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0
3월30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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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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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2epzRwgsYA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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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희망합니다!>
예언서 중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꽤나 흥미롭고 특별한 예언서입니다. 작품의 역사적 상황, 사용되는 언어와 문체, 주요 신학 사상 등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는 통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 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을 제2이사야서,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고 요즘 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2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선포 대상자들은 더 이상 유다나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1이사야 예언자와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15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서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가련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남의 나라 땅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 제국이 난다 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힘이나 위대함은 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해방과 재건을 위한 도구로 뽑으셨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해방시켜 위로해주실 것이다. 제2의 출애굽, 새출애굽이 도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온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하루하루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지? 과연 주님께서 계시기나 한건지? 그분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 오래도록 남의 나라 땅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혹시라도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사야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2이사야 예언자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절망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첫 선포 말씀부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야서 40장 1~2절)
특히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선포되는 말씀의 말미 부분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4~15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 ‘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 개의 성문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 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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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0FdZjuGS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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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平安)에 이르는 법: 평화와 안식의 차이>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였습니다. 40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는 하느님의 일이란 이렇게 동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은 안식일의 의미가 사실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담의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여섯째 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일곱째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을 우리말로 한다면 ‘평안’(平安)이 제일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평안은 평화와 안녕, 혹은 안식이 합쳐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도달하려면 먼저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찾았다고 안식에 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일해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조금 다릅니다. ‘평화’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알고는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렇게 하신 분처럼 나도 자녀로서 따라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을 때 가지게 된 것이 ‘평화’입니다. ‘아, 이렇게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구나!’라고 깨닫는 게 평화입니다.
제가 ‘내 어머니는 다리 밑에 계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사랑을 보고는 ‘아, 내 어머니가 저분이 맞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얻었다고 안식에 이른 게 아닙니다. 부모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면 나도 자녀 된 도리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부모처럼 양식을 먹이며 일을 마치고 나서 느끼는 평화가 바로 안식입니다. 받은 것처럼 해줄 때 비로소 부모 앞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세례 때 받은 성령과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도 당신처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후에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처럼 일해서 그분의 자녀라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안식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아이유가 연기한 지안이란 한 상처투성이 젊은 청년의 성장기입니다. 이를 ‘지’(至), 평안 ‘안’(安). 평화도 없던 한 사람이 안식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지안은 살인자입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당하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여자입니다.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란 꼬리표는 여전히 이지안을 따라다닙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인 이광일로부터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립니다. 이광일은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로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지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갑니다. 이력표에 달리기 잘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안이를 박동훈이란 만년 부장이 뽑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줍니다. 힘든 처지에서도 노모를 모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안이는 점점 마음을 열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어갑니다.
박동훈도 후배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박동훈은 아내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아나가야 합니다.
처음에 지안이는 박동훈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박동훈 부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박동훈을 몰아내기 위해 이지안을 이용합니다. 이지안이 박동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지안은 많은 회사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박동훈도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에 받아주었다고 말합니다.
박동훈에게 안 좋은 일을 벌어지게 한 자신을 탓하며 이지안은 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그래도 지안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지안이는 그렇게 평안을 찾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희생을 실천해야 평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인 이광일도 용서합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섭니다. 지안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박동훈은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을 합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만의 대화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사랑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평안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받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에 이르기 전까지 그 평안함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피를 흘리며 나를 낳기 땀을 흘리며 키웠다면, 나도 그렇게 할 때 참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은총에 의해 얻는 것이고 안식은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의 안식은 이렇게 복음 묵상을 나눔으로써 완성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얻은 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다 내어주기 전까지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평화를 거저 받았기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갚아야 안식에 이릅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평화를 누립시다. 그다음엔 그 평화가 안식이 되도록 키워가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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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실상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고 하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으며, 그래서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하므로 그런 면에서 힘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육은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4,41) 하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한다. 즉 아버지께서 심판하시지만,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공경을 받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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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드님의 권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창세기에는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유대교 신학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사상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신다면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즉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인간들을 돌보시고 보살피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심장이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도 인간의 심장은 잠깐 멈추었더라도 다시 뛰게 할 수도 있고, 다시 뛰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단 한 순간이라도 거두시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믿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쉬셨다.’라는 말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신 다음에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당신도 당신의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고 계시니”라는 뜻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일을 멈출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한 5,19-20ㄱ)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0ㄴ-23)
