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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 가셨대”
3년간 척추 디스크로 고생했지만 최근엔 운신할 정도로 건강이 호전 됬는데
새벽 시간에 무순 청천벽력의 말인가.
“형부하고는 통화 되는 거야?“ ”아냐”
짧은 나의 말에 막내 여동생은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으나
잠결에 이게 꿈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가 가셨다는 사실에 한동안 망연자실 멍하니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오형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듯이
걸핏하면 사네마네 하는 나 때문에 혹여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도 간담이 뚝 떨어지는
경험을 했을 엄마 였을꺼란 생각이 물밀듯 덮쳐왔다.
그동안 4번의 경제파탄으로 내 삶은 파고처럼 곤두박질 칠때마다 자존심 이전에 생존이 먼저라는 걸 절감 하면서
다시 일어 설수 있었던 것은 작정을 하고 기도한 신앙의 힘 이였다.
하느님께 다 받았다며 감사기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남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비난하다보니
우린 서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만 덧날뿐이었다. 그 땐 초 신자나 다름없는 그였지만
성경 공부까지 한 그가 자기 복 인양 또다시 살바엔....하느님이 두려웠다.
법원에 합의 이혼으로 도장을 찍었다.
앞으로 남은 숙려기간은 35일, 확인 절차만 남아 있었다.
내가 그에게 요구했던 조건은 4가지였다.
1,제사법 폐지
십계명중에 탈출기 20,1~6절에서는 계명에 속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나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지혜서14,12~27절에서는
[하느님을 잘못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그들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토록 커다란 여러 악을 평화라고 부른다. 아이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거나 비밀 의식을 거행하면서
또는 이상한 예식으로 광란의 향연을 벌이면서 자기들의 삶도 혼인도 더 이상 깨끗이 지키지 않고 음흉한 방식으로
서로 죽이고 간통을 하여 서로 괴롭힌다. 모든 것이 뒤엉켜있다.
유혈과 살인 도둑질과 사기 부패 불신 폭동 위증 가치의 혼란 배은망덕 영혼의 부패 성도착 혼인의 무질서
간통과 방탕이 뒤엉켜 있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고 원인이며 끝이다.]
2,십분의1에대한 십일조
집회서 35,10~12절
[네 손의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 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지혜서 15,15~17절에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는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 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개신교인들이 왜 제사를 지내지 않는지 비로서 이해가 갔다.
가정의 안녕보다 하느님의 법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성경을 보고서 깨달을 수 있었다.
3,잦은 음주 4, 존중하는 마음
2번에 대한 그의 답은 경제적 자립하고서라고 했지만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나를 광신자로 몰아 세웠다. 우리는 종교에 관한 논쟁으로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선교회 부부 피정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어긋나고 말았다.
그 당시부터 나는 갈라설 생각을 했다. 영적 갈급함으로 새벽 꿈속에서 보았던 개신교인 후배를 만났다.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며 맡기지 않고 내 의로 해결한다며 결국 종교인일 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며 신날하게 질책하던 그녀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와 부부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일방적인 마음을 접은게 화근의 시작 이었다.
종가집에 시집을 와서 1년이면 13개의 제사를 극진하게 지냈던 시댁은
어머니 대에서 몰락하게 되었다.
내 종교를 버리기를 요구했던 시어머니 때문에 신앙의 뿌리도 깊이 내리기전에 16년동안 냉담을 했던
난 4년간 시어머니가 치매로 투병할 당시에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어머닌 가정에서 교리를 배워 부활절에 영세를 했다.
6년 전에 돌아가실 땐 수많은 연도 속에서 장례미사로 했으며 호적상 부부였던 시아버지는 개신교식 예배로 했기 때문에
마땅히 제사법을 없애고 추도예배로 드리기까지 3년간 영적전쟁을 치루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재작년 어머니 기일에도 비신자인 온 친지가 모인 가운데 제사를 드리게 되었을 당시에도
오랜만에 자손들이 모여 기일을 기억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연도를 바치고자 했던 희망은 그의 고집으로 무참하게 되어 버렸다.
