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그러므로 황면노자가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망령되이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사에 탐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하라 하시니라. 과거사에 혹 선(善)과 혹 악(惡)을 사량치 말지니,
사량한 즉 도를 장애하리라. 미래사를 계교치 말지니, 계교한즉 광란하리라.
현재사가 면전에 이르거든 혹 역(逆)과 혹 순(順)을 또한 뜻붙이지 말지니,
뜻을 붙인 즉 마음을 요동케 하리라.
―《서장(書狀)》―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자칫 상충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다 함께 살려나갈 수 있어야
올바른 화두 참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두 참구시에 오로지 깨침을 중시하다보면,
다만 미래의 향상사에만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매어놓고
중생지견 가운데서 알음알이를 지어 깨닫기를 기다리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선 측으로부터 간화선은 대오선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치중하다보면 깨침을 법칙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방편시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살려나갈 수 있는 중도적 방법은 무엇일까?
본래 불교에서는 제행무상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을 기다리지 않고 화두를 드는 입장에서는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인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되어야 한다.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더 이상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사량치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전일념(現前一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념을 단속해서 화두를 들것이요,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오직 ‘이 뭐꼬’하는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뚜렷해지는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단을 갖는다는 것은 견성체험을 살리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모르겠습니다’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알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난다.
정작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이 ‘모르는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견해’ ‘내 여건’ ‘내 상황>’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잘못 알고 있는 악지 악각(惡知 惡覺)을 쓸어 없애주는 것이다.
즉 ‘나, 나의, 나를’을 사라지게 하며, 비로소 올바른
정지견(正知見)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을 얻기 전에는 완전히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여올여치(如兀如痴)하게 지내면서 분별지해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
다만 모른 채로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챙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깨치고 못깨치고에 상관없이 화두가 한 조각을
이루어(打成一片) 의단이 독로해지고 시시각각으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껴나가 안락의 법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컨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비록 견성체험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성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조사선의 초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번뇌망상을 다스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이리 차별적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근원적 의심을
비롯한 천가지 만가지 의심을 오직 하나의 의심으로 응축시켜 ‘오직 모를 뿐’
인 마음가짐으로 화두로 곧장 나아가, 이 한 가지 의심덩어리를 타파시킴으로써
천만가지 의심을 일거에 타파하고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