여기서 ‘그보다 더 큰 일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일들’, 즉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심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당연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권능과 권한을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과 예수님을 공경하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나를 공경하여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공경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당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4-26)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가는 중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중단하면, 그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말씀은,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일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안 믿는 이들’로 구분하시지 않고, ‘선을 행한 이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로 구분하십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선을 실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악을 저지른다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루카 12,47) 믿는다고 무조건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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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있는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배려로 홍보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는 공소가 2개 있었습니다. 첫째, 셋째 주일에 가는 공소가 있고, 둘째, 넷째 토요일에 가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공소에도 같이 갈 수 있는지 제안을 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공소에 같이 갔습니다. 본당에서 공소까지는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한 달에 2번 본당 신부님을 만나는 공소 신자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공소회장님은 신자들이 많이 못 나왔다고 미안해하였습니다. 그래도 해설, 독서, 복사는 다 있었습니다. 주일 본당 미사를 마치고 공소로 가는 신부님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2번이나마 미사를 볼 수 있다는 신자들의 갈망을 보았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만나니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2년 전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사목회장이 전화를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으로 갔는데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상황이었고, 홍보를 갈 일도 없었기에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3개월만 도와 드리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한국으로 갔던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쉽게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도 쉽게 끝나지 않아서 계속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한인성당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신문사 운영과 홍보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더 좋은 방안을 찾을 때까지 저의 열정과 신자들의 갈망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신자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서도 좋고, 새로운 사제를 보내 주셔도 좋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갈망을 아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태산이 높아도 하늘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반드시 정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이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탓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산을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산을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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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성을 주장하십니다. 성부와 성자, 두 분이 온전히 일치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일치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일도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순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뜻에 순명해야만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사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앞날을 내다보십니다. 당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운명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사람이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위협이라도 진리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진리만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가?’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니면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친 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연옥의 상태입니다. 또는 ‘하느님을 끝내 거부하며 영원한 절망과 어둠 속에 머무는가?’ 지옥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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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벳자타 연못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해 주신 것을 두고 유다인들이 안식일 법을 들어 시비를 걸자 예수님께서 주신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안식일 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심화시키신 것입니다. 유다의 신학자들도 안식일에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중단된 것으로 보았지만 (이렛날에 쉬셨다: 창세 2,2), 안식일에도 당신의 섭리로 그분의 다스리심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들, 곧 가르치심과 치유의 행동들은 모두 아버지와의 일치를 근거로 합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일치는 순명을 근거로 하고, 이는 또한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다른 종교의 ‘비움’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려는 비움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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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거울처럼 사는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며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주셨지만 그분이 그렇게 사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기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이 놀라운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라 굳게 믿고 있으면 다른 생각은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삶은 이해 안 되는 것뿐이었으니 말입니다.
왜 그렇게 사시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매일을, 매순간을 사람들 사이에서 애를 쓰며 사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말 우리의 삶과는 너무 많이 다릅니다. 그분은 아무나 만나고, 아무나 사랑하고, 아무에게나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잘 지키고 자신을 잘 가꾸고 자신의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잘못을 나무라시고 오히려 우리가 경멸할 만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서슴없이 다가가십니다.
같은 세상을 살고,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어떻게 저렇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은 생각지도 않은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지 의심할 만한 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사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또다시 사람들의 화를 돋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에다 하느님 아들이라고 신을 모독하는 죄를 씌우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진심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당신 삶의 진실을 너무도 진지하게 우리 앞에 풀어 놓으십니다.
그 모든 것의 진실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고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또한 일하실 수밖에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람이 되신 그 아들의 일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속에 앞으로 아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 역시 아버지의 일들을 우리 앞에 내어 놓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아들 역시 그렇게 사랑하노라고 아들은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다른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그래서 거울처럼 아버지를 비춰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이 그치지 않기에 아들의 사랑 또한 그침이 없고 우리는 그 쉴새 없는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구하시려 그처럼 애를 쓰십니다. 그래서 아들 또한 밤 낮 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비추는 아들의 모습. 사랑이란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에게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의 이 독백과 같은 증언이 우리에게 참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분의 거울처럼 세상에 사랑을 내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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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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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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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음과 부활>
요한 5,17-30 (아드님의 권한)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
선을 행한 이들도
악을 저지른 자들도
모두 죽습니다
선을 행한 이들도
악을 저지른 자들도
모두 부활합니다
선을 행한 이들이든
악을 저지른 자들이든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한 이들이든
악을 저지른 자들이든
부활하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선을 행한 이들에게
부활은
기쁨입니다
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부활은
슬픔입니다
선을 행한 이들에게
부활하기 위한 죽음은
기쁨입니다
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부활하기 위한 죽음은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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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_라파엘_신부님
2022.3.30.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마음 둘 자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마더 데레사).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길 기도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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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
못난 얼굴 수술 하는 것보단 못난 마음 수술하는 것이 더 낫다.