[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마태15,3절
말씀을 주고 계신다.
1777년 최초로 이벽, 이승훈, 권철신, 정약전, 정양용,등이 참석한 강확회가 앵자산 주어사 천진암에서 열린 이후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은 직후 조선으로 돌아와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한양에 도착한 이승훈은 곧 이벽을 찾았다.
이들은 이듬해부터 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곧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이때 다른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증인이었던 김 범우는 심한 고문을 받아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곳이 바로 김범우의 집이었다.
그러던 중 1791년 진산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진산군(충남 금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 바오로는 모친의 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에 당시 유교 사회에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사형에 처하게 된다. 윤지충 바오로는 우리교회 역사상 최초의 피의 순교자로서
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가 33세로서 예수님이 사형 받으신 나이와 같으며
사형 시간도 오후 3시경으로 역시 예수님과 같은 시간에 운명했다.
정조(1800년~1834년) 천주교는 초기에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정조 때부터 시작되어 본격적인 박해는 1800년 정조가 죽은 뒤부터였다.
급기야 바티칸에서는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정서상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금지하다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허용했다.
이는 교황청의 토착화정책의 열매로 보는 관점이 있는가하면 조상의 혼령에게 제사 음식을 들도록 권유하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를 모셔야할지 갈팡질팡하며 신심이 깊은 신자들은 성당에서 연미사로 봉헌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절을 하기도 하며 들쑥날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정체성을 찾아야할 때라고 본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뿌리를 두고 있는 세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로써
그중에 교세확장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독교가 비판의 주요 대상인 셈이다.
이렇게 자료를 들이대며 조목조목 설명을 해도 어머니께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애착은
불가항력 이었다.
나는 지금의 명동성당 명례방에서 이창진 사제의 기도회에서 증인이 되리라는 찬양 속에서
응답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에 명분상이라도 지방을 쓰고
절을 하는 제사는 지낼 수 없다고 강력하게 번번히 주장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마지막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을 해야만 했다.
이어서 명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트집을 잡으면서 사건은 급물살로 치달았다.
나는 가뜩이나 절을 하고 술을 따르는 그의 행위가 못마땅했는데 기어이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 조상시대는 끝이 났으며 결국 흙으로 빚어 흙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영혼을 왜 불러 들이냐며 대들자 폭언이 오고갔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희생하라고는 하지 않을거야.
난 이제 자유로워 질거야. 이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나는 둘째 시누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싸다말고 내팽개치고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이후부터 정신 집중이 안 되고 멍했다. 3년 전에 아팠던 심장병의 재발을 늘 염두에 두고 조심했는데 다시 전조증상이 생겼다.
가슴이 꽉 조이는 것 같더니만 숨을 못 쉴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이러다가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닮아서인지 나 역시 심장이 약한 탓이었다.
불을 피워 생체 실험을 하면 자식의 등을 밟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본능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장성한 아들도 있는데, 나는 살기위해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남은 숙려 기간은 30일 이었다. 제대봉사를 하던 어느 날 새벽 이었다.
힘들 적마다 기도해주는 교우에게 심중을 말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말씀을 들려주기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 3시에 ‘자비의기도’에 매달리며 한 달 작정기도로 들어갔다.
그렇게 결정하자 곧 평정을 갖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새벽 기도 시간 이었다.
폰 분실로 잊어버린 개신교인 후배의 번호를 떠올리고 전화를 했더니 급하게 만났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의 말씀은 새벽기도로 얻은 외아들이었다.
고통스러운 마음 끝에 이혼하지 않고 떨어져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개신교로 권면했던 그녀의 끊임없는 기도에 응답하고자 마음을 정했다.
마지막으로 감실 앞에서 깊이 묵상을 하고 미사를 드렸다.
