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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측 주장에 대한 해명과 답변
2008. 9. 21
귀 교단의 교수회에서 보내주신 연구 자료를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귀 교단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받아들이는 보수교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교리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교리들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진리 아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전통적인 교리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해석하여 추출한 것으로서 진리성을 가지고 있되 그것들은 언제나 이전보다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성경 해석에 의해 보다 성경 그 자체의 진리성에 더 가깝도록 구조적으로 정립될 이유가 있는 줄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귀 교단 교수회가 보내온 내용은 박용기 목사의 복음적 사상에 대한 오해를 포함하고 있으며 저희 교단이 받아들이고 있는 성경 해석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하에서 그 이유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1. 죄의 기원과 예정에 대한 문제점
귀 교수회에서는 박용기 목사의 죄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 “심각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인즉, 박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 아담 타락이 이미 구원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계획된 주권적 섭리이다.
2) 지어진 아담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3) 그러므로 결국은 하나님이 불완전한 아담을 죄의 원인을 제공한 이로 만들 게 된다.
4) 이는 아담의 죄의 심각성을 현저히 약화시키며, 인간의 죄책을 가볍게 만듦으 로써 아담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5) 마지막으로 죄의 기원문제, 즉 왜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셨는지는 하나님의 비 밀한 섭리에 속한 것이라는 것으로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결 론을 맺는다.
(해명과 답변)
그러나 이런 분석은 박용기 목사의 전체적 복음 사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석으로 보입니다. 책이나 사상에 대한 분석은 어디까지나 “맥락적 이해”가 기본인줄은 귀 교수회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전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의 전제에 의해 상대방의 사상을 재단하는 것은 진리 추구의 자세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귀 교단의 성도들도 중요하지만 본 교단의 총회를 책임 맡고 있는 목회자의 사상을 충분한 검토 없이 이단성 운운하는 처사는 본 교단의 영혼을 지도하는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간과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반박과 해명의 글을 올리니 현명한 판단을 바라겠습니다.
1)하나님은 죄의 원인제공자라는 이해에 대한 반박
-- 피조세계의 인과율을 창조주에게 적용하는 범주 착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서 그의 경륜과 절대적인 작정하심을 변개함이 없이 이 땅위에 실현하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역시 단순 허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은 칼빈 역시 인정하는 바요, 성경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성경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있다고 명백하게 가르친다. 문제는 그렇게 주장하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요, 죄의 원인을 제공한 자라는 이해이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존재라는 것을 오해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어떤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가 주어진다는 인과관계(causality)는 어디까지나 피조세계, 혹은 상대적인 관계에서의 논리일 뿐이다. 세상 법정에서는 어떤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원인을 제공했는가를 추적하여 어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나 그런 피조세계 안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논법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논리적인 비약이요, 피조세계의 논법을 창조주에게 적용하는 범주착오이다. 즉 그런 원인과 결과의 논법을 통해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포함한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는 근본적인 성경적인 전제를 문제 삼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혹은 심판자와 정죄받을 자의 절대적인 관계를 오해한 결과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당신만이 주권자와 심판자요, 은혜를 베푸는 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담을 지으시고 복을 베푸실 뿐 아니라(창 1:27~28),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창 2:16~17)이다.
하나님이 금령을 주어 즉 원인을 제공하여 인간이 그를 어겨 죄의 결과가 나왔으니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금령을 주신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처사이다. 이는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그의 죄책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한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고 범죄했다”고 죄의 책임을 결국 하나님께 전가한 아담의 행실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만사와 만물을 절대적으로 섭리하시는 절대 주권자요, 당신의 뜻의 시행을 위해 법을 세우시는 입법자요, 그 법을 범한 죄에 대해 정죄와 사죄를 하실 수 있는 심판자이다. 이런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며 세상 만사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일로부터 피조물에게서 책임을 추궁당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 즉 절대 주권자요 죄를 정죄하실 심판자 하나님에게 죄의 조성자 혹은 죄의 원인을 제공한 자라는 말은 성립 불가능한 말이다. 이하 로마서에서 이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로마서의 증거
로마서 9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주장을 하자, 어떤 사람이 반문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다 강퍅하게 주관하시고는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죄의 책임을 묻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고 반문을 하게 되자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사람이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롬 9:20)”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주권대로 할 권한이 있는 분이심을 간과한 그릇된 질문임을 밝힌 것이다. 즉 피조물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할 위치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요컨대 바울은 질문 자체가 그릇된 전제, 즉 피조차원의 원인과 결과의 논법을 창조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잘못된 질문임을 밝힌 것이다.