못난 얼굴 수술하면 얼굴만 예뻐지지만 못난 마음 수술하면
얼굴은 따라 예뻐지기 때문이다. - 이규경 -
이 사순절에 마음을 수술하여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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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어제 복음(요한 4,43-54 참조)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에 주목합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당신을 계시하시는 ‘표징’입니다.(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눈으로 그 병자의 불쌍한 처지를 살펴보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5,8-9 참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인들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은 커져 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까닭은 그분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5,10 참조)
율법에 따르면 누구도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데(탈출 20,8-10 참조),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관습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으로서 아버지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5,17 참조)
유다인들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시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5,18 참조)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준 카나의 왕실 관리의 모습(어제 복음 참조)과 차이를 보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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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아버지와 아들!>
오늘 복음(요한5,17-30)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어겼고,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5,23)
'우리의 신원'도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고백하시고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말과 행동으로 이를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죽였던 '유다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삼위일체를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이단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아들들이 됩시다!
제3처 :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이 넘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처음엔 잘 짊어지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내며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세상은 다시 일어서는 이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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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 제목에 끌려서 구매한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 동양북스) 보통 말년에는 후회할 일이 더 늘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00세라는 노인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해서 책을 샀습니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구조되었을 때의 몸무게가 28kg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생활을 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에디 제이쿠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용소를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었지요. 그래서 자신도 죽음의 유혹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고,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사람들에게 지금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최고의 무게만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일을 한다고 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특권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특권을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위임받았다고 선언하시며, 동시에 사람들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 있게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 관계에 있으며 꼭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받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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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인 하느님>
-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
한밤중 깨어나 카톡을 확인하니 아름다운 글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매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두편의 시에 매료되어 제 마음에서 정리, 연결해 보았습니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성부께서 그리신 꿈의 바탕위에
성자께서 사랑의 봄꽃으로 생명주시니
우리 모두 꿈과 생명과 그 사랑에 매료되어
매혹의 찬미가로 화답하며
봄비처럼 젖어드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고백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영성적인 민족이라는 일본학자의 글에 고무되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상사를 꿰뚥고 흐르는 영성의 힘이랍니다. 단군신화부터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조선사상사’를 쓴 오구라 기조의 책에 대한 서평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선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영성을 띤다. 이 영성은 지성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영성은 새로운 사상과 함께 거대하게 약동하며 정치사회사적 변혁의 힘을 분출한다. 이때 영성은 기존의 모든 사상을 아우르는 어떤 회통의 정신을 가리킨다. 영성의 눈으로 사상의 차이를 넘어 전체를 꿰뚫어 보고 통합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런 영성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로 신라 원효의 불교 사상과 조선 퇴계의 성리학 사상, 수운 최제우의 동학 사상을 거론한다. 지은이는 이 영성이 21세기 오늘의 한국 사상에까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통찰이 참 통쾌합니다. 이런 영성을 저변으로한 한국이기에 역동적일 수 뿐이 없고 이런 한국의 천주교인들이기에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뿐이 없습니다. 몇 저명 인사의 컬럼에 나오는 글도 인용합니다.
“인간은 불행을 막지는 못하지만 불행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예술(신앙)인 것 같아요.”
“먹고 살기 힘들고, 밤길을 제대로 못 다니고 하지만 법 제도의 변화 말고 다른 식의 싸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면의 강함, 즉 내적 힘이다.”
“유명해지기 보다는 유일해져라. 맞아요.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유일하다는 것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많이들 하는 얘기지만 무난한 글이 가장 안 좋은 글이죠. 그런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유일한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지요. 저도 명심할 일입니다.”
참 좋은 깨달음의 통찰들입니다. 내적 힘의 원천이자 ‘그렇고 그런’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이 아닌 자존감 높은 내 고유의 참나의 유일한 사람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래야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신학교 시절 교수님의 가르침이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추상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 나의 고유한 영성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줍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유배지로부터 해방되어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참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결연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하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본래의 유일한 참내가 되려고 평생 노력할 것이며 이래서 하느님의 중심의 삶을, 평생 하느님 공부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43,4ㄱ)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의 결정적 모범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바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영생을 살아야 할 자리는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도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는 예수님처럼 되시길 소망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허영이요 환상입니다. 참으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구원의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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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gJAogm_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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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 25)
최초에도
사랑이
있었다.
어디에서
이 사랑이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하느님 사랑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의
같은 시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게
펼쳐지는
바로 지금
이때이다.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이 다시
살게 하시는
하느님
은총의 때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
사랑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지난날들도
사랑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날들도
가장 좋은
사랑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사랑의
때이다.
사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예상치 못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가장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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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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