“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린 피다. 바로 이 순간 나의 사제들이 너희를 위해 성 변화를 선언했다.
그들이 마련하여 너희는 감사 하리라. 나의 뜻은 영원 하리라.”
그랬다. 내가 받아 모신 영성체는 이러한 위탁과 비참은 슬픔과 평화와 사랑을 함께 섞어서
비록 나쁜 재료들이 첨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하느님 명령 앞에 두려워하지 않도록 내 영혼이 주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기꺼이 순종하고 헌신하려고 결심 했을 때
저속한 본능의 공격을 받아, 그때마다 참회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죄악으로 빠져 버리는
나는 결국 내가 걸어 갈 길, 안전한 길은 가톨릭 신앙으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진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종이다.
이는 너희가 깨쳐서 나를 믿고 내가 바로 그분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 이전에 신이 만들어진 일이 없고 나 이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내가 바로 내가 주님이다. 나 말고는 구원해 주는 이가 없다. 이사야 43,10~11절]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불리리라. 이사야58,12절]
말씀대로 당신을 알리게 하소서.
사람들이 저에게 예수를 믿어 미쳤는가보다고 혹독하게 말하더라도
눈물 속에 씨를 뿌렸던 것을 영원한 보상이 되어 주소서.
유교 집안의 이천 서 씨의 친정은 경기도 이천에 시조 묘가 왕릉처럼 조성되어있고
문화유적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나주와 무안의 선산은 아방궁처럼 꽃동산으로 꾸며져 있다.
그걸 유지하며 관리하는 친정오빠는 자수성가하여 장손도 아닌데 애착이 유별나다.
장손인 큰집 오빠는 천주교인이고 작은집 동생은 뒤늦게 신학교를 가서 목사이다 보니
불교신자인 올캐 언니는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스님을 부르지 않고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고 한다.
빈소에서 이튼 날 밝히고 꽁꽁 동여맨 엄마의 몸 피듬이 나무상자에 꽃으로 장식된 채
불구덩이 속에서 산화되자
남은 살과 따뜻한 혈혼은 온 데 간 데 없고 엄마의 한 몸은 이제 한줌의 재로 남아
우리 곁을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라리 넘자 어어이~”
호곡소리에 맟춰 납골로 안치된 가족묘로 유골함이 든 상여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금방 자네 따라가게 해주소”
91세인 친정아버지의 목맨 소리와, 가슴을 안고 통곡하는 올캐와, 안타까운 오빠와, 언니의 비명소린 차라리 절규였다.
가까운 지인들 역시 슬픈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말문을 닫은 채 흐느꼈다.
막내와 눈물 많은 제부의 심중이 헤아려지고 엄마와 애착관계로 있었던 남동생의 가슴은 불로 활활 타버릴 지경이었다.
불교 탱화를 그리는 남동생은 가끔씩 정신질환으로 발작을 했기 때문에, 엄마는 오직 아픈 손가락에 신경 쓰이듯
89세로 평생 속알일 하며 사신 동안 남에게 덕도 쌓을 생각 없이, 그 자식만 끼고 살다가 뒤늦게 내개 살가운 정을 보여 주셨다.
이틀 동안 호흡곤란으로 숨이 멎은 엄마는 결국 우리부부의 화합을 위해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절묘한 시간의 선택으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딸에게 생명의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기울어가는 가정의 주춧돌을 바로 세워 다시 샘솟는 가정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싶으셨던 걸까?
“괜찮다. 괜찮아.” 이 두 마디로 숨이 멎은 엄마는 죽음의 순간까지
절대자인 신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목숨을 담보로 기어이 이루고야 말겠다는 사투로 가정의 화합이 비로서 실현 되었다면,
엄마는 위대한 성모마리아의 화신이 되고도 틀림없으리라.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 바다를 가른 것만이 기적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 기적 이었듯히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 들추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가족 간의 화목을 되찾고
미움이 사랑으로, 질책이 이해로, 고집이 겸손으로, 바뀌었던 이것이야말로 바로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이다.
