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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 & Reader 이문열, 시대를 쓰다
“난 속임수도 많이 썼다” 이문열 글쓰기의 영업비밀
카드 발행 일시2024.09.23
에디터
이문열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25. 내 문장, 내 글쓰기의 비밀
내 소설의 성공 비결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내 문장에 주목하곤 했다.
“현란하고도 유려한 문체”야말로 내 작품을 가장 ‘이문열적’이게 하는 요소라고 한 사람은 후배 소설가 이순원이다. 그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위대한 문호’의 동의어로 쓰였던 ‘문장가’라는 말을 동시대에 적용할 경우 이문열만큼 그 말이 자연스러운 작가는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1989년 ‘작가세계’ 창간호, ‘이문열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월간 문학정신이 마련한 대담에 참가했던 한 문인 역시 나를 “작가라기보다는 문장가로 보았다”고 했다. 연작 형식의 장편 『젊은 날의 초상』의 ‘그해 겨울’에 나오는 창수령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한국문학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인 미학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창수령에 가봤더니 소설에서처럼 아름답지 않더라는 게 그 이유였다. 문장 자체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지 묘사 대상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작가라기보다 문장가라는 얘기였다. 좀 긴 듯하지만, 소설에서 창수령에 대한 묘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수령(蒼水嶺), 해발 칠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대담자는 내가 문장을 잘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문장가가 아니라, 문장으로 남을 설득시키고 동시에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고전적인 문장의 힘을 갖춘 문장가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빠른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한문체 문장이 갖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한글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경상북도 영양과 영덕을 잇는 해발 700m 창수령 고개에 세워진 표지판. 이문열씨가 장편 『젊은 날의 초상』에서 창수령 설경을 아름답게 묘사해 유명해지자 영양군에서 표지판을 세웠다. 사진 영양군청
내가 문장에 대해 야심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난 5월 회고록 9회 ‘나는 왜 작가가 됐나’에서 밝혔던 것처럼, 쓰며 살게 되리라는 불길한 운명에서 도망치려 애쓰다가 참회하는 기분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시절에도, 나는 세상의 지식이나 정신의 함양만큼이나 힘있고 아름다운 문장에 탐욕을 부리곤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글을 잘 쓰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했고, 수사학을 연마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글 잘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런 관심은 실제 수련으로 이어졌다. 안동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낭인(浪人)처럼 지낼 무렵 그림 배울 때 데생하는 것처럼 주변의 사물을 하나씩 정해 대학노트로 한 장, 200자 원고지로 7매가량 묘사한 글을 일기처럼 자주 썼다. 그렇게 1년을 하고 났더니 말이 되든, 안 되든 글이라는 게 늘리려고 하면 한없이 늘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의 시 ‘순수를 꿈꾸며(Auguries of Innocence)’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내게는 이 문장마저 말의 어떤 특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을 늘려 글을 쓴다는 게 결국 글 쓰는 대상에 대한 관념이나 생각을 늘리는 것일 텐데, 한 알의 모래알 안에서 우주를 꺼낼 수 있다는 블레이크의 발상처럼 바늘이든, 연필이든, 성냥이든, 아니면 모래알이든 주어지면 필요한 만큼, 꼭 써야 하는 거라면 1만 매라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청산유수인데 글을 써보라고 하면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마음속에서 어떤 말이 쓸 만한 말이라고 지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한하게 쓸 수 있다.
'자성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문열씨의 일기장.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대 사대를 중퇴할 무렵 작성한 것이다. 사진 이재유
'자성록'의 일부. 20대 초반의 절박함과 감상이 보인다. 자성록의 메모 일부가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쓰였다. 사진 이재유
좋은 문장은 내게 이해가 쉬운 명료한 문장을 의미했다. 상대방의 수신 코드 가운데 감성 코드를 더 건드리느냐, 이성 코드를 더 건드리느냐 하는 차이는 있겠는데 명료함이 무엇보다 중요한 말의 가치 중 하나라고 여겼다. 불분명한 표현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때조차 내 의식 안의 어떤 기본선은 명료해야 한다.
생각을 글로 표현한 기억이 많아야
결국 좋은 문장을 많이 접해 익숙해져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고 좋은 문장을 만나면 외우려고 애썼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질문에, 생각을 정리해 그것이 글로 나타나는 형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걸 키운다고 답한 적이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찾으려고 노력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는 뜻이었다. 머릿속 생각을 문장이나 말로 표현해 보는 것, 그런 기억을 많이 갖는 것,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젊은 날의 내 습작 노트에 ‘이문열 글쓰기 요령’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간추려 놓기도 했다.
같은 단어는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는 게 아니라면 되도록 피한다는 게 한 원칙이었다. 장편에서는 그런 원칙을 지키기 어려웠지만 단편의 경우에는 지키려고 노력했다.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명사나 허사(虛辭, 조사나 어미)는 하는 수 없지만 동사나 형용사는 반복을 피하려 했다. 다행히 우리 말의 동사와 형용사는 표현이 풍부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준말이나 ‘나는…했었다’는 식의 대과거(大過去)를 쓰는 것도 꺼려 했다. 준말은 문장을 좀스럽게 만든다. 주관적인 취향이랄 수도 있는데, 젊은 여성들이 ‘그랬었니 어쨌었니’ 하는 건 괜찮지만 머리 허연 노인이 대과거를 자주 쓴다고 생각하면 글이 경박해 보이는 것 같았다.
감탄사와 느낌표, 말없음표는 적절하게 사용하면 울림이 크지만 잦아지면 글이 천박해 보인다는 것도 원칙 중 하나였다.
