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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년~1931년)
미국 오하이오 주 출신의 사업가이며 제너럴 일렉트릭의 초대 회장. 그리고 가장 성공한 근성가이 중 한 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근대사회에 관련된 물품으로 한정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제품을 개발해 내놓았으며 그 숫자만 해도 자그마치 2,332개에 이른다. 그 업적을 기려서 보통 발명왕 에디슨이라 불린다. 다만 실제 에디슨이 뭔가를 처음으로 발명해낸 것은 많지 않다. 이런 측면 때문에 남이 개발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했던 여러 발명품들을 모두가 쓸 수 있도록 실용화·상용화시킨 사업가라고 단정짓는 사람들도 많지만 문제가 많았던 기존의 시판품을 뜯어 고쳐 실용화시킨 것 또한 발명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뛰어난 발명가라는 말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은 전기와 관계된 것들이다, 예컨대 전구라든가. 그래서인지 전기, 특히 직류전기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니콜라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제작한 전기 의자는 그의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남으며 현재에 와서도 에디슨의 오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그가 역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 에디슨이 최초로 만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전구 또한 기존의 전구를 '개량'했지, 전구라는 물건을 발명하지 않았다. 에디슨의 '발명품'의 절반 이상이 개량품이며 에디슨이 남의 발명품을 상용화하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발명왕'이라고 칭송을 듣는 이유는 바로 원시적이고 조잡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것들을 일상생활에 사용가능, 판매가능할 정도로 개량했기 때문에 '발명왕'이라고 불린다고 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 시절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 하는 등 이런저런 기행을 많이 하여, 당시 앞뒤가 꽉막힌 초등학교 선생은 이러한 에디슨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3개월때 퇴학시켰다.
그러자 에디슨의 어머니가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 에디슨에게 온갖 지식들을 가르쳤다. 에디슨의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뭔가 알아내기 위한 시도를 엄청나게 하고 다니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에디슨의 실험정신이 훗날 에디슨을 세계 최고의 발명왕 위치에 도달하게 해 주었다. 특히 결론을 얻을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는 에디슨 특유의 집념은 높이 살 만하며 이러한 점에서 에디슨의 근성가이 기질은 이때부터 이미 싹수를 보였다고 봐야 할 듯.
소년 시절에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는 기차에서 실험하다 폭발하는 바람에 차장에게 귀 등을 얻어맞아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전설처럼 퍼졌으며 지금도 위인전에 때때로 등장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 폭발 자체로 인해서 청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이 있다. 다르게는 어릴 때 열병을 심하게 앓고난 후 청각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디슨 자신이 설명하기로는 신문을 팔다가 타야 할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다급하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차장이 다급하게 에디슨을 잡아당겨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하필 귀를 잡았기 때문에 귀 근육이 크게 파손되고 이후로 그 귀는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차장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에디슨에게 친절했으며 에디슨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차장과는 종종 서로 방문하며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년시절 자신의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어 판 이야기도 유명하다.
위인전에서는 유독 어릴 때 심하게 얻어맞는 인물, 걸핏하면 실험하다 말아먹어서 참교육 당하는 어린시절로 묘사된다. 자퇴하기 전엔 교사에게 매맞고,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는 친구에게 공중에 뜨게 해주겠다며 인체실험까지 했다가 부모에게 들통나 종아리에 매를 맞고, 기차에서 실험하다 역장에게 뺨까지 맞게 된다. 탐구심이 왕성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 당시 부모와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민폐투성이 악동이었다고.
3. 사업가로서
청년시절 그가 특허를 내려 했던 전기식 투표장치는 소모적인 의회의 투표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원래 모든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는 빠른 의사결정보다는 소수당의 의사방해 같은 지루한 투쟁과 타협의 과정을 더 우선시하는 터라 그 기계는 환영받지 못했다.
자신의 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에디슨은 그 이후 세상에 필요한 발명을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게 된다. 에디슨은 본인이 신제품을 만드는 발명이 아니라 사업자로서 기존 남이 개발한 발명품을 쓸만하게 개선하여 상용화하고 보급하는데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발명품으로는 축음기(전축), 영사기(영화), 실용적 장거리 전화, 전구, 전기 냉장고 등이 있다.