2) 아담의 타락까지 포함한 모든 일을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일을 하나님이 작정하셨으며 그 죄의 책임문제는 어떻게 되느냐라는 보다 엄밀한 성경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택한 백성에게 드러내시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데 있다.(엡 1:) 이미 그리스도 사건이 창세전에 예정된 사건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담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되어진 일이다. 왜 그렇게 섭리하시는가?
귀 교수회도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라는 말로 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진리추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자세, 즉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진지하게 남겨놓고 성령의 조명아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도피처를 만들어 놓고 탐구를 원천에서 회피하는 신학적 도피주의에 불과하다. 뿐 만아니라 성경의 논리에 의지하여 알아가려는 진리추구 활동을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권위주의적인 전통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우리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서는데 서기를 바란다. 몰라야 한다는 무지의 당위성을 핑계로 삼아 진리를 알려고 하는 시도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논법은 성령의 조명아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하나님 백성의 권한과 특권을 가로막는 중세의 몽매주의와 방불하다.
성경은 아담이 불순종 가운데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2~36)
이렇게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인생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워져 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깊이 알게 하시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만물을 작정하시고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양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을 성경은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가고자 하는데 까지 확인한 것이다.
구약의 증거
이는 구약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의 복을 작정하여 언약하시고 반드시 그것을 은혜로 베푸신다. 그런데 그 은혜의 크심과 긍휼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의 종살이가 필요하다. 즉 요셉을 먼저 애굽에 가게 하신 다음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섭리하신 것이다(창 41:57~42:5). 그 후 사백년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된다. 이 사백년 애굽 생활의 종살이,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죄의 종살이가 이미 창세기 15장에 미리 예언이 되어 있다.
그렇게 섭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긍휼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언약대로 애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며 광야 사십년의 범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언약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는 인생이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다.
3) 죄의 책임 소재에 대한 정리
최종적으로 죄의 책임 소재에 대해 검토하도록 한다. 죄의 책임 문제를 정리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경에 나타난 사건 하나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달리 말하자면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겸손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 왕국이 세워짐을 알게 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인구조사를 하게 하신다.(삼하 24:) 즉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고 한다.
이런 사건에 대해 성경 기자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 일을 하고 난 후에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아담의 타락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아담의 타락을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 죄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지 못했던 아담에게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시며 만물과 만사의 주관자이시지, 인간의 범죄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는 그런 책임추궁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했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부여하신 피조적 차원의 자유의지, 즉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는 종속적인 의미의 자유의지에 의해 범죄한 것이다.
아담은 불완전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피조적인 차원에서 완전하게 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뿌리칠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 범죄한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사단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이시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될 때 성도도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 승리의 길을 가게 된다. 하나님은 마침내 종말에 부활의 몸을 입기까지 그의 은혜의 섭리를 지금도 계속 진행시키고 계신다. 즉 아담(최초의 인간))-타락인-중생인-부활인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무궁한 은혜를 드러내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총체적인 섭리의 전망에서 아담의 상태와 타락의 의미를 이해해야한다.
* 결론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모든 만사를 작정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주장이 결국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죄의 원인제공을 하게 된다는 귀 교수회의 이해는 타당성이 없으며, 박용기 목사의 주장을 그렇게 오해하고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허수아비 논법일 뿐이다. 즉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귀 교수회가 그럴 것이라는 가정아래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 놓고 판단한 오류이다. 따라서 본 교단은 귀 교수회의 신학적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견해
귀 교수회는 박용기 목사의 주장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1) 박용기 목사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입으셨다.
2)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죄없는 거룩한 하나님 일수가 있겠느냐며 문제를 제기하 면서 박용기 목사의 주장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있는 분으로 보는 위험한 사상 으로 간주한다.
