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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배우는 믿음(창16:16-17:5)-2022.10.2
사람이 살다보면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때로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에게는 침묵이 필요할 때가 많지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정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침묵도 세상에서의 침묵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침묵도 있습니다. 이른바 육신적인 침묵이 있고 영적인 침묵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침묵이 발생하는 원인입니다. 나로 인해 발생하는 침묵이 있고, 상대방에 의해서 발생하는 침묵이 있거든요. 저는 오늘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도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과는 기도를 통해서 관계하고, 어떤 이들은 예배를 통해서, 어떤 이와는 찬양을 통해서, 혹은 말씀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경험을 매일매일 꾸준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순간에만 경험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번도 그런 경험을 가져 본적이 없다거나, 혹은 지속적인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험을 갖고 있을지라도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해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영적인 깊이가 다를지라도 대부분 그런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경험들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전에는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졌을지라도 지금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아마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침묵은 둘 중 하나일 테니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침묵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침묵하시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침묵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침묵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이 대부분 상황이 좋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적막할 때였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었다는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한번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간의 관계가 좋을 때 침묵합니까? 관계가 좋지 않을 때 침묵합니까? 대부분 서로간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침묵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원인이 하나님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을까요? 두말 할 것 없이 그 원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로 어느 때에 침묵하실까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심각한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원망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무너져가는 유다왕국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하박국1장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냐는 것이지요. 하박국은 하나님을 닦달하듯이 따집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을 못 본 척 하시냐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침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시달릴 때 하나님은 무려 430년 동안이나 침묵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거든요.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시지요. 다만 당신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처럼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하심으로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사사시대 350년 동안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이방인들로부터 압제를 당한 것이지요. 그것도 짧게는 수년에서 십 수 년 동안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간에도 무려 7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에 침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와주지 아니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때 하나님은 무엇하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곁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지 아니하셨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지요. 그것은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고, 모세도 미디안광야에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도 총리가 되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을 믿음으로 잘 견뎌내고 승리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불과 며칠간의 하나님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해 대형 사고를 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불과 40일간의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분노케 한 것입니다. 아무리 길어도 40일인데 말입니다. 그것을 참지 못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한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보다 불과 몇 시간동안 무덤 속에서 침묵하신 주님을 기다리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 같은 제자도 몇 시간의 예수님의 침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루저녁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이나 이스라엘민족이 불과 몇 시간의 하나님의 침묵을 받아들이지 못해 실패한 사례도 있고, 혹은 십 수 년의 침묵을 이겨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이나 보지 못하는 것들은 지금 당장 내가 경험한 것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을 증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침묵은 답답하고 암울 할 것입니다. 때로는 속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침묵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계십니다. 비록 나의 잘못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기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시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기간은 하나님이 나를 더 성숙한 단계로 점프시켜주시는 시간으로 삼으시는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한 자녀라면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을 무조건 외면하지 말고 침묵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숙케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 믿음을 하나님께 증명해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묵에도 영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침묵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영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사실 침묵은 나보다 하나님이 더 답답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날한시도 우리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죽하시면 침묵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분명히 내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지요.
비록 잠시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금방 풀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조급해하십니다. 우리와 막힌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안달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속성도 강하시지만, 성격이 매우 급하시고 빠르십니다. 한번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미루지 아니하십니다. 즉각 이루어주십니다. 이사야서65장24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보다 훨씬 더 빠르시고 바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일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침묵을 통해 당신의 믿음을 더 좋은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더욱 성숙한 자리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침묵 속에서 믿음을 배운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침묵을 통해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침묵을 통해서 그동안 기다리지 못하는 나에게 기다림을 배우게 하십니다. 침묵을 통해서 잠잠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하십니다. 침묵을 통해서 안락한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하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유발시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원인은 나의 잘못이나 실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입니다.
(2)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침묵
물론 하나님의 침묵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양상이 다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 참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입니다. 이른바 둘 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시간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공식적으로 13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만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친구는 아무 때나 부담없이 만나는 관계요, 속에 있는 비밀도 감추지 않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고,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이며,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12:2).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약속이 성취될 기미가 안보인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이 늙어갑니다. 근력은 떨어지고 기력이 쇠하여져 갑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85세입니다. 당연히 자기보다 열 살이 적은 사래의 나이는 75세겠지요.