1892년 에디슨은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그것을 볼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해서 활동사진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최초의 영화의 타이틀은 촬영기와 영사기를 이용한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에디슨도 여러 사람이 모여 화면을 볼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영화 사업을 하면서 1908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10여개 영화사를 묶어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독점력을 무기로 영화 길이도 자기 마음대로 길어지지 않게 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여기에 반발한 영화인들은 에디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부의 한 깡촌에 자리잡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깡촌의 지명이 바로 할리우드. 오늘날 미국 영화 산업에 에디슨이 크나큰 영향을 준 셈이다.
그 공로로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당시 에디슨이 투자하던 것은 짧은 단막극 형식, 니켈로디언에 올리는 간단하고 짧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주류는 유럽이었고 유럽에서 서사가 있는 장편의 영화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서사가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서부영화가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도 서부영화 로케이션을 위해 찾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건립할 쯤에는 MPPC의 영향력은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MPPC는 훗날 미국 법원으로부터 해산 판결을 받게 된다.
다만 씁쓸한 점이라면 에디슨은 최초로 영화 불법 공유를 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 세계 여행》의 필름을 유럽에서 빼돌려 미국에서 복사 후 전국에서 상영해 큰 돈을 벌었던 것. 에디슨은 라이선스 따위는 무시하고는 자기가 멜리에스의 필름을 쓱싹하고선 입씻어버려서 멜리에스는 미국에 영화를 팔지 못해 큰 피해를 보아야 했다. 당시엔 발명품들이야 특허로 저작권을 인정하는 세상이었으나 영화 같은 미디어물에는 저작권이 미비하던 시절이었고 이 때문에 영화 제작의 선구자들은 제대로 된 이익을 얻기 힘들었다. 《달 세계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요소들이 처음으로 시도된 대작으로 상업적으로는 오늘날의 블록버스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조가 최초의 영화 복돌이를 탄생시킨 것.
3.1. 전구 발명 X → 전구 상업화 O
에디슨을 유명하게 만든 물건으로 에디슨 전구가 있다. 하지만 알려진 거랑 달리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백열전구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바로 스코틀랜드 발명가, 천문학자, 철학자인 제임스 보우먼 린제이(James Bowman Lindsay,1799~1862)가 1835년 발명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개량했지만 수명이 너무 짧고 열이 엄청 심하다든지 여러 단점으로 끝내 상품화하지 못했고 1860년에 영국 화학자인 조셉 조지프 스완 경(Sir Joseph Wilson Swan, 1828 ~ 1914)이 더 발전된 걸 개발했다. 1875년 여러 번에 걸쳐 개량한 백열등을 만든 스완은 특허를 신청했다.
'오히려 에디슨은 바로 이 스완의 아이디어를 슬쩍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놓고 에디슨은 오히려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했다가 패배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그러나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만한 전구를 발명한 것은 사실이다. 밝기도 적당하고 오래 가는 전구를 개발한 것은 에디슨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판에서 패배한 후에 에디슨은 스완이 관련 특허까지 신청한 사실을 알게 되자 스완에게 거금을 주고는 합작회사를 차려 특허권 문제를 제거했다.
그래서 에디슨은 스완과 합작으로 수익을 나누며 Edison & Swan United Electric Light Company, 줄여서 'Ediswan 에디스완이란 업체를 만들어 백열 전구를 팔았다. 그래놓고 에디슨은 몇 년 후 '저항력이 강한 탄소 필라멘트'는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 주장하며 소송을 다시 내 승리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스완이 이미 개발한 것을 약간 개선한 것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는 에디슨이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실험일지의 해당 부분을 찢어버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전 글에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무수한 반복실험을 해서 성공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에디슨만 한 게 아니다. 린제이만 해도 10년동안 150번 넘게 여러 재료를 쓰며 필라멘트를 새롭게 개량하며 실험했으나 그렇게 실패한 거였고 스완 또한 15년 동안 수백여번 실험을 했듯이 반복실험은 에디슨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둘의 엄청난 실험과 실패 경험이 에디슨에게 더 좋은 경험(그 재료가 안 좋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이 되게한 셈임에도 마치 에디슨만 전구를 발명하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여하튼 에디슨이 전구를 개량할 때는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실험해보았고 심지어는 발명팀 크루에슬리의 구레나룻과 매켄지의 붉은 수염까지 뽑아서 실험해보았다 한다. 매켄지의 수염은 상당히 오래 갔다고 한다. 불빛이 너무 흐려서 상용화하진 못했지만... 태워서 탄화된 무명실이란 말도 있다. 사실 양산형 최초는 무명실이고 그 후 널리 대나무를 이용하여 실험에 도전했다.
