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의 가을은 한국보다 조금 더 더디게 온다.
10월 말쯤 되면서부터 나뭇잎들 색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단풍나무나 은행나무가 흔치 않아 한국과 같은 선명한 가을 정취를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울긋불긋 변해가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휴스턴과 달라스를 오가는 길은 새 풀이 돋아나는 봄만큼이나 정겹다.
미국에 온 이래 여러 가지 이유로 달라스와 휴스턴을 오가야 할 일이 참으로 많았다. 한 달에 최소 3번 정도 거의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그렇게 해왔었다. 더러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오가는 왕복 9시간의 여정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향유할 수 있기에 나로서는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그 오가는 길에 늘 애용해왔던 길은 45번 고속도로였다. 저 멀리 툭 터진 지평선이 보이기도 하고, 때론 끝없이 펼쳐진 숲도 보이고, 그러다가 넓은 초원이 보이면 소나 말 목장인 45번 고속도로.
오래 그 길을 오가다 보니 슬슬 싫증이 나서 다른 길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새길, 75번 도로.
45번 도로는 주와 주를 이으며 연결된 고속도로이고, 75번 도로는 텍사스 주만의 지방도로인데, 서로 인접한 그 두 도로가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45번 도로는 직선적인데 75번 도로는 곡선적이고, 45번 도로는 평탄한 편인데 75번8 도로는 굴곡도 좀 있고, 45번 도로는 차들로 붐비는데, 75번 도로는 도로를 전세 낸 듯 조용하다.
한마디로 45번 도로가 남성적이라면 75번 도로는 여성적이다.
새로 맛을 들인 75번 도로는 그 다양한 굴곡과 곡선에 미국의 서정적 풍경들을 듬뿍 담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숲인가 하면 개천이 나오고, 푸른 초원 위에 예쁜 집 한 채가 보이면 그 초원에서 풀 뜯어먹고 있는 소와 말들이 보이고, 수수밭인가 싶으면 다시 숲이 나오고, 길은 무료할 틈 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나는 그 75번 도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조용한 길을 달리다가 옛일 하나가 떠올랐다.
방학 중에 연로하신 외할머니를 뵈러 외가가 있던 약목을 다녀오던 길, 외가 앞을 지나가는 완행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왜관에 도착하자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이 내리더니 고속도로를 이용해 대구까지 가는 직행버스로 갈아탔다. 난 어릴 때부터 외가를 다니던 그 국도길을 추억도 되살리며 가볼 요량으로 혼자 그 완행버스에 남게 되었는데, 나 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안내양이 다가와 물었다.
"왜 버스 안 갈아타요?"
"그냥 이 버스 타고 갈려고요."
안내양은 내 대답을 듣고 뭔가 알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다시 말했다.
"요금 더 안 받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다가 문득 알아차리고는,
"아... 그게 아니고 그냥 국도로 가고 싶어서요."
안내양은 내 말이 또 이해가 안 되었던지,
"이 버스는 20분 더 있다가 출발하고, 직행은 지금 출발하는데... 빨리 도착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일일이 내 기분을 설명해줄 수도 없고, 그냥 말을 흐리고 말았다.
결국 버스엔 아무도 타지 않았고, 대구로 가는 그 버스엔 기사 아저씨와 안내양, 나 셋밖에 없었다. 못내 내 의중이 궁금했던 안내양은 내 옆에 앉아 이 말 저 말 붙여왔고, 호젓하게 옛길 추억에 잠겨보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동무가 된 그녀로부터 그녀의 고생하는 엄마 이야기, 공부 잘하는 오빠와 동생들 이야기, 술주정 심한 아버지 이야기를 듣던 40년 전쯤의 어떤 날이, 시간은 조금 더 걸려도 훨씬 정취 있는 길을 달리다 보니 생각이 났다.
곧바로 난 길보다 돌아가는 길을 더 좋아하는 나는, 75번 도로를 알고 난 뒤부터 정말 바삐 가야 할 때가 아니면 철마다 아기자기한 풍경들로 지루할 틈 없이 나를 반겨주는 75번 도로를 달리는 맛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지금 와 돌아보니 삶도 곧은길로 똑바르게 사는 것도 좋지만, 더러 더디 가더라도 구불구불 돌아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을 겪으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이방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콩꽃님이 가장 반기실겁니다
미국 게시는군요
이방에도 미국 계시는 분이 몇분 됩니다
첫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단풍들것네님의 멋진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필방에서 자주 뵙겠습니다.
마음자리님, 안녕하세요
무지하게 반갑습니다.
저 역시 님이 좋아하는 75번 국도가 좋거던요.
젊은 시절, 아이들 데리고
국내 여행이라도 갈려치면
국도를 많이 애용했습니다.
이유는?
마음자리님과 같이 여기저기 가까이서 보는 풍경도 좋고,
떠밀리지 않고 속도조절을 내 마음에 맞춰서 할 수 있으니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아름문학응모가 끝나면 어느 곳에 어울려 지낼까 찾던 중에 콩꽃님이 자리 펴주시고 계신 수필수상방이 좋을 것 같아 인사 겸해 글 올렸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정성 기울이겠습니다.
마음자리 님 어서 오세요, 모두들 아름문학상으로 몰리는 바람에 수필방에는
글이 많지 않았습니다.마음자리님의 좋은 글을 수필방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특히 정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길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시간이 다소 더 걸리더라도 호젓한 외곽을 택할 때가 있는데요,
고속도로는 줄곧 앞만 보고 달려야 되지만 국도나 지방도는 숲과 농지, 또는 호수를 끼고 달리는
재미가 있어서 운전하는 재미가 각별하지요.
땅이 좁은 여기서도 그런데 광대한 면적의 텍사스에서는 얼마나 시원할까요.
사진에서 보는 저 길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힐링이 되겠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누군가 저를 찾아오면 꼭 저길로 같이 달리며 소개해주고 싶은 길입니다.
화암님의 아름다운 글들을 늘 감탄하며 읽곤 했습니다.
수필수상방에 계신 분들의 글 수준이 높아 어울리기 조심스럽지만 부족한 부분을 정성으로 메우며 앞으로 자주 찾겠습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텍사스에서의 생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피아니스트 임윤찬 앓이를 하는 중이라
반 클라이번 콩쿨이 열렸던 텍사스라는 단어까지도
친근함으로 다가오네요..
곧은 길 보다 구불구불 가는 길이 인생의 여정을
음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임윤찬군의 콩쿨 영상을 여러번 돌려 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곳 아주 가까운 곳에서 콩쿨이 열렸더군요. 음악에 문외한이라 콩쿨이 열린 줄도 몰랐는데 뉴스를 보고 궁금해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아주 감동받고 여러번 돌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찬군의 스승과 잠시지만 공연장 가까이 하숙했던 집 주인과의 인연도 뒷이야기로 들으며...저도 임윤찬군에게 빠져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너무 자주보던 고속도로 보다는 국도가 생소하고 볼게 더 많습디다
수필수상방 입문을 축하합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립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즐겨 찾겠습니다.
저는 늘 5번 고속도로를 이용합니다 .
가끔은 91, 55, 57 번.. 가뭄에 콩나듯이
이용하지만 그다지 운치 있는 정경은 없습니다
예전에 북 캘리포니아 갈때 46번 도로를 운전했는데
아마 그쪽 45 도로와는 별개 일것 같습니다 .
수필방에서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
저도 예전에 버스안에서 생긴 일을
글로 써 올린적이 있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