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박연차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문
노무현 전 대통령이 7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에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연루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 대국민 사과문을 올렸다.
아래는 사과문 전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
사과드립니다.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미리 사실을 밝힙니다. 지금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검찰의 조사에 응하여 진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분의 법적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에 관하여도 해명을 드립니다. 역시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퇴임 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조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호의적인 동기가 개입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성격상 투자이고, 저의 직무가 끝난 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았고, 실제로 사업에 투자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사실대로 밝혀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9년 4월 7일
노 무 현
[1995년] 최초의 국산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준공
36년 역사를 지닌 국내 원자력계의 오랜 숙원이던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HANARO)’가 국내 기술진에 의해 건설돼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4월 7일 대덕 한국원자력연구소 에서 준공식을 갖고 본격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개발 연혁에 새 지평을 열었다. 정 근모 과기처 장관,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을 비롯, 중국, 인도, 캐나다, 태국, 터어키.인도네시아, 베트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저명 원자력 관련인사 및 주한 외교사절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번에 준공된 ‘하나로’ 는 가장 어려운 안전성 확보문제를 순수 국내 기술로 완전히 해결함으로써 우리의 원자력 기술능력을 국제적 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데서 보다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로’ 는 핵연료로 20% 저농축 우라늄 사용을 전제로 설계, 건설되었기 때문에 대·내외 핵투명성을 확보함으로써 보다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 연구개발에 활성화를 기할 수 있게 됐다. 현재 가동 중인 세계 320여기의 연구용 원자로 가운데 성능과 활용 면에서 세계 10위권을 자랑하는 ‘하나로’ 가 내년 30메가와트 정상 출력 도달에 이어 각종 활용시설의 완공으로 풀가동되면 국내 원전의 안전성 향상을 비롯하여 진단·파괴·치료용 동위원소의 대폭적인 생산 및 해외수출과 차세대 반도체 등의 첨단 신소재 개발, 생명공학 연구 등 산업 및 의료계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4월 7일을 기해 ‘하나로’ 준공기념우표 3백만장을 발행 하였다.
[1976년] 독립운동가 오광심(吳光心) 별세
1910. 3. 15 평북 선천~1976. 4. 7.
김학규(金學奎)의 부인이다. 1931년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혁명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김학규가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와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난징[南京]에 갈 때 동행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5당 통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여군으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으며, 11월에 시안[西安]에 본부가 설치되자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그뒤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1944년 광복군 초모공작이 전개되자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을 통해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했다. 8·15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면서 1947년 선양[瀋陽]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76년] 등소평 ‘천안문 사태’의 배후자로 지목돼 세번째 실각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北京]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톈안먼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였으며,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1969년] 시인 신동엽 사망
← 시인 신동엽
시대를 고민하며 아프게 살다간 시인 신동엽이 1969년 4월 7일 사망했다. 시인은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전주사범과 단국대 사학과를 나왔으며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농촌의 서정이 짙게 밴 민요적 분위기로 민중과 민족의 삶을 이야기해 고 김수영 시인과 함께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대지의 맥박’이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 그의 시세계는 1980년대에 들어와 민족-민중문학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우리 문학의 확고한 기반의 하나로 재평가받았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서사시 ‘금강’은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화한 것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금강’은 한민족 근대사의 가장 장엄하고 처절한 장면들을 때로는 유장하게 때로는 급박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는 시론과 시극운동에도 참여해 ‘시인정신론’ 등의 시론을 출간했으며,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시극동인회에 의해 상연되기도 했다./조선
[1966년] 소설가 박계주(朴啓周) 사망
1913. 7. 26 간도 용정~1966. 4. 7.