전구로 에디슨은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국 국내 최초의 전기는 고종이 경복궁에 설치한 전구인데 이것은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구입했다. 우리 측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는 에디슨을 의대손(宜代孫)이라 적었다고 한다. 에디슨 본인은 동양의 궁궐에 자신의 전구가 달린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뻐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1886년 당시는 에디슨 회사가 전기 사업을 시작한지 만 7년째였을 뿐이었고 조선에서는 전기 시설 설비와 운영 권한에 전권을 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구에 들어가는 전기를 생산한 발전기의 냉각수를 궁궐 연못에서 끌어써서 죄 없는 물고기들만 떼죽음 당해 조선 민심이 흉흉해졌고, 에디슨이 직접 선발해 파견한 책임자 윌리엄 맥케이(조선명 : 맥계, 麥溪)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 전등소 사업은 단발성에 그쳤다. 조선에 다시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조선 정부가 나중에 영국인 퍼비가 포사이스를 새로 고용한 뒤의 일.
에디슨 전등의 매력에 빠진 JP모건이 전등의 경제적 가치를 감지하고 에디슨에게 투자를 해서 미국에 전등과 발전소가 퍼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JP모건과 밴더빌트 등의 극소수 최상류층만 전등을 사용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전등의 확산은 당시 등유로 부를 축적한 록펠러에게 위기감을 줬다. 에디슨의 정말로 대단한 업적은 에디슨 전광회사를 세워 미국 가정에 전기를 연결한 것이기도 하다. 전구를 개발해봤자 집에 전기가 없으면 말짱 헛것이니까. 그러다가 전기사업에서 희대의 숙적이 등장한다.
헨리 포드와도 연관이 있는데, 포드는 에디슨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가솔린을 이용한 차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에디슨은 포드를 격려했고 이 일을 계기로 포드 자동차를 세우고 포드 모델T를 출시한다. 하지만 에디슨은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에디슨은 전기가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기자동차 개발에 치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창기엔 전기자동차가 대세였다. 에디슨은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쓰기 위해 니켈-철 전지(에디슨 전지)를 개발하고 이 전지를 쓰는 자동차도 개발했는데, 에디슨 전지는 당시의 납축전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더 높고 충전 시간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비싸고 낮은 온도에서는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에디슨의 전기자동차는 생산된 지 몇 년 만에 단종되었다.
3.2. 니콜라 테슬라와의 갈등과 악의적 선전
테슬라가 에디슨과 여러 모로 대립한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해 에디슨이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제작하는 등 진흙탕 싸움이 어느 정도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둘의 갈등에는 부풀려진 면도 적지 않다.
에디슨과 테슬라 이 둘은 동시대의 발명가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전시킨 직류(DC)를 최고라 생각했지만 테슬라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교류(AC)를 발전시켰고 이 때문에 에디슨은 AC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 교류 전기를 이용하여 사람을 사형시키는 기계인 전기의자를 제작해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코끼리 한마리를 교류 방식을 이용해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후 테슬라와 그가 세운 회사가 자신의 직류전원에 대항하는 교류전원을 발명하자 그와 그 회사를 비즈니스로 묻어버리려 했으나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그를 받아들인 덕에 실패했다. "뒷공작으로 테슬라를 몰락시키기 위해 마피아들과 결탁했고 테슬라의 회사를 망하게 할 악의적인 물건을 발명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전기의자를 만들기 위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동물들을 싹쓸이했다"는 말도 나돌았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그러나,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정작 몇몇 갈등 이후 에디슨과 테슬라는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연락하고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AC(교류전기)와 DC(직류전기)간의 전류전쟁은 에디슨과 테슬라간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에디슨과 나중에 테슬라로부터 AC 송전의 특허를 사들인 조지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대립에 가깝다.
1890년대에는 X선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에디슨이 사용한 표현을 보면 절대로 숙적한테 보낸 편지가 아니다.
"My dear Tesla, Many thanks for your letter. I hope you are progressing and will give us something that will beat Roentgen."
"친애하는 테슬라, 자네의 편지는 잘 받았네. 나는 자네의 발명이 잘 진행되어 우리에게 뢴트겐의 업적을 이길만한 것을 주었으면 하네."
또한 1896년 Electrical Review 5월호에 올라온 비평에 에디슨은 테슬라를 인정하는 답변까지 남겼다.
