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승현 집사 1주기 추도식(2020.1.29.)
집례 송병구 목사
조용한 기도/
찬송/ 373장
기도/ 김순호 권사
성경/ 요한복음 11:11-16
설교/ ‘우리 친구, 김승현’
고인의 발자취(영상)
아버지의 기도/ 김예지
추모송/ 요한-야고보선교회
인사/ 김철민
찬송/ 211장
축도/
‘우리 친구, 김승현’
요한복음 11:11-16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란다.
꼭 1년 전, 김승현 집사님이 소천하였다. 온 교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치루었다. 가족의 심정이야 오죽 했을까, 우리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참으로 슬프고 또 아픈 사건이었다. 생각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렇게 진한 이별을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너무 짧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에게 사랑할 시간이 늘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정작 사랑하려고 할 때면 기회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늘 강조하는 ‘부부 간에 뜨겁게 사랑하고, 자녀와 함께 행복하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댁을 방문하시는 내용이다. 나사로가 병들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틀을 지체하던 끝에 방문하셨는데, 그 사이 결국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의 가족은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였고, 좋은 후원자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비유이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처럼 정말 잠든 것이라면 나사로의 죽음은 깨우면 될 것이다. 죽음이 잠이라면 아침에 깨어나는 것은 ‘부활의 자매’라는 말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시 천국에서 깨어날 것이란 소망으로 깊은 잠에 든다. 그것은 위대한 믿음이다.
교회사에서 나사로는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로 표현한다. 러시아정교회 십자가를 ‘나사로 십자가’라고 부르는데, 십자가 안에 담긴 부활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 ‘영원히 갇힌, 변할 수 없는 실체로서의 죽음’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어둠이 영원하지 않듯, 잠이 계속되지 않듯, 어둠 가운데 빛이 깃들고, 아침이 오면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열린, 임시적인, 잠재적 희망’으로 말씀하신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문을 만류한다. 언감생심 지금 유대 땅으로 들어가시면 분노하는 유대인의 돌에 맞는다는 것이다. 유대인 기득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경계하였고, 증오심으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 공감하면서 행동으로 옮긴 제자가 있었다. 그는 도마였다. 도마는 나사로에게 가시려는 예수님을 따라 동행하자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편견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도마를 가리켜 진리를 추구하는 인물로 소개한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께 주님이 말씀하신 그 길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히 유명하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길이시다. 하나님께 이르는 진리이시다. 영원한 생명이시다.
나사로를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라 부르신 주님은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 친구 김승현’이라고 불러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누구나 인생에서 순탄한 길만 걷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그럴 때마다 똑똑한 사람은 해결책을 찾지만,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지난 해 오늘, 점심 무렵 김승현 집사님 소천 소식을 들었다. 그 시간에 멀리 지방에서 군포지방 지방회를 준비하는 워크숍에 참석 중이었다. 듣자마자 급히 떠나려고 서둘러 나서는 나를 보면서 한 분이 이렇게 말하였다. “색동은 우리와 달라요. 가족이잖아.”
그렇게 김승현 집사님의 부음은 가족을 잃은 슬픔과 다름없었다. 우리 색동가족 모두 형제를 잃고, 식구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교회가 진정한 신앙공동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친구, 김승현”이 아닌가? 신앙의 우정이고, 의리이다.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모든 색동가족이 내 형제, 내 가족처럼 한 마음으로 함께 고인을 모시는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은 한 번 다녀가지만, 가족은 평생 같이 간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 양면이 있다고 말한다. 전도서는 그래서 역지사지를 기억하라고 한다.
‘어둠/빛, 수고/쉼, 연약함/강함, 애통/위로, 눈물/웃음, 파종/수확, 괴로움/평안, 슬픔/기쁨, 그리고 십자가/영광, 죽음/영원한 삶’이 있다.
단순히 양 극단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두 가지 면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한 가지 면만 보고 슬퍼 말라는 것이다.
김승현 집사님을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의리가 많던 모습이 생각난다.
- 목사집의 추운겨울을 염려해서 그 바쁜 분이 찾아와 커다란 거실 유리창에 비닐을 씌워 주었다. 커다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였다.
- 한 밤 중에 전화를 걸어온 적도 있다. 포르투갈 파티마에 왔는데 십자가가 너무 많아 무엇을 골라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내게 줄 선물을 고르는 중이었다.
- 우리가 새 예배당을 찾을 때, 그가 이 건물을 추천하였다. 내가 그가 한 제안을 듣자마자 비 오는 날 여기를 답사하였다. 저 건너 육교 계단참에서 우산을 쓴 채 이 곳을 향해 기도했던 일이 벌써 7년 전 일이다.
- 한 때 건설회사 사업이 실패하였으나 끝내 다시 일어설 희망을 품고 살았다. 결코 주눅 들지 않았고, 나만 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크게 손해를 보면서도 모두가 살려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더 힘들게 살았다.
돌아보면 김승현 집사님은 비겁한 적이 없다. 의롭고, 따듯하고, 남을 돕고 선한 일에 힘썼다. 아내를 아주 사랑하였고, 두 자녀를 늘 자랑하였다. 그리고 색동교회를 참 아꼈다. 무엇보다 고향의 아버지와 형제자매에게 막내로서 애정이 참 많았다. 그래서 누구나 그를 믿고, 신뢰하였다. 아주 편안하고 좋은 듬직한 믿음의 친구였다.
그는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끝까지 진심, 연민, 신의, 정직함을 지키라고...
그는 무엇보다 마음이 가난하였고, 모든 사람을 부요케 하는 가슴을 지녔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기억하신다. 우리도 그를 잊지 말고, “우리 친구, 김승현”과 함께 언제나 동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김승현 집사님의 삶을 기억하시고, 그가 사랑한 아내와 두 자녀에게 크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길 바란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넉넉하신 은총의 힘이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 모두의 인생에 빛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