3) 그래서 예수님이 입으신 인성은 타락 전 아담에게 주어진 죄없는 인성을 입으 셨다고 보아야 하며,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자 이지만 죄는 없으신 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명과 답변)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따라서 그의 본성이신 신성은 죄와는 무관
귀 교수회의 위의 주장은 박용기 목사의 주장의 총체적인 내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오해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본성이신 신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죄가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한다. 즉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박용기 목사는 이점을 결코 간과하고 있지 않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목회자가 어찌 이점을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위하여 죄를 걸머지신 분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흠 없고 죄 없으신 분이시지만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택한 백성의 죄를 걸머지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것이다.
2) 성령 잉태는 예언 성취를 통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의 표적적 사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즉 처녀 탄생은 구약 이사야 예언의 성취적 사건으로서 예수만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는 표적적 사건이다. 즉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하게 확증하는 사건이지 이것이 예수가 죄 없는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가 결코 아니다. 그 주장을 더 밀고 나가면 로만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 무흠시태설, 즉 마리아는 죄 없이 예수를 잉태했다고 하는 이단적 주장으로 발전한다.
3) 예수는 대속제물로서 택한 백성의 죄를 입으심
이는 구약 제사제도를 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흠 없는 어린 양이 필요하다. 흠 있는 어린 양은 대속제물로서 합당치 않다. 그런데 흠 없는 어린 양에게 안수함으로 백성들의 죄를 전가하면 그 어린 양이 죄를 뒤집어쓰고 죄인처럼 죽음에 처하게 된다. 즉 죄가 전가된 어린양을 백성들의 대속 제물로 간주하고 그를 죽여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택한 백성의 죄를 걸머지시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저주 받은바 되었음을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게 증거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했다.
요컨대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택한 백성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무시는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죄책과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이를 통해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죄책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택한 백성의 죄를 걸머지지 않았다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4) 성경 원어를 통한 증명
이를 귀 교수회가 인용한 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2~3)
* 결론
예수님은 본성이신 신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죄가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한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위하여 죄를 걸머지신 분이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입으신 인성으로서의 육체는 택한 백성의 죄악을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입으신 것이다.
요컨대 귀 교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대등한 차원에서 이해한 결론이며 박용기 목사의 주장은 신성과 인성은 대등한 차원이 아니라 인성은 신성의 영광과 사랑의 계시를 위한 종속적이며 수직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성이 예수님의 본성이며 인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적인 차원에서 입으신 것으로 본다.
3. 율법의 문제
1) 율법을 도덕법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문제점
귀 교수회에서 주장하는 대로 과연 성경의 율법이 인간의 행위 규범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의 전달을 위한 계시적인 언약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율법을 인간의 행위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성에 대한 심각한 착오로 보인다. 진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그릇된 개념을 잘못 끌어 오게 될 때 전체의 진리성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수 있는 가는 학문의 기본 훈련을 거친 학자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용어와 개념들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 가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어떤 용어나 개념도 도덕이라는 범주로 개념화 할 수 없다. 성경 안에 구약 율법, 특히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말하는 곳이 있는가? 그것은 칼빈의 유산 일 뿐이며 더 나아가면 아퀴나스로부터 기인된 신학적 오류이다. 아퀴나스는 카톨릭 신학의 공로주의를 정당화 하기위해 구약의 율법 가운데 시민법과 의식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나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간주하고 그것은 예수님 오신 이후에도 영구하다고 하는 신학적 주장을 하였다(신학대전). 칼빈은 아퀴나스 신학의 기본 틀을 강력하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점에서 만은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시내산 언약은 전통 개혁신학이 범주화 하는 대로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이 아니라 계명, 율례, 규례 혹은 법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 이심을 기억하여 경외하기 위한 언약적 성격의 법이다. 구약 전체가 메시야를 언약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을 보는 눈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음의 누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명백하게 구약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증거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위의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전체를 보는 관점을 분명하게 한다. 