흥미 위주의 신문소설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다룬 소설을 썼다. 호는 서운(曙雲). 박진(朴進)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구산소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 영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계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34년 중앙선도원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예수〉를 창간했으며, 1937년 〈새사람〉 편집장을 지냈다. 8·15해방 후 김영주·조풍연과 고려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차렸고, 6·25전쟁 때는 박영준·김용호와 납북되던 도중에 탈출했다. 이어 〈죄없는 죄인〉·〈순애보〉 등이 영화화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1963년 연탄 가스 중독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었다. 중학교 시절 단편 〈적빈〉이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금강산 여행중 구상했던 〈순애보〉가 1938년 〈매일신보〉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대중적이고 흥미 위주의 소설에 주력해 〈오랑캐〉·〈처녀지〉 등을 발표했으나 한국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해방후에는 단편보다 장편을 많이 썼는데, 특히 〈진리의 밤〉(경향신문, 1948. 10~1949. 4)은 대표작 〈순애보〉와 마찬가지로 삼각관계 속에서의 희생정신을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집으로 〈순애보〉(1939)·〈처녀지〉(1948)·〈진리의 밤〉(1952) 등이 있고, 1952년 평범사에서 〈박계주선집〉을 펴냈다./브리태니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발족, 한국신문윤리강령 선포
1957년 4월 7일, ‘신문의 날’을 기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창립돼, 처음으로 신문윤리강령이 제정됐다.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편협)가 발족되고, 한국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됐다. 이날은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일(1896년)이자 제1회 맞는 ‘신문의 날’(1957년)었기에 우리나라 언론인들에게 그 의미가 더했다.
이날의 단행은 편협 구성과 윤리강령 제정은 이승만 정권이 출판물 단속법과 국가보호 임시조치법 등으로 언론의 목을 조여왔고, 정부와 자유당도 언론이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는다며 비난의 강도를 높이자 권력에 언론탄압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언론계 스스로 책임과 권위를 지키는 제도를 구성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비롯됐다.
윤리강령은 5ㆍ16 군사정변 후인 1961년 7월 30일 수정ㆍ보완되었고 이 해 8월 3일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와 ‘한국통신협회’에서, 그리고 1963년 3월 5일 ‘한국신문인협회’에서도 채택해 명실공히 우리나라 언론헌장으로 자리잡았다. 자유, 책임, 보도와 논평의 태도, 독립성, 타인의 명예, 품격 등 여섯 항으로 되어있다.
[1953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에 피선
1953년 4월 7일 다그 하마슐드(Hammarskjöld, Dag, 1905~1961)가 노르웨이의 트리그베 리(Lie, Trygve, 1896~1968) 유엔 사무총장의 뒤를 이어 임기5년의 새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이날 하마슐드는 "세계평화와 진보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유엔기구를 지도하겠다"고 공약했다.
하마슐드의 사무총장 선출은 소련과 서방의 교착 상태를 해소하고 한국전쟁의 휴전협상 이후 최초로 양측이 서로 합의한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후 하마슐드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과 위협에 관심을 가졌다. 1956년에 일어난 수에즈 운하 위기를 해결했고, 1958년 레바논-요르단 위기에서도 활약했다. 또한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령 콩고가 `콩고 공화국`으로 독립하자 이 지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UN군을 파견했다. 1961년 모이즈 촘베 대통령에게 평화사절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사망 후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
[1948년] 세계보건기구 창설
1948년 4월 7일 공중보건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국제 협력을 촉진시키기 위해 국제연합(UN)의 특별기구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창설되었다. 이 기구는 1923년에 설립된 국제연맹 산하 보건기구와 1909년 파리에 설립된 국제공중보건사무소의 전염병 통제, 격리조치, 약물표준화에 관련된 특수한 업무를 계승하는 등 보건기구 헌장의 범위 내에서 폭넓은 권한을 위임받았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WHO는 세계보건총회, 집행위원회, 사무국 등 3개 주요기관에 의해 운영된다. WHO는 중앙검역소 업무와 연구자료 제공, 유행병 및 전염병에 대한 대책 후원 등의 업무를 추진한다. 천연두 박멸은 WHO의 주요 성과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1947년] 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Ford, Henry, 1863~1947) 사망
포드 자동차의 창설자이며 ‘자동차 왕’으로 불리운 헨리 포드가 뇌출혈로 1947년 4월 7일 사망했다. 83세였다. 포드는 16세에 기계공이 되어 1903년, 40세 때 포드 자동차를 설립했다.