심지어 삼인칭을 쓸 경우 그 사람, 그 여자, 그이 등등에서 ‘그’라는 접두사가 반복되겠기에 ‘그’를 빼기 위해 접두사를 가급적 쓰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다.
소설가 이순원과의 인터뷰에서는 ‘영업비밀’이라고 운을 뗀 뒤 음수율 활용법을 털어놓기도 했다. 경험상 3·4조나 7·5조, 드물게는 12·8조의 음수율을 적당하게 반복하면 산문 문장이 유려하게 느껴졌다. 지난 회에 언급했던 연작소설집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의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런 사례다.
춘삼월 꽃 그늘에서 통음(痛飮)에 젖으시고, 잎지는 정자에서 율(律) 지으셨다. 유묵(儒墨)을 논하실 땐 인간에 계셨지만 노장(老莊)을 설하실 땐 무위(無爲)에 노니셨다.
소설 내용이 시대착오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다 대중적으로 만드는 보조장치로 3·4조를 활용한 것이었다.
잘 읽히게 하기 위해 속임수도 불사
‘왜 그런지 모르지만’ 같은 조건문도 즐겨 사용했는데, 논리적으로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뭔가 설명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였다. 가령 ‘나는 버스를 기다렸다.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났다’ 같은 문장은 동떨어진 행위와 연상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행위와 고향을 떠올리는 의식 사이에 아무런 인과 관계가 제시되지 않아서다. 나는 이런 문장이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해결책이 조건문 활용이다.
‘고향 가는 길이라서 그런지’라는 조건문을 중간에 집어넣으면 왜 고향 생각이 났는지, 독자의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을 끼워넣으면 아무 것도 설명된 건 없다. 하지만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난 것의 돌연스러움과 생소함이 완화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앞에서 속임수라고 했지만, 나는 독자가 내 글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이문열씨의 작업 모습. 1990년대 초반 타자기를 사용하기 전 이씨는 문화볼펜이나 모나미 153 볼펜으로 작업했다. 사진 이재유
산문이든, 소설이든 제목을 굉장히 중시한다는 건 다른 데서도 여러 차례 얘기했다. 제목은 글의 얼굴이자 깃발 같은 것이다. 나는 제목이 있어야 글의 방향이 생기고 쓸 말도 수합(收合)된다. 그래서 제목 짓고 처음 몇 문장 쓰고 나면 단편소설의 경우 절반은 쓴 거라고 얘기하곤 했다.
실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은 일종의 자동화 과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감’에 의지해 썼다고 할 수도 있는데, 단어의 선택이나 감동과 관련된 세기(細技)의 활용, 심지어 지식이나 사상을 소설 안에 써먹는 일조차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흥이 나서 썼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신들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어떤 가락이 한번 걸리면 상당히 오랫동안 진동해 가면서 내가 어떤 말을 지어내야겠다 혹은 짜내야겠다는 생각 없이 글이 착착 이어지는 흐름이 생겨나곤 했다. 그걸 감정의 자동화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제 글을 써야 한다 싶으면 감정 혹은 흥에 올라타 글을 써나가는 것이지 오래 궁리하는 편은 아니었다.
세상의 열띤 반응 앞에서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해 왔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학 시절 문학회 합평회에서 단편을 발표했다가 한동안 정신이 멍했을 만큼 짜릿한 갈채를 받은 이후 그 방면의 기쁨에 대해서는 차츰 시들해진 것이지 그 때만큼의 강렬함을 다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작가가 되고 나서 책이 잘 팔리면 내가 승인되었다는 느낌으로 흐뭇해 하거나 이 사람들이 나한테 또 속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어떤 평을 하든 그건 그 사람들의 진실이고, 내가 그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두보(杜甫)의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이라는 시에 ‘어불경인사부휴(語不驚人死不休)’라는 구절이 나온다. ‘말을 하고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한때 이 문장에 기대 세상에 뭔가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품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일거수일투족 목적의식을 갖고 살기 어려운 것처럼 글쓰기도 숨쉬듯 편안하게 써야지 목적성이나 야심을 갖고 쓰기는 어렵다. 세상과 한참 불화할 때 좋은 글을 써서 보복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압박과 긴장 때문인지 오히려 글을 잘 쓸 수 없었다.
글쓰기에는 자기 기만도
내가 말과 글에 대해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내 경우 존재가 언어의 집이었다는 느낌도 든다. 글쓰기에는 자기 기만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보편성을 만들어내거나 실제와 다른 엉뚱한 기분을 갖다 붙인 적도 있다. 돌이켜 보면 과장이 뒤따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21년 출판사를 RHK로 바꿔 재출간한 이문열 중단편 전집.
2016년 민음사에서 중단편을 정리해 펴낸 전집의 서문에 이런 문장을 썼다.
이제 돌아오지 않는 강가에서의 한나절 분주히 혹은 쓸쓸하게 몰두했던 내 투망질이 끝나 간다.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아이가 기우는 햇살을 보고 그러할 것처럼 나도 어느새 낡고 헝클어진 그물을 거둘 때가 가까워진 느낌에 가슴이 서늘하다. 때로는 홀린 듯, 더러는 신들린 듯 함부로 내던진 내 언어의 그물은 어떤 시간들을 건져올릴 것인가.
그때로부터 벌써 8년이 지났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과거의 생기 있는 글쓰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삶은 결국 하나의 글쓰기로 치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훗날 내 글쓰기가 어떻게 평가될지는 뒷사람들의 몫이다.
에디터
이문열
관심
작가
3377@hanmail.net
1948년 서울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새하곡’, 제3회 오늘의작가상 중편 ‘사람의 아들’로 등단.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변경』 등 3000만 부 이상 판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동리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9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