나에 대해 뭐라하든 상관없으나 테슬라는 신경질적 기질이니 이런 기사는 그를 비통하게 만들고 일을 방해할 것이다. 테슬라가 불가능해 보이는 낙관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실험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시간만 주면 테슬라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테슬라 측에서 에디슨을 그나마 비판한 건 에디슨의 실험 방식이 반복실험과 시행착오가 지나치게 많은 등 "한 결과를 내기까지 삽질이 잦았다"는 것이다. 전류전쟁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테슬라의 어그로를 가장 많이 끈건 웨스팅하우스와 진정한 승리자인 JP모건이었을 것이다. 즉, 에디슨과 테슬라의 라이벌 관계는 흥미를 위해 과장된 면이 많으며 어느 정도는 걸러 듣는 것이 좋다.
오늘날은 교류가 전력을 수송하는데 우수하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에 주로 사용되고, 직류는 철도, 건전지나 알루미늄 생산같은 전기화학 공정에 쓰인다. 그 외 컴퓨터나 TV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용 전자기기도 교류를 직류로 먼저 전환해야 사용이 가능하다. 테슬라가 전기 시대의 아버지라면 에디슨은 전자(電子) 시대의 아버지인 셈.
그 외에도 에디슨의 발명은 태반이 산업스파이에 의한 것이고 창작은 거의 전무하다는 소문도 존재하며 그 외에도 악명은 매우 많다. 스스로도 "다른 발명가의 아이디어를 참고하는 것이 발명의 첩경이다" 라는 자조적인 말을 남을 정도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7~80년대 위인전에서 에디슨을 많이 띄워주다 보니 엄청나게 대인배같이 표현하고 좋은 사람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 당시 몇몇 위인전이나 과학만화에서는 토머스 에디슨을 그저 순수하고 착한 발명왕으로, 반면으로 니콜라 테슬라에 대해선 에디슨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온갖 더러운 중상모략을 꾸민 비열한 악역이자 희대의 찌질이로 왜곡하여 표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좀 부정적인 면이 누그러진 위인전에서도 테슬라는 에디슨의 라이벌이지만 에디슨보단 못하거나 열폭하고 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에디슨을 노력의 천재이자 발명의 신으로, 테슬라는 그런 에디슨을 시기한 인간쓰레기로 표현했고 한동안 그런 사실로 그 시대 학생들에게 각인된 셈. 당연히 이건 고인드립이다. 오히려 에디슨과의 대립 이후 특허 관련으로 엄청난 불이익과 피해를 본건 테슬라 측이 컸다. 이는 마치 살리에리가 모짜르트에게 열폭하고 질투한 나머지 모짜르트를 중상모략하거나 죽였다고 하는 왜곡이나 마찬가지다. 뭐 그래도 그 시절에도 가끔은 에디슨이 이중적인 면도 있다고 까는 게 위인전으로 나오곤 했다. 1980년 초반에 나온 삼성당 서적의 만화 위인전에서는 에디슨은 "형편없는 대우를 하고도 조수들을 억지로 붙잡아 실험을 돕게하여 조수들에게 교도소장이라는 비난적인 별명으로 불리었다."라는 서술이 나왔다. 이것은 실제로 에디슨이 벌인 짓이었다.
물론 다행히도 지금에 와서는 테슬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테슬라도 파란만장한 삶의 천재 학자로 위인전에서 그려진다. 그리고 최근 들어선 에디슨도 긍정적인 업적과 지금까지 알려진 발명 업적은 있는 그대로 설명하되, 재평가되는 여러 단점 또한 위인전이나 과학책 등에 실리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위인전이나 과학 매체에서 에디슨이야말로 될 때까지 노력하는 근성가이의 모습과 더불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잔인한 측면도 지닌 양면적인 천재로 표현된다. 즉, 장점과 단점이 너무도 명확한 천재로 그려지고 있는 셈.