1908년에는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T카’를 개발, 당시 미국에서 대당 1천달러 이하의 차가 전무한 상황에서 대당 850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해 자동차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T카’는 가격이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견고성과 실용성에서도 뛰어났다. ‘T카’의 또 다른 특징은 간결한 설계와 튼튼한 차체구조였다. 4기통 20마력이라는 당시로서는 힘 좋은 엔진을 탑재했다. 운전조작이 용이하고 설계가 표준화되어 있어 초보자라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T카’가 등장할 당시의 미국은 대기업시대의 도래와 대량생산, 대량소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포드는 ‘기업은 저가격과 고임금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경영이념을 평생 유지했다.
[1922년]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 출생
1922년 4월 7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한 공업전시회에서 목조각 《사슴》으로 상을 받았다. 함흥제1공립보통학교와 춘천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전 일본에 유학하여 사설 강습소에 다니다가 1948년 도쿄예술원에 들어가 미술교육을 받았고 1949년에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조각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952년 일본의 제37회 이과전에서 《백주몽(白晝夢)》으로 입상하였고,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졸업한 1953년에는 제38회 이과전에서 《말머리》로 특선을 받았다.
1959년 귀국 뒤에는 주로 테라코타와 건칠(乾漆)을 사용한 두상조각과 흉상을 제작하였다. 고도로 절제된 긴장감과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조각을 통해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제자인 장지원을 모델로 한 《지원》을 비롯하여 《영희》,《홍자》, 《경자》 등 주변의 여인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지나치게 길게 내민 목과 사선으로 좁게 처리된 어깨가 특징적이다. 특히 목을 길게 앞으로 내민 것은 마치 영혼의 소리를 들으려는 구도자의 자세처럼 느껴져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1966년 홍익대학교 조각과와 서울대학교 건축과에서, 1972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65년 수화랑 기획에서 45점을 가지고 첫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1968년 도쿄의 니혼바시[日本橋] 화랑, 1971년에는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73년 5월 4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하였다.
사후에는 〈1주기 유작전〉(명동화랑, 1974), 〈권진규 뎃상전〉(부산공간화랑, 1975), 〈15주기 대규모회고전〉(호암갤러리, 1988), 〈권진규 조각전〉(부산공간화랑, 1997) 등이 개최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모자상》, 《손》(1968), 《여인흉상》, 《마두》, 《지원의 얼굴》(1967), 《낙토(樂土)》(1964) 등이 있다.
[1916년] 서양 화가 유영국(劉永國) 출생
1916. 4. 7 경북 울진~2002. 11. 11 서울.
1938년 도쿄[東京] 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고 그룹 활동을 통해 일본에서 1930년대 후반 추상미술운동을 벌였던 대표적인 작가이다. 한국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던 이 시기에 기하학적 추상형식을 선보여 국내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1937년에 결성된, 전위미술을 표방하는 작가 모임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김환기·이중섭 등과 함께 참가하고 1940년에는 그 경성전을 열었으며, 역시 추상회화를 표방한 동인 ‘N. B. G(Neo Beaux Arts Group) 양화전’에도 참가했다. 이후 신사실파전(1947), 모던아트전(1957) 등을 통해 활동했고 주로 간결하고도 구축적인 화면구성의 기하학적 추상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8·15해방 후에는 산·호수·나무 등 자연대상을 주요 작품 주제로 삼아 간결한 기하학적 방식으로 그려냈다. 1962년에는 추상미술활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펼치기 위해 신상회(新象會)를 구성했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 출품작가로, 1978년 파리 살롱 드 메에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한국미술대상전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표현적 경향을 띠기도 했으나 대체로 간결하고 정돈된 기본형의 자연을 원색의 대비로 그려냈다. 화면 전체를 색면으로 분할하고 부분적으로 빛의 흔적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처음 제정돼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발족되고 ‘한국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된 날도 1957년의 이날이므로 우리나라 언론인들에게는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독립신문 발간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였다. 서재필이 발의하고 온건개화파가 나서 신문발간을 서두르자 정부도 창간자금 4400원과 사옥, 심지어 생계비까지 지원하며 독려했다. 창간 후에도 지방관청과 각급 학교에 구독을 권장하며 부수확장을 도왔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크기로 4면 발행이었다. 1∼3면은 순한글판, 4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이었다. 초대 사장 겸 주필은 서재필이 맡았고 직원은 고원(告員) 또는 탐보원(探報員)으로 불린 기자 2∼3명을 포함, 10명 안팎이었다. 신문값은 동전 1푼, 즉 동전 한 닢으로 출발했다.
