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幸福한 삶🎋🎎🎋梁南石印🎋🙏
행 : 행복이란 가깝고도 멀고 먼 것
복 : 복이란 말은 단지 형용사일 뿐
한 : 한을 녹여 스며든 알찬 수확에
삶 : 삶이 풍요로워지면 그게 복이다.
▩ 본론에 앞서 이 글은 행복을 묻는 글이라기보다
단순한 푸념이나 분노도 아닌,
체험·관찰·시대 인식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결에
행복을 가로막는 주체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해부하는 글로서
개인의 실패로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서 한 청년의 좌절을
의지 부족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선택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그 비극을 낳은 구조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계층 간 이동의 차단
부모 세대의 선의와 강요가 만들어낸 균열
정직하게 살아도 보상이 없는 현실을 짚었다. 끝
사실 행복을 좇는 최대의 걸림돌은 그 지신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늘 불만을 쏟아내고 갖가지 탓만 하던 사람임을
그의 주변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일직이 호기심과 관찰력, 손기술도 남달라
뭐든 신기하게 살펴보다 하나하나 뜯어보며
원리를 깨쳐 엔지니어 장인이 되고자
이공계열 기술 고등학교를 꿈꾸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대학 4년의 등록금과 학습비로 부모님 등골을 빼 먹지 않고
그 4년 동안 현장에서 직접적인 실무를 쌓으며 기술을 연마
연구에 집념하면 대학 졸업생과 견줘
뒤지지 않는다며 설득하다가 지쳐있었다.
그때 부모님께서 천한 일을 해봐야
겨우 허기만 채운다는 성화에 거스르지 못하여
적성에도 맞지도 않은 인문계를 지원 합격,
좋은 성적에 학사학위를 받자,
그의 부모님은 흡족해하며
주변에 자랑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때는 총명한 그를 아끼며
부러움을 사던 사람이 많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부모를 배경 삼아 으스대며
명품을 쫓는 부잣집 동급생과 친구를 부러워하던 끝에
그는 길을 벗어났다.
그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이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봐 친구 자네
以小成大(이소성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큰 일을 해낸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하고 건네면서
타고난 운명이나 숙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을 수 없는 것과 다름없다,
라는 말을 건넸지만,
그 말이 옳은지조차 판단할 여유 없이
그는 볼멘소리로 응수했다.
선배님처럼 거액의 학비를 납부하고
학위까지 받은 고급 인력이,
어렵게 회사 공채에 합격해
고된 업무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월급 다음날만 되면
넋두린지 하소연인지 했던 말, 잊으셨습니까?
급여 통장은 간이 정거장이라고 내게 말해놓고도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백날 천날 땀을 흘려도 손에 쥔 게 있었습니까?
내 친구들은 직업도 없이
고가의 명품 차량에 해외여행 다니며 잘도 사는데
학위까지 받은 고급 인력인 제게
겨우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한 직장을 소개하면서
지원하라고 다그치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대물림할 게 따로 있지
뭐가 자랑이라고 평생 선배님처럼 살면서
겨우 허기만 달래며
자식들에게 빈곤을 떠안겨 주란 말입니까!
저는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될까 봐
외롭고 쓸쓸해도 일가를 이루지 않고 사는
저의 속내가 어떻게 썩어 문질러지고 있는지
선배님께서는 모르잖아요,!
선배님께서는 잊을 만하면
좋은 사람 소개할 테니 만나보라고 하여
저라고 생각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 고마움에 갈등하도록 저의 마음을 헤집었잖아요,
그러니 더는 제게서 관심을 거둬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그는,
한 방에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가 쫓는 것이
허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여 그 길을 쫓다 보면 단 한 번뿐인 삶을
송두리째 잃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정신만 황폐해질 것이라며 걸음을 멈추라 만류했다.
먼저 걸어본 사람들의 조언을
주제넘은 충고로 받아들인 그는
돌아서며 얼굴을 찡그린 채 그들을 멀리했다.
그때부터 확률상 가능성이 요원한
추첨권과 복권에는 목을 매고서
여기저기 손을 벌려 사행성 게임이과 도박에 몰방하면서
갖가지 핑계를 대며 취업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의 부모는 가진 것은 없었으나
이른 시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고된 일을 하며
자식들을 고등교육까지 마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런 부모를 원망하며
가난한 부모 탓에 자신은 불행한 복을 타고 나서
애초에 복이 없다느니
행복은 무슨 얼어 죽을 행복이냐며 절망할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행과 불행을 논하며 복을 말할 때
그의 부모나 주변 사람 중에 아, 그랬었구나! 하면서
동의하여 진심으로 안타까워 품어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만약에 있다면
그들은 어떤 마음에서 그를 품어줬을까요?
저는 매우 궁금하여 묻겠습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뭔 줄 아십니까?
그건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절대적 빈곤 사회에서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곧 삶의 전부였기에
뒤를 돌아볼 여유도 비교할 시간도 없이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물불 가릴 것 없이 뛰어듭니다.
그런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
상대적 빈곤 박탈감 사회에서는 배고픔은 해결됐지만
주변에 흥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밟혀 비교에 몰입되어
의욕을 잠식 무력해져 끝내 고립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배는 부르되
마음은 굶주린 시대의 현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세계적으로 보아도
절대적 빈곤의 시대보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이 만연한 사회에서
범죄는 더 잔혹해지고,
흉포한 범죄가 일상처럼 반복된다는 사실이
이미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이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솔직히 이 질문을 되묻고 싶습니다.
과연 가정과 교육기관,
그리고 회사라는 사회적 장치들이
한 사람이 꿈에
단 한 발짝이라도 다가설 수 있도록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가능했을까요.
IMF 이전, 기성세대의 시대에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는 단호히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오.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철옹성을 쌓아
기회와 자리를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좋은 회사의 취업에서부터
무전유죄, 유전무죄,
부익부 빈익빈이 굳어져 버린 이 현실은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동기 부여는 없이,
잘 흘러가던 판을 뒤집어 버리고
기성세대의 욕심만을
다음 세대에 강요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식을 위한다는 이름의 올가미를 씌워
아이의 취향과 특성은 외면한 채,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고등교육을 강요하고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학사모를 씌워 주며,
정작 꿈을 좇아야 할 청춘의 앞길을
스스로 흩트려 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묻고 싶습니다.
부모와 직장, 그리고 사회는
그가 흥미를 느끼고 잘할 수 있는 방향을
과연 지지해 주었는지,
아니면 막 돋아나던 가능성을
애초에 꺾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라고.
추신 : 좁쌀이 천 번 구를 때
수박은 한 번만 굴러도 되는 현실을
보고도 못 본 체 외면한 것은 아닐까.!
건강한 꿈은 내일을 향하고 있었으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한 기회비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때가 기회였음을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와 탄식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현실은 인정하되 난관을 뚫고 나갈 지혜를 찾는 자만이
절망을 기회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역량을 쌓은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누리며 유유자적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끝.
첫댓글 요즘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죠 사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본인 인생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남의 말 안 듣습니다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차리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둬야지 옆에서 아무리 충고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는요^^
진짜 이상한 사람들 많아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