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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명장 이순신.마지막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셋째아들 이면(李免)의 사망
명량해전(鳴梁海戰)이 끝난 뒤 이순신은 17일에 당사도를 떠나 무안 어외도, 영광 칠산도, 법성포, 홍농도, 부안 위도 등을 거쳐 군산 앞바다의 고군산 선유도까지 북상했다. 비록 적은 수의 군선과 병력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어 적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천지 원수 왜적(倭敵)을 완전히 섬멸한 것은 아니었다.
군선과 병력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보다 안전한 곳을 수군기지로 삼아 전력을 정비하는 것이 급했다. 뿐만 아니라 부족한 무기와 군량도 확보해야 했고, 날씨가 점점 추워져가므로 군사들의 겨울 의복도 마련해 주어야만 했다. 이순신이 처한 당시의 어려움은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조정에서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도 손을 써주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명량해전(鳴梁海戰) 다음날 어외도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피난민이 3백여척의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있다가 조선 수군을 보자 앞다투어 찾아와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행록(行錄) 편에 따르면 이순신이 먼저 피난민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李舜臣) "그대들은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피난민들 "왜적(倭敵)들이 준동하여 살기 위해 북쪽으로 피해 가다가 사또께서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이순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그대들도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니 내 말을 듣겠는고?"
피난민들 "무슨 일이든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이순신 "지금 날씨는 추운데 군사들이 옷도 없고 밥도 없으니 무슨 힘으로 왜적(倭敵)과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대들이 쓰고 남은 옷과 양식을 조금씩이라도 보태준다면 그것으로 적군과 싸울 힘이 생기리라. 그래야만 그대들도 살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하여 피난민들이 기꺼이 옷과 양식을 가지고 왔다.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만 해도 불쌍한 피난민들의 옷과 식량을 마련해주던 이순신이었는데, 이제는 피난민들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명색이 정규군인 조선 수군이 처한 실상이었다. 백성의 도움을 받아 전투를 치르는 군대는 유격부대지 정규군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정이 그토록 절박했던 것이다.
9월 17일부터 4일간 서해 연안과 섬들을 떠돌던 이순신은 9월 21일에 선유도를 임시 수군 군영으로 삼아 지친 심산을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그런데 격전의 긴장과 피로가 갑자기 풀렸음인지 이순신은 이때부터 여러 날을 심하게 앓았다. 10월 1일이 되자 이순신은 맏아들 회(會)를 아산 본가에 보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예감 때문인지 심사가 너무나 언짢아 부인 상주 방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14일이 되자 둘째아들 열(說)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겉봉에는 통곡(慟哭)이라는 두 글자가 씌여 있었다고 전한다. 셋째아들 면(免)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아들을 잃은 이순신의 비통한 심정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하늘이 어찌 이리도 박정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백일(白日)조차 빛을 잃었구나. 아, 슬프다. 내 아들아!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범속하지 않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했느냐. 내가 지은 죄로 화가 너의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있은들 장차 누구를 의지해 살아야 한단 말이냐.'
이면은 이순신의 세 아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아버지를 닮아 병법의 이치를 깨닫는 이해가 빨라 장차 아버지에 버금가는 지장(智將)이 될 것이라고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2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살해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따르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 계속 패배를 거듭했던 일본 수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조차 133척의 대함대로도 13척의 군선뿐인 이순신의 함대를 이기지 못하고 참패하자 일본군 병사들 뿐만 아니라 장수들마저도 이순신을 바다의 신(神)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의 총지휘를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부하들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아산에 이순신의 가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아산으로 병력을 급파하여 이순신의 가족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셋째아들 이면이 어머니를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활과 칼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한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는 이면이 죽은 뒤 4개월 뒤에 이순신이 고금도 진영에서 아들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낮에 이순신이 피곤하여 잠시 낮잠을 자는데 꿈에 이면이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아버님, 저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이순신이 이렇게 물었다.
"네가 살아 있을 때 힘이 장사였고 무예도 출중했는데 죽어서도 그 적을 못 죽인단 말이냐?"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에 겁이 나서 못 죽이겠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인데 이승과 저승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원수를 같은 진중에 두고서도 제 말씀을 예사로 듣고 죽이지 않으시렵니까?"
이면이 울면서 사라지자 이순신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때 새로 잡아온 왜군 포로 한 놈이 배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끌어내게 하여 그 자를 심문하니 이면을 죽인 놈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 놈을 베어 죽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면이 죽은 뒤부터 이순신의 하루는 본인의 표현대로 하면 마치 1년과도 같았다.
◆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이순신은 선유도에서 다시 함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해남 우수영에서 20일쯤 있다가 보화도, 즉 오늘날의 목포 앞 고하도로 본영을 옮겼다. 그해 10월 29일이었다. 그는 보화도로 이진(移陳)한 이유에 대해 그날 일기에서, '서북풍을 막을 수 있고, 배를 감추기에 적합했다. 육지에 내려 섬 안을 내려다보니 지형이 매우 좋았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1598년 2월 17일까지 108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데 이보다 며칠 앞선 10월 24일과 25일에는 조정에서 선전관이 내려와 명나라 수군의 참전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함대기지로 적당한 곳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전했다. 명나라가 수군을 보낸 것은 원균의 패배로 바다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무렵 강화도에 도착한 명나라 수군은 이순신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승리하여 서해의 뱃길이 안전해지자 그대로 주저앉아 깔고 뭉개면서 행패를 부리다가 그로부터 9개월이나 지난 이듬해 7월 16일에 고금도로 이동했다. 그 사이 이순신의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코피를 한 되나 흘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장졸들과 함께 배 밑에서 추위에 벌벌 떨기도 했다. 어머니의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으니 54세를 바라보는, 당시로서는 노령인 그의 체력은 더욱 허약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宣祖)가 특별히 고기를 보내주며 잘 먹고 잘 싸우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그때 고기를 내려 보내며 선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원균도 죽고 없으니 이순신이라도 더 부려먹을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명량승전(鳴梁勝戰)으로 서해가 안전해졌으니 참으로 이순신의 공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을까.