300부로 시작한 발행부수도 한때 3000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재정자립을 이루지 못한 신문사에 파국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이권침탈 비판에 앞장서자 정부가 사옥을 회수하고 친러 수구파가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899년 12월 4일, 3년8개월 만에 종간됐다./조선
[1889년] 칠레의 시인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출생
1889년 4월 7일 태어남 / 1957년 1월 10일 죽음
미스트랄은 1945년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또한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이다. 그녀는 칠레 북부 안데스 산맥의 한 마을에서 스페인 바스크족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 일찍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경부터 지방신문에 작품을 발표했고, 25세 때 <죽음의 소네트 Sonetos de la muerte>로 칠레상을 받음으로써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1년 칠레의 명문 여자 중학교의 교장을 거쳐, 멕시코와 미국에서도 교육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약 10년간은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국제연맹을 위해 일했다. 이후 칠레 외무부에서 일종의 자유직 문화사절로, 또한 명예 영사로 일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연인에 대한 사랑에서 모성애, 인류애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시로 표현했다.
[1884년] 영국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Bronisław, 1884~1942) 출생
폴란드 출생. 크라쿠프대학 졸업 후 W.분트, J.프레이저 등의 영향을 받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였다. 1914∼1920년 트로브리안드섬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집약적 현지조사를 하여 1927년 런던대학 교수가 되었다. 문화인류학에서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분석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을 지향하여, 기능주의라는 연구방법을 창시하여 사회 ·문화 연구에 새 국면을 열었다. 그는 기능이란 전체에서 부분의 역할임과 동시에 제도 ·관습이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작용이며, 문화는 상호 관련하여 하나의 통합적 전체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집약적 조사에 의한 현실적인 여러 관계의 기술과 그 설명적 이론을 중시하여 비역사적 ·심리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학설을 전개하였다. 그의 입장이나 이론은 후에 여러 가지로 비판받았으나, 현대의 인류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주요 저서에 《미개사회에서의 범죄와 관습》(1926) 《미개인의 성생활》(1929) 《과학적 문화이론》(1944) 《문화변동의 동태(動態)》(1945) 등이 있다.
[1883년] 이탈리아 화가 세베리니(Severini, Gino) 출생
← Gino Severini, aged 30, at the opening of his one-man exhibition at the Marlborough Gallery, London
1883. 4. 7 이탈리아 코르토나 ~ 1966. 2. 27 파리.
미래파와 입체파의 양식을 종합하여 이탈리아 외의 국가에서 미래파 운동을 인정받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후에 저명한 미래파 선구자가 된 이탈리아의 점묘파 화가 자코모 발라의 문하생으로 1900년에 그림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의 새로운 회화에 관한 발라의 이야기에 자극받고 1906년에 파리로 옮겨가 입체파 화가 브라크와 피카소,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 등의 주도적인 프랑스 전위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는 1910년까지 줄곧 점묘법을 이용한 작업을 했으나, 그해에 밀라노의 시인 마리네티가 최초의 미래파 선언문을 작성하자 거기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는 표면상으로는 미래파의 공식적인 미학적 입장을 지지했지만, 그림에서는 인물을 형상과 속도의 원천으로 사용했다.