3.3. 그래도 인정받는 업적
재평가 유행에 따라 에디슨이 많이 까이고 있고, 비판할 점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에 대한 오해와 현대시점의 렌즈를 사용한 평가로 인해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에디슨이 최초의 전구를 발명하지 않은건 사실이나, 에디슨이 실용화가 가능한 전구를 개발한 것에 대해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도 조지프 스완을 포함해 전구 개발에 힘쓴 많은 발명가들은 에디슨의 기발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개발해 왔지만 뭔가 시원치 않던 전구를 더욱 밝고 오래 켜지도록 개량하고 실용화시킨 업적 덕분이다. 괜히 그에게 "먼로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즉, 에디슨이 전구에 업적을 남긴 것은 전구를 첫 발명한 것이 아니며, 전구를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개량하고 상용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사와 유통시스템까지 정립했다는 점이다. 즉, 종합하자면 현대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을 닦은 것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기계나 물건은 절대로 한 사람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타인이나 전세대가 발달시킨 이론이나 아이디어, 기존의 발명품에 자신의 지식과 노력을 접목시키는 과정이 거듭되어 탄생하는 것이다. 테슬라의 AC도 마이클 패러데이가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폴리트 픽시가 실제로 교류 발전기를 만들었다. 테슬라가 AC를 더욱 실용적으로 발전시킨 건 사실이지만, 상용화시킨건 웨스팅하우스다. 혁신이란 것은 결국 사회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니 테슬라든 에디슨이든 최초가 아니고 타인의 업적을 참고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
에디슨이 자신의 직원들이 이룬 것에 자신의 이름만 걸고 특허를 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많은데, 에디슨이라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분명하게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고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 절대로 날로 먹지 않았다. 한창 당했다는 직원들은 에디슨 사후에도 그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으니, 에디슨을 단순히 냉혈적인 사업가라고 일축하기는 힘들다. 그 이미지에 반하는 또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에디슨이 X선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 때, 당시 방사능에 대한 무지로 인해 X선 실험을 담당하고 있었던 클라렌스 달리와 함께 엄청난 피폭을 당했다. 달리는 결국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에디슨은 불구가 된 달리에게 필요한 돈을 모두 지불했고, 과부가 된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해줬다. 이게 20세기 초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노동자 배상금 따위는 없었던 당시 책임이 없다며 달리를 길로 내쫓았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이 실험 덕분에 X선을 사용하는 형광투시경이 상용화되지만 에디슨은 더 이상의 X선 연구를 포기했고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로 남겼다.
알쓸신잡에서 에디슨빠를 자처한 정재승이 이점에 대해 옹호했는데, 애초에 당시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나 보상이 희박했으며, 특허권에 대한 대기업들의 침해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개인 개발자나 중소업체의 특허를 맘대로 침해하고 복제품을 내놓고는 소송이 걸리면 자본을 앞세워 시간을 장기간 끌어가며 결국 원 특허권자가 재산만 날리고 특허는 포기하게 만드는 일도 흔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에디슨은 직원들의 특허를 회사의 이름으로 낸뒤 직원에게는 해당 특허개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고, 해당 특허를 다른 기업이 침해할경우 회사차원에서 상대하는 식으로 특허를 보호한거라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대기업들도 애용하는 방식이다.
결론은 에디슨을 이익에 눈이 먼 악의 축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여느 발명가나 사업가처럼 선과 악의 양면적인 기질을 모두 갖춘 한 인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4. 말년
그 밖에도 탄광업 및 시멘트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죄다 말아먹었다. 에디슨 전광회사도 결국은 말아먹고 슈타인메츠라는 기업가에게 넘겨야 했다. 이후 몇 차례의 분열과 재합병을 거쳐 유명한 그룹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 사가 되었다.