무엇보다 아내의 나이가 문제였습니다. 곧 있으면 사라의 몸에 경수가 끊어질 텐데 무슨 재주로 후사를 얻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언제 자기 이름이 창대케 된단 말입니까? 또한 어느 세월에 복의 근원이 된단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립서비스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순간 사래가 기발한 제안을 합니다. 자기 몸종 하갈을 취하여 후사를 얻자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리는 자는 것이지요. 하루라도 빨리 근력이 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혹시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의 차이를 아십니까?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이요,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아는 불신앙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 밖에서의 무신론이요, 율법주의는 하나님 안에서의 무신론이지요. 둘 다 불신앙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마치 율법주의는 불신앙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율법주의는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불신앙이지요. 한마디로 인본주의가 무신론적 불신앙이라면, 율법주의는 유신론적 불신앙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인정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성도들이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장에 나오는 탕자비유를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이 탕자라는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진짜 탕자는 누구입니까? 맏아들이지요. 물론 둘째 아들도 탕자는 맞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인본주의식 탕자요, 첫째 아들은 율법주의식 탕자라는 말이에요. 둘째 아들이 인본주의식 탕자라는 말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불효자였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단순히 자기를 낳아준 생식적인 보호자요, 자기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채무자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대리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거예요. 때문에 자식의 도리나 책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자기를 마땅히 책임져야 할 채무자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마치 자신이 채권자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이나 죄송함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하여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므로 인하여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게 되지요. 그러나 진짜 탕자는 아버지 집에 있던 맏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노골적으로 괴롭힌 적도 없었습니다.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없는 모범생 같은 아들이었지요. 그는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효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아버지를 자기 유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주도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척 했던 것이지요. 자기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거예요.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여우가 두루미를 자기 집으로 식사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접시에 스프를 준비하여 주둥이가 긴 두루미가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음에 두루미가 여우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복수를 하지요. 입이 좁은 병에 음식을 담아서 여우가 먹지 못하게 보복을 한 거예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기준에 맞춘 것입니다. 마치 집안에 있던 맏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는 맞춤형 효도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맞춤이 아버지에게 맞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춘 것입니다. 율법주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구별이 안됩니다. 사실 가장 분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차라리 완전히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방인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지만 은근히 교회 안에 자기 생각과 자기 주관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마치 집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은 누가 보더라도 쉽게 탕자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었던 맏아들을 탕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최소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을 율법주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브라함을 모독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감히 누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율법주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아브라함이 99세가 되기까지의 믿음은 율법주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꼼수를 부린 거예요.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서 대형사고를 치게 된 것이지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생산한 거예요. 그것을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인본주의라기보다는 율법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다만 그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이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방법도 있지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드리는 방법도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자기들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드리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갈을 통한 후사를 생산하는 방법이지요.
이로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후사에 대한 언약을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후사에 관한 언약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후사에 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지요. 결국 그는 자기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드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방식을 우리는 율법주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율법주의 신앙에 기초한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은 그로부터 13년간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중단하십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침묵이 시작된 것이지요.
(3) 침묵 속에서 배우는 교훈
그러면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뭐하셨습니까?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버리셨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신 것처럼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아무 흔적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기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중단치 아니하셨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아브라함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전개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인간의 시선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인간의 역사에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시간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다리시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많은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아들이 준비가 안 된 거예요. 너무 어려서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유업으로 받을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사실 아들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린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13년간이라는 공백기가 필요했던 것도 이런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하기가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신 것이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주저 없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대로 수용하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에게는 인간적인 꼼수를 부릴 만큼의 뭔가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아직 남자구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정력이 남아 있었단 말이지요. 또한 그런 호사를 부릴 만큼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제거되기를 기다리신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그것을 의지하려는 강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의지하고 싶은 종교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보다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속성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보다는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는 말이에요. 전문가들에 의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할 때 힘이 남아 있는 사람보다 힘이 빠진 사람을 구하기가 쉽다합니다. 힘이 남아 있으면 자기 스스로 발버둥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이 빠지면 구출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구출하기가 쉽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아직 남아 있는 힘을 빼는 작업을 하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제거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때가 하나님이 쓰기에 가장 적합한 때거든요. 하나님은 그때를 기다리신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보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때는 우리가 보는 때와 전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물을 끓이려고 불을 가열할 때 90도가 넘는다고 물이 끓는 것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99도에서도 물은 끓지 않습니다. 반드시 100도가 되어야 물은 끓는 법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하나님도 그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만지시기에 가장 좋은 때를 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 때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때가 99세입니다. 그 때에 그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창세기18장11절에서 그들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한마디로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생식적인 기능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육신적 기능이 다 상실된 것이지요. 더 이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됩니다.
찬송가343장의 가사처럼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합니다. 참아도 못하고 눈물 많이 흘려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일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비록 침묵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입고 있던 율법의 옷을 벗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품고 있던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육신의 마음과 생각이 죽어질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이른바 육신의 정욕과 혈기가 빠질 때를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허송세월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믿는 자를 다루시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시간 속에서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드디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모든 기력이 쇠하고 근력이 빠질 때입니다. 자신감도 사라질 나이요, 인간적인 낙도 시들어질 나이입니다. 서서히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나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최소한 13년간의 침묵을 깨뜨리시고 말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을 다루시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동안 아브라함은 답답하고 암담한 시간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무섭고 두려운 시간을 보냈을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늦둥이 이스마엘의 재롱을 보며 세상 재미에 푹 빠져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속단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며 누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인격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버리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미워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을 지켜보시며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아브라함이 될 때까지 아브라함을 고독하게 만들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사모함과 갈급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여전히 그 시간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침묵의 시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니까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가장 성숙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당신의 침묵을 해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브라함이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침묵을 해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완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온전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침묵을 해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완전한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받아들이기 가장 좋은 때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비록 2%가 부족할지라도 말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부족함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지요. 이제는 잔머리 굴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거예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입니다. 아브람은 큰 아버지라는 뜻이요,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 아브람이 아니라, 만민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사래도 사라로 개명해주십니다. 공주라는 뜻의 사래가 아니라 열국의 어미 사라로 개명해주신 것이지요.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씨와 땅과 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의 씨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며,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통해 약속하신 언약을 빠짐없이 지켜주셨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그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이 훨씬 더 큰 능력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침묵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또한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말을 배우는 것은 2년 정도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침묵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믿는 자는 영적인 침묵을 믿음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침묵을 통과하시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침묵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결정적으로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호소하였습니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당신의 뜻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은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확고부동한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알았고,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침묵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최고의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침묵은 말이 없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또 다른 언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침묵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언어입니다. 침묵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언어가 들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들리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이사야서49장14절과15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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