그는 특히 밤의 술집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율동적 형태와 활기 있고 명멸하는 색채로 화면을 가득 채움으로써 운동감과 음향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타바린 무도회의 움직이는 상형문자 Dynamic Hieroglyph of the Bal Tabarin〉(1912, 뉴욕 현대미술관)는 밤 생활을 다룬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이 작품은 입체파의 콜라주 기법(춤추는 사람들의 옷에 붙인 실제 의복장식)과, 가위 위에 올라탄 사실적 누드와 같은 엉뚱한 요소들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세베리니는 〈적십자 열차 Red Cross Train〉(1914,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와 같이 전시를 다룬 작품들에서 잠시 동안 전쟁과 기계의 힘을 찬양하는 미래파의 원리를 드러내보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점차 입체파의 독특한 형상에 경도되어가면서 〈빛의 구심적 팽창 Spherical Expansion of Light〉(1914, 밀라노 리카르도와 마그다 주케르 컬렉션)에서 보여지듯이 여전히 점묘파와 미래파의 장식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세베리니는 1921년에 신고전주의적인 구상양식으로 선회하여 남은 생애 동안 많은 장식 패널과 모자이크를 제작하면서 줄곧 그 화풍을 견지했다./브리태니커
[1770년] 영국의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Wordsworth, William, 1770~1850) 출생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생이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이 호수지방에서 보냈다.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백부의 보호로 1787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는 프랑스와 알프스 지방을 도보로 여행한 일도 있다. 1791년 학교를 마치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때마침 절정기에 이른 프랑스혁명의 이상(理想)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를레앙에 머무는 동안 A.발롱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깊이 빠져 딸을 낳기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숨겨져 왔다.
1793년에 《저녁의 산책》과 《소묘풍경(素描風景)》을 출판하였는데, 시형(詩形)은 상투적인 영웅대운(英雄對韻)이지만, 곳곳에 생생한 자연묘사가 돋보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가 악화되자 그는 공화주의적인 정열과 조국애와의 갈등 때문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 때 쓴 비극 《변경 사람들》(1796∼1797)에는 혁명과 고드윈적인 합리적 급진주의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1795년, 친구의 도움으로 누이 도러시와 레이스다운으로 옮겨 조용한 자연과 누이의 자상한 애정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1797년 여름에는 다시 올폭스덴으로 전거(轉居)하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S.T.콜리지와 친교를 맺으면서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798년 이 두 시인은 공동으로 《서정가요집》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콜리지는 초자연의 세계를, 워즈워스는 일상의 비근한 사건을 각각 다룸으로써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 영문학사상 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를 결정짓는 시집이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초기 대표시 《틴턴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다.
1800년 개정판을 냈으며,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스스로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詩語)를 배척하고 있다.
초판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들 세 사람은 독일로 여행을 떠나 고슬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향수 탓이었는지 그는 그 곳에서 한 영국 소녀를 주제로 한 《루시의 노래》를 썼고, 또한 자신의 시심(詩心)이 성장해온 발자취를 내면적으로 더듬은 《서곡 Prelude》(초판 1805, 개정판 1850)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독일에서 귀국한 뒤 누이와 함께 그래스미어 호반의 더브코티지에서 살았다. 1802년 누이의 친구 M.허친슨과 결혼하였는데, 이 무렵 동생 존이 사고로 죽고, 콜리지가 병석에 눕게 되는 등 심로(心勞)가 겹쳤고, 또 한편으로는 국외 정세의 변화로 해서 열렬한 애국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정가요집》 이후의 10년간이 시작(詩作) 면에서는 가장 왕성한 시기였으며, 그는 이 시기에 늙은 양치기와 그의 아들의 운명을 그린 《마이켈》(1800)을 썼고, 대표작 《서곡》을 완성하였으며, 이 밖에 《2권의 시집》(1807)을 내 놓았다. 이 시집에는 〈나는 홀로 구름처럼 헤매었다〉 〈홀로 추수하는 아가씨〉 〈무지개를 볼 때 나의 가슴은 뛴다〉 등의 주옥 같은 명시가 수록되었다. 특히 〈영혼불멸송(靈魂不滅頌)〉에서는, 어렸을 때는 순수한 넋을 지닌 인간이 자라남에 따라 신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인간관을 암시하고 있다. 1813년 그는 라이덜마운트로 옮겨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814년 장편시 《소요(逍遙) The Excursion》를 완성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도덕적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해져 갔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1820년경부터 점차 높아져 1843년에는 R.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옥석혼효(玉石混淆)라고들 하는데, J.톰슨, W.쿠퍼 등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워즈워스에 이르러 가장 심오해졌으며, 그리고 자연에의 미적 관심이 동양에 비하여 희박하였던 유럽에 있어 그와 같은 범신론적 자연관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영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문화의 역사상 커다란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1613년] 네덜란드 화가 도우(Dou, Gerrit) 출생
← 도우가 그린 패널 유화 자화상
Gerrit는 Gerard라고도 씀.