말년에는 자기 나름대로 영혼과 영계에 심취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발명품들을 몇 가지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 남아있지는 않다. 이때 발명했다고 하는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영계통신기. 하지만 사실은 이마저도 에디슨이 만우절을 맞이해서 어수룩한 대중잡지 기자한테 구라를 깐 거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다만 아서 코난 도일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명인사 중에서 오컬트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았고 그 중에 상당수가 사회고위층 내지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에디슨이 오컬트에 빠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숨을 거두기 직전의 마지막 호흡을 친구였던 헨리 포드가 유리관에 담아놓았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5. 가족관계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썼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마누라를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모조리 공과대학으로만 보냈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사망했을 때,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2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러포즈했다는 다소 아슷흐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두 번째 부인은 첫 부인보다 성격이 더 드셌는데, 에디슨이 발명한답시고 연구실에만 붙어 있자 밥을 싸들고 찾아가서 다 먹기 전까지는 발명이고 뭐고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장남 토머스 에디슨 주니어(1876~1935)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다. 게다가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아버지인 에디슨 본인이 직접 고발을 했는데, 더이상 아버지 이름으로 사기를 못치도록 명예훼손을 이유로 개명을 요구했고, 법원에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토머스 에디슨 주니어는 토머스 윌러드로 개명한다. 물론 윌러드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이름을 바꾼 대가로 월 50달러의 용돈을 요구했고, 변함없이 막장 생활을 보내게 된다. 분노한 에디슨은 아예 무시하며 외면했다. 월러드는 아버지가 돈 안준다면서 고소하고 그랬다가 패소하고 사기 피해자들에게 시달리는 등 막장으로 살다가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유산 분배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에디슨은 남에게 뭘 주냐고 무시했다. 결국 에디슨이 죽고 4년 뒤인 1935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차남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아서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 이게 뭐가 문제냐면, 당시 물가로 40달러는 현재 화폐가치로 9,000달러 가까이 되는 돈이다(...). 이러니 에디슨도 편지만 받으면 찢어버리고 무시했으며 답장으로 더 이상 그러면 10달러도 안 줄테니 닥치라고 분노했다. 기묘하게도 윌리엄도 1937년 59세를 채우지 못하고 형과 같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윌리엄의 아내는 에디슨 사후에 고생하다가 194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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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찰스 에디슨(1890~1969)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막내 시어도어 밀러 에디슨(1898~1992)이 발명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200가지가 넘는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100여가지 특허를 냈으며 사업가로서 그럭저럭 운영도 잘 했다. 1987년 에디슨 탄생 140주년 행사때 인터뷰도 했는데 그도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 추억이 없다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6. 기타
세계 최대의 에디슨 박물관은 의외로 국내에 있다. 강릉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 그곳인데, 축음기와 악기 박물관이 명목이나 실상은 주 전시 품목인 축음기의 발명가인 에디슨과 그의 발명품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에디슨 전기자동차도 있다! 모아 둔 유물이 너무 많아 창고에 있는 것을 돌려가며 전시한다고 한다. 전시 에디슨 유물들 중에는 친필 편지 등 미국에도 없는 것이 꽤 된다. 내용물이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고, 일정 기간엔 체험 교육도 운영하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볼만하다. 직접 관장이 나와서 설명을 해 주기도 하고, 관람객과 같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한다. 구내 기념품 매점에서는 꽤 두툼하고 내용이 좋은 박물관 도록을 팔고 있는데, 부탁하면 관장이 사인도 해 준다. 다만 위의 전해지는 순탄치 않은 가정사, 사업가로서 비열하고 냉혹하던 면모나 애증관계였던 테슬라 등 여러 이야기에 있어선 함구하거나 노 코멘트하고 에디슨을 상당히 미화하고 있다는 건 에디슨 빠인 관장의 취향이므로 우선 업적과 부풀려진 면을 구분하여 걸러가며 관람할 필요가 있다.
말년에 자기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오하이오 주 밀란의 옛 집을 찾았는데 그 집이 아직도 전등 없이 가스등을 켜고 있는 걸 보자 뒷목 잡고 쓰러졌다는 얘기가 있다.
정치적 성향을 이야기하면 평생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191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을 지지했고 1차대전 무렵에는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을 지지했다.
최초로 키스씬을 영상으로 담았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이 말은 1929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며 1932년 하퍼스 매거진에 원래 올라온 이 문장의 전문은 "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 I see a worthwhile need to be met and I make trial after trial until it comes. What it boils down to is one per 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 cent perspiration(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애쓸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이뤄질 때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 땀이다)"이다.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노력만 찬양하는 말은 아니었고 그에 대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다. 실제 inspiration의 뜻은 영감이지만 문맥상 에디슨은 해당 단어를 영감과 일맥상통하는 동기, 계기의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에디슨이 말하고자 했던 결론은 "가치가 있는 일에, 즉 정확한 동기나 목표, 지향점에 큰 노력을 기울여라"는 뜻. 무작정 노력만 하면 그게 바로 뻘짓이 된다. 결론은 노력과 영감 둘 다 중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다른 이들이 아는 바와 같이 영감이 없으면 노력도 필요없다는 식의 곡해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으니 정정해주도록 하자.
어린이 대상으로 한 위인전에서도 위 말이 나왔는데 영감이라는 말의 어감이 어려운지, '1%의 영감'이 아니라 '1%의 재능'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위와 비교해서 너무 동떨어진 번역이니 이렇게 알고 있는 자녀나 조카들에게 정정해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