셔먼은 그 후 64세에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남북전쟁에 관한 그의 회고록은 명저로 평가받아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해 거의 평생을 썼고 전쟁 중에도 매일 편지를 쓸 정도로 필력이 상당했다. 은퇴 후 셔먼은 정계 진출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조용히 살다가 은퇴한지 7년이 되던 1891년에 7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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