1613. 4. 7 네덜란드 레이덴~1675. 2. 9 레이덴.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 화가.
처음에는 유리직공이자 유리조각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628~31년 렘브란트의 제자로 공부하면서 주제 선택,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 면밀한 제도술, 그리고 빛과 음영을 극적으로 다루는 방법 등을 배웠다. 〈렘브란트의 어머니 Rembrandt's Mother〉(1630경,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박물관)가 그 좋은 예이다. 1631년 렘브란트가 레이덴을 떠나자 렘브란트의 영향력은 점차로 줄었으나 그는 작은 목판에 계속 그림을 그렸으며, 자신이 직접 장식하여 특별히 제작한 액자 속에 작품을 넣기도 했다. 이렇게 렘브란트풍의 초상화를 그리던 그는 세부묘사가 풍부한 네덜란드의 풍속화에 뛰어난 화가가 되었다. 색채는 점점 차가워졌고 기법도 더욱 세련되어갔다.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광택있고 매끄러운 표면처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중에서 필적할 만한 화가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물화는 그의 작품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젊은 어머니 The Young Mother〉(1658, 헤이그 모리초이스)처럼 그가 그린 부엌들은 야채·가금(家禽)·그릇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가장 독특한 기법은 '틀 속의 틀' 방식 또는 보는 이가 회색빛 돌로 된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이다. 1650년 후에는 〈야간학교 Night-School〉(1660경, 레이크스 박물관)처럼 촛불이 비추는 야경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도우의 보석 같은 효과와 정교한 완벽주의가 그의 많은 제자들의 작품에서는 종종 지루한 것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밖에
2004년 ‘의사-간호사 상호 존중 선언식’,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개최
2004년 일본 후쿠오카법원, 고이즈미총리 야스쿠니참배 첫 위헌 판결
2000년 언론인 고 최석채 선생, 국제언론인협회로부터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es)`으로 선정
1999년 한나라당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 설치
1997년 한보 청문회
1996년 박찬호 메이저리그 첫 승
1990년 미국의 흑인 목사.민권운동가 애버내시 사망
1982년 영국 포클랜드 주변을 전쟁구역으로 선포
1982년 미국 베일러의대, 인간유전자 복제성공 발표
1980년 미국 이란과 단교 선언
1980년 경찰, ‘수사권 독립’으로 검찰과 마찰
197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국 가맹을 승인
1976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수상에 화국봉 임명
1973년 핀란드, 남북한 동시승인 발표
1965년 미국, 위험천만 파워보트 경주
1961년 미국 유엔(UN) 감시하 총선 통한원칙을 재확인
1961년 유엔(UN) 총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비난의안 채택
1957년 캄보디아 시아누크 내각 성립
1956년 스페인 프랑코 정부, 모로코 독립 승인
1956년 이집트-이스라엘 가자지구서 교전
1953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에 피선
1949년 뮤지컬 ‘남태평양’ 초연
1945년 일본전함 ‘대화’ 오키나와 근해서 침몰
1939년 미국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출생
1939년 이탈리아, 알바니아 점령
1883년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 인천항 입항(10일 서울 도착)
1823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 사망. 샤를의 법칙 발견
1805년 베토벤 제3번 교향곡 ‘영웅’ 초연
1506년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증된 근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선교자 하비에르 출생
1498년 프랑스의 왕(1480-98) 샤를 8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