너희 행위를 내가 분별할 뿐 너희는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도 네가 나의 집으로 와 나를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그리스도임을 인지케 할 뿐
너의 손을 이끌어 내 집으로 오게 하지는 않겠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계신 아버지께서 마음속으로 염원할 뿐
능력으로 불러들이지도 누굴 시키지도 않았음을 기억해라. 단지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내 품에 안기길 기다릴 뿐이다.”
묵주를 손에 든 난 엄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따라갔다.
쉴세 없이 내 눈에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하느님께 버림받고 비참한 몰골로 살지 않겠다는 내 선언에 하늘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져도
다독이고 달래준 것도 엄마였다는 생각이, “무소식이 희소식인거재”
안심시키고자 한 엄마 가슴을 멍들게 했다는 자책과 회한의 비통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늦게나마 소망하셨던 참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는 생각이 가슴 저미는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버거운 인생살이에서 내리 사랑이다.
이 말만끔 이기적인 언사가 있을까. 나도 내 자식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태니
치받이 사랑은 단념하란 주문에 언제 엄마는 너희들의 사랑을 갈구 하였느냐 내걱정말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다투지 말고 살라는 말씀 외 무엇을 요구 한 적도 없었건만,
통하지 않은 곳도 막힌 곳도 찾을 수 없는 문 없는 사대문 광장이었던 어머니라는 이름은,
사통팔달이었다.
누구나 표용하고 어떤 설음도 원망도 미움도 아픔도 녹여내는 넓은 바다 같은 사랑의 샘 이었다.
푸른 하늘은 태평하고 화창한 봄볕과 심술궂은 바람마저 살랑되던 날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셨는데
오빠는 아랫목에 항상 누워 계실 엄마를 평소와 다름없는 습관으로 부지불식간에 방문을 열지도 모르겠다.
아버진 허허 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시겠지!
"엄마를 의지하며 살았던 외톨이가 된 남동생은 또 어떡하라고 엄마?
한 배 속에서 나온 천차만별의 자식들의 안녕만을 기원하며 늙고 병든 몸을 가누셨던 엄마!
이젠 고통도 슬픔도 없는 천상에서 모든 시름 훌훌 털고 편히 계세요.
엄마가 선물하신 가족 사랑의 의미를 마음깊이 새기며 잘 살께요.
석서방에게 씨암닭도 모자라 바닷가 펄펄 뛰는 생선 구어 두 손으로 가시 발라
스스럼없이 밥술에 언져 주셨던 엄마께 이글을 바치도록 허락 해 주었으니
엄마가 모든 악습을 다~아 사랑으로 안고 가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안녕~"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의 유골함에 입맞춤을 했다.
홍콩과 싱가폴로 선교를 갔다가 20년 만에 친정인 목포로 임직을 오게 된 목사 사모인 친구가 빈소에 찿아 왔다.
그래 신앙은 기다림 이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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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계셨네요...이번 사순이 특별한 시간되시길 바래봅니다 어머니 보내신 마음에도 치유의 손길이.....행복한 하루 되세요
여행이라도 떠나셔서 돌아오실 것만 같은 그런 마음이실 거예요. 한동안.. 저도 아직 그렇거든요. 엄마, 아버지.. 함께했던 장소라도 지나치게 되면 그때의 잔상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조금전 본당 십자가의 길 참례했다가 머리 하얗게 세신 어르신을 뵈오니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콧등이 시리네요. 어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드립니다. 기운내세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시간 되세요.
이별은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오더군요. 오래 전 엄마와 언니를 차례로 떠나 보내고 몇 해를 망연자실 보내다가
어느 해인가 성목요일 발씻김예식 때 남은 눈물 다 쏟고 나니...다 불효했던 날들에 대한 후회와 회한이 아니었을까요.
어머니의 편안한 안식을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