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시골 고향에 살 때이다. 우리 머슴이 잘난 체를 자주 하는데 한번은 서울에 있는 남대문 간판에는 한문으로 남대문이라고 써 있다고 우겼다 그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가서 봤다고 했다. 긴가민가 해도 봤다는데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서울 가서 남대문을 보고 온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말을 안했다. 그는 또 제주도를 기차를 타고 간다고 우겨 댔다. 사람들은 긴가 민가 하면서 미심쩍어 하다가 말싸움이 되었다. 중학생이었던 내게로 질문이 던져졌다 나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답답했지만 우리 머슴의 편을 들어 주기로 하고 기차를 타고 가게 된 지가 얼마 안되었다고 대답을 했다. 한 술 더 떠서 수학여행을 기차 타고 제주도로 갔다 왔다고 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일단락 되었다. 갔다 왔다, 내가 보았다. 이 말에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정보의 85%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봤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는 내가 보았다는 형제들의 말을 듣고도 내가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답을 한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 죽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리라 현대의 신앙에서도 내가 이해되는 것만 믿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불신하거나 이해가 될 때까지 보류하는 경향이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데 어디를 가는지 몰라도 그 길이 즐겁고 신나는 것처럼 부모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계시(啓示 revelation) 라는 것이다. 신이 스스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생과 사의 영역을 주관자인 신이 직접 보여주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