예수님은 구약 전체 즉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글 전체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요 이것들이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성경 해석학의 원리를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개혁신학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가장 귀한 신학적 유산은 언약사상이다. 구약은 메시야 언약이요, 신약은 메시야 성취라는 기본 틀이 우리가 보는 성경의 기본 구조이다. 즉 구약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며 신약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성취를 통해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어떠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을 아직도 신약 성도의 생활을 위한 도덕적 규범으로 간주하는 것은 카톨릭의 공로주의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신학적 미숙이다. 이것이야 말로 전통적 개혁신학이 언약사상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언약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일관되게 정리하지 못하고 도덕법으로 규정함으로 후대에 신학적 걸림돌로 남겨 놓은 문제점이다. 따라서 성경의 전체적인 언약 사상이 밝혀짐에 따라서 이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2) 그렇다면 신약시대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신약시대 성도는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므로 신약성도는 율법을 조항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변화된 인격으로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를 성경에서는 사랑의 법, 혹은 그리스도의 법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성취한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는 이제 구약의 율법아래 있지 않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성령의 인도 하에 있다. 즉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귀 교수회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율법관의 입장에 서서 신약 서신서안에 있는 윤리적인 권면 중에 십계명의 내용과 겹치는 내용이 들어 있으므로 아직도 십계명이 생활 규범으로서 유효하다는 매우 궁색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신약 성경의 윤리적인 권면들이 구약 율법의 소위 도덕법과 강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으로 수용하는 이유가 신약 성도들이 아직도 불완전한 존재이며 연약한 육신을 입고 살기 때문에 윤리적인 규범과 권면과 명령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는 계시적 통일성을 훼손시키며 기독교를 이방종교의 도덕적 종교로 환원시키는 결정적인 신학적 오류이다.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 사건으로 이미 완성됨으로 신약의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 갈라디아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위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를 박아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성도들도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지 율법아래 있지 않다. 그런 신약 성도를 다시 구약적인 율법 아래로 끌고 들어가는 것은 위의 성경 말씀과 위배된다. 더 나아가서 성령이 오신 이유를 약화시키는 신학적 오류이다.
신약시대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말미암아 외적 규범의 언약과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드러난 무궁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 점차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에서 점차 벗어나 속사람이 변화하며 심비에 새긴 법을 이루게 된다. 즉 성령의 인도 하에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 넘치게 되고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변화를 거치게 될 때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며, 만족하기에 도적질 하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이를 로마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했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속사람의 성장이 이루어지면 외적 십계명을 껍데기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속사람의 변화로 도적질 할 동기 자체가 사라진다. 성경을 이를 속사람의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야고보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 율법을 생활규범으로서 지켜야 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 10~13)
위의 야고보서의 주장의 위에서 논증한 내용을 확고히 한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어도 모두 범한 것과 같이 된다. 말하자면 율법이란 그물망과 같아서 하나만 범해도 전체 율법을 범하게 되는 격이 된다. 아담 타락이후 죄인인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거룩한 율법 앞에 죄인 됨을 깨닫게 하여 구원자 예수께로 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임을 분명히 했다(갈 3:24).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자유의 율법(약 2:12)’ 혹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대로 심판 받을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때 자유의 율법은 구약 십계명이 결코 아니다. 이는 바울서신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법이요, 성령의 법이다. 이는 외적 규범이 결코 아니다. 이는 위의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긍휼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용서와 사랑의 법으로 채워져가는 성도의 내면의 변화이다.
그리스도를 몰랐던 이전의 옛 사람에게는 이런 내면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없었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신다. 성화는 인간의지의 노력과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신인 합력적인 산물이 아니다. 성화는 결코 타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며 그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이다.
