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마라!
현재에 깨어있고!
미래를 지향하라!
지금 출발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
‘사념처(四念處)를 의지하라.
몸이라는 것은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
기분이 좋고 나쁨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마음이라는 건 믿을 바가 못 되니
집착하지 말라.
제법(諸法)은 아(我)라고 할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몸에는 성스럽거나 깨끗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관신부정(觀身不淨)’이라고 합니다.
둘째, 우리는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는데, 그 즐거움이 사라질 때
그것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관수시고(觀受是苦)’라고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죽 끓듯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에는 항상함이 없고 늘 변하니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합니다.
넷째, 만물에는 아(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법무아(觀法無我)’라고 합니다.
이 사념처가 위빠사나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아난다는
다시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합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덕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둘째, 병든 자를 치료하고 약을 주는 것이다.
셋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서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병든 자는 치료받아야 하고,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는
JTS의 이념과 구호가 나왔습니다.
가난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상황이
바로 자기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의 입장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공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가는
기준과 비슷합니다.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내가 병들었을 때 간호를 했는가,
내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영접했는가,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왔었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언제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아주 유사한 내용이죠.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이렇게 아난다에게 말하고 나자,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겠다고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명씩 인사를 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족별로 한꺼번에 인사를 시켰다고 합니다.
우리도 문상을 가면 사람들이 적을 때는
한 사람씩 문상을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줄을 서서 한꺼번에 조문을 하듯이 그때도 가족끼리 모여서 친견을 했다고 해요.
그렇게 가족별로 모아서 친견을 했는데도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고 합니다.
모든 인사가 끝나고 이제 곧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니까 마지막 시간이라도 조용히 보내실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고요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경전에는 이 노인이 120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교도 수바드라였습니다. 이교도라는 건 불교도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밤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사문 고타마를 만나야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는 나를 귀찮게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아난다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고요한 시간이라서
더 이상은 만나기 어렵다고 해도 수바드라는 막무가내로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니까
부처님께서 ‘그는 나를 귀찮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묻고자 찾아온 것이다’ 하고 들여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만난 수바드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저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당시 인도에는 육사외도를 포함하여 62견해 내지 360여 가지의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상과 진리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바드라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나는 그들의 주장을 모두 알고 있다’ 하고 이야기하신 후 설법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은 팔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바드라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른 정진을 하고, 바른 살핌과
바른 안정을 취하고 있느냐는 게 중요하다.’
자꾸 그들의 말이 맞는지를 따지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팔정도에 대한 법문을 듣고
수바드라는 단박에 지혜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제자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지금 제 눈이 열렸습니다.
저도 승단의 일원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출가를 청하면 대부분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하고 한 마디로 허락하시는 것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바드라는 오랜 시간 동안 이교도로 살아왔고, 노구의 몸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승가 생활을 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3개월을 살아보고
할 만하면 그때 승낙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바드라가 ‘3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도 저는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대중을 불러 모아서
‘나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내가 열반에 든 뒤 그때 물어볼 걸 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지금 물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대중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 이렇게 세 번을 요청했는데도 아무도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부처님께서는 이미 많은 법을 설하셨고, 저희들은 다 이해했습니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대중이 슬픔에 겨워서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 중 아니룻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러분,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셨습니까?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4념처를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라며 대중에게 4념처를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4념처를 상기시키자 대중들은 그걸 듣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온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