이순신은 선조가 보낸 고기를 받은 12월 5일자 일기에서 '주상(主上)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썼다. 감사하다거나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가 아니라 그저 비통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선 그해 11월 17일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면사첩(免死帖)을 하사했다. 이는 이순신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사형을 면해준다는 특지였다.
어쨌든 조선 수군이 재건의 기틀을 다진 것이 바로 고하도에 머물 때였다. 특히 이곳에 주둔하는 석 달 남짓한 기간에 이순신은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검문검색과 더불어 군량 확보의 일석이조 효과를 보았다. 이순신이 선유도를 거쳐 고하도로 진을 옮길 무렵에 군사들의 수효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보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무기든 군량이든 군복이든 자급자족(自給自足)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계절이 바야흐로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당장 가혹한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도 비상한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한 결과 나온 것이 해로통행첩이었다. 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선박운항증이었다. 이순신은 관내를 항해하는 모든 배로 하여금 통제영에서 발부하는 해로통행첩을 지니고 다니게 했다.
그리고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연안을 항해하는 배는 공사를 막론하고 이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공표했다. 해로통행첩은 배 주인이 적군의 첩자인가, 또는 해적인가 여부를 조사하여 발부했는데, 큰 배는 벼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씩을 받았다.
당시는 피난민들이 식량을 배에 싣고 다녔는데, 모두가 이순신을 믿고 따랐기에 별다른 불평 없이 이 조치에 순응했다. 그리하여 열흘도 못 되어 1만여 석의 곡식을 군량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해로통행첩 제도는 효과가 좋아 본영을 고금도로 옮긴 뒤에도 그대로 시행하였다. 또 이순신은 피난민 가운데 수군을 자원하는 장정들을 받아들여 이들을 훈련시켜 병력을 증강했으며, 계속해서 전함과 무기와 화약 등을 만들어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열성에 감동한 백성들은 비단 해로통행첩 때문만이 아니라 자진해서 양식과 의복과 쇠붙이와 구리 등을 가져다 바치기도 했다.
고하도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이순신은 전과 같이 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했다.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민심 수습과 정신무장 강화를 위해 일본군에게 부역한 자들을 엄격히 색출하여 처단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나 자신이 솔선수범함(率先垂範)으로써 휘하 장수들이 진정으로 심복토록 만들었다. 이는 명량해전(鳴梁海戰) 이전에 수사(水使)라는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전선(戰線)을 이탈하여 도주한 배설을 비롯해 해전이 벌어진 뒤에도 적군을 두려워하여 구경만 하고 있던 장령들을 보고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언제 어디서 교전이 벌어져도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군령에 충실히 복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철주야로 애쓴 보람이 있어서 1598년 2월 17일에 완도 고금도로 이진할 때는 군사도 8천여명으로 늘어났고, 군선 수효도 40여척으로 늘어나 한산도 통제영 시절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겨우 군선 13척으로 적군과 싸웠는데, 이렇게 늘어난 것은 새로 건조한 군선도 있지만 원균의 패전시 도주하여 숨어 있던 전함 10~20척도 다시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금도는 완도의 동쪽, 조약도의 서쪽, 신지도의 북쪽에 자리잡은 천연의 요새로서 완도읍 장좌리와 그 마을 앞의 장군섬은 그 옛날 후기 신라의 군인이자 무역상인이던 장보고(張保皐)가 신라와 중국 당나라, 왜국 등의 무역항로를 개척하고 바다를 호령하던 청해진(淸海鎭)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고금도는 섬 안에 농토가 많아 피난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 아군이 지키기에는 유리하고 적군이 공격하기에는 힘든 곳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이진한 사실을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교에 주둔하고 있으며 2월 13일에는 우키다 히데이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같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군은 멀리 나주 경내의 보화도에 있으므로 낙안과 흥양 등의 바다에 출입하는 왜적(倭敵)이 마음 놓고 마구 돌아다니니 통분합니다. 그리고 바람이 잔잔하니 이는 왜적이 소란을 일으킬 때이므로 2월 16일에 장수들을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가 17일에 강진 경내의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고금도 역시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內外洋)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고 후망(帿望)이 잇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역시 많고 한잡인(閑鏶人)도 거의 1천 5백여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흥양과 광양은 계사년(1593년)부터 둔전을 하였던 곳으로 군민을 초집(招集)하여 경작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고금도로 이진한데 대해서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렇게 썼다.
'고금도에 이르렀을 대는 군대의 위세도 굉장했거니와 섬 안에 민가만도 수만호에 이르러 옛날 한산도 시절보다 오히려 10배나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고금도로 본영을 옮길 당시 그는 비바람과 피비린내가 몰아치는 7년간의 전쟁 때문에 54세의 나이에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백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고금도로 진을 옮긴 뒤에 큰 접전은 없었지만 3월에 장흥의 적군이 인근을 돌아다니며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녹도만호 송여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소탕했으며, 가까운 바다까지 몰래 들어와 고기를 잡던 일본군의 고바야[小早] 16척을 모조리 격파한 일이 있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사진은 조선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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