결론
율법을 도덕법으로 보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언약적 통일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이다. 이 때문에 칼빈 이후 개혁신학은 소중한 신학적 유산을 물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경의 계시성을 확고하게 정립하지 못했다. 성경은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점이 이방종교와 절대적 차이점이다. 이웃 간의 윤리 문제는 이방종교적인 도덕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건덕의 문제로 정리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건덕의 삶이야 말로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사역의 결과이다. 이렇게 깨닫게 될 때 구원 뿐 만아니라 성도의 생활까지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전통적 율법관에 근거하여 성경적 율법관을 문제시하는 귀 교수회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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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교단 역시 비록 작은 교단이지만 귀 교단이 무엇보다도 중시하고자 하는 성경의 절대 권위를 따르는 보수적 지향성을 가진 교단입니다. 단지 성경 이해에서의 차이점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시간을 두고 깊이 연구하고 논의 하는 가운데 보다 올바른 깨달음으로 전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전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교리와 가르침을 존중하고 계승하되 보다 폭넓은 성경해석과 이해에 근거하여 발전적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신학의 특징이자 빛나는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온 이천 년 교회사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겨 날 때 성령의 인도 하에 건전한 토론의 과정을 거쳐 신학이 발전해 왔다는 것을 귀 교수회도 잘 아실 줄 압니다. 본 교단이 따르는 신학적 원리와 성경 해석은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고 언제라도 공개적인 검증과 검토를 통해 건전한 지적을 받기 원하며 토론의 장에 개방되어 있습니다. 진지한 재고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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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학문이 깊지 않은 제가 함부로 논할 것은 아니지만, 좁은 소견이나마 말하자면, 3번의 율법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공감이 가고 훌륭한 부분도 있으나, 1, 2번의 해명은 공감이 되질 않습니다. 특히 1번의 경우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원칙은 손상되지 말아야 하나, 아무리 완벽한 논리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한 쪽 면만 이야기하다가 인간을 수동성으로 빠뜨릴 수 있으며, 양심의 마비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는 열매를 보고 알아야 하는데, 만일 어떤 논리가 인간의 양심의 마비를 가져온다면, 그 논리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공감됩니다. 그럼으로 양쪽다 조금씩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최야곱님이 예리하게 잘 진단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우려했던 부분까지도 말씀해 주시고.. 이 자료를 봐도 말씀운동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는군요. 여기서는 모르시겠지만 말씀운동은 여러가지 잘못된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신학으로 인해 그들의 실지 교회생활 되감을 보아도 우려들이 지금 하나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그 원인을 잘 모르며 자신들의 모습도 잘 못 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가르침의 잘못으로 당연한 자업자득으로 보입니다. 말씀운동은 신학의 논리들에 문제점도 많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보수신학을 비판하는 이상으로 보수신학에서 중요시하는 교리들, 즉
구원론, 성령론, 삼위일체론 종말론 등 일반 조직신학에서 배우는 교리들을 거의 안가르치고 그들이 만들어낸 생명력 없는 신학의 논리와 원리들, 그리고 성경신학의 우월성 강조를 가르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울 때 얻는 그 큰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글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이전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교리와 가르침을 존중하고 계승하되"라는 말은 허울좋은 이야기뿐이라는 것을 저는 많은 시간 겪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증명할 수 없는 심증이지만 제 이야기를 염두해 두고 강남노회산하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시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교단은 강남노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강남노회의 모든 교회의 목사들은 박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목사들입니다. 강남노회 소개: 강남노회의 모체는 하나님의 「말씀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83년 로고스성도대학 1기 졸업생 배출을 필두로 전국 각 지역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신선한 운동이 발흥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설립된 지교회들이 장안중앙교회(박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1990년 9월 4일 드디어 「강남노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강남노회는 성경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신학을 표지로 개혁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노회의 위상(位相)을 정립하고자 한다. 출처: http://logos.ne.kr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원칙은 손상되지 말아야 하나, 아무리 완벽한 논리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한 쪽 면만 이야기하다가 인간을 수동성으로 빠뜨릴 수 있으며, 양심의 마비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특히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옳은 말을 너무 치우치게 소화해서 사람은 넋 놓고 있도록(사람이 무엇을 하면 바로 행위구원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지시하셔도(기름부음으로) 우리의 의지와 선호가 그것을 거부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실기하는 경유가 허다합니다. 즉 생각을 영에 두지 않고
생각을 육에 둠으로 영적 사망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별 문제가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자신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훼방하는 자인지 잘 알수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그런 불순종의 사실조차도 인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교회방, #88 과 동일한 글이네요..
토론이 많이 있었네요. 지니님께서 쉽게 잘 설명하셨는데.. 덕분에 잘 읽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어떤 사건을 모든 사건에 적용하려는 일반화의 오류. 다윗의 인구조사가 하나님으로 기인했다는 말씀으로 모든 사건에 적용하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장님이 된 사람도 있지만(요 9) 죄때문에 38년동안 중풍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요5) 다양성을 한가지로 통일시키고 싶은 것은 우리의 철학적 욕심에 불과합니다.
네, 좋은 지적의 말씀입니다.
아하! 중풍병자가 죄때문에 38년동안 그랬군요?
예, 요5:14 말씀을 근거로,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