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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의 자본주의, 극단적 비인간화의 문제
영화 〈플랜 75〉는 일본-프랑스-필리핀 합작 영화로, 75세 이상 노인들의 자발적 안락사가 제도화된 일본의 상황을 상상해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 줄거리는 다음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초고령 사회가 된 일본에서는 노인을 위한 복지 비용(부양 및 의료 비용)이 국가 재정 및 사회적 자원의 상당 부분을 소진시키는 중이다. 그리고 이 비용을 감당해야 할 청장년 경제 활동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청년층의 경제적 고충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에 청년층의 노인 대상 혐오 범죄가 빈발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자발적으로 안락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플랜 75’라는 정책을 시행한다. 가족과 연락이 끊어지고 외로움과 빈곤에 시달리던 수많은 노인이 안락사를 신청한다. 이들은 안락사 시행까지 며칠의 시간을 허락받고 10만 엔의 지원금과 하루 15분의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받은 뒤 곧 국가가 지정한 시설에서 독극물을 주입받아 사망한다. 단 신청자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라도 안락사 신청을 포기할 수 있다.
영화 〈플랜 75〉에서 볼 수 있는 다소 극단적인 국가정책과 그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은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된 테마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어 영화 〈배틀 로얄〉의 설정을 보면 일본 정부가 청소년의 폭력성을 통제하고자 매년 특정 고등학교의 한 학급을 선정해 학생들이 서로 죽고 죽이도록 생존 게임을 벌이게 만든다. 또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나 만화 《최종병기 그녀》 같은 작품에서는 국가나 지역 정권이 청소년들을 징집해서 반강제로 전쟁에 가담하게 만든다. 〈은하철도 999〉와 〈총몽〉에서는 신청자를 받아 인간을 안드로이드로 만드는 설정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은 군국주의 일본제국 시절 자행된 위안부 모집, 노동자 강제징용, 무모한 군사작전(옥쇄,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 등) 등 전쟁범죄의 기억을 반영한 것이다.
일제의 전쟁범죄는 우리 한국을 비롯한 여러 주변국 국민에게도 큰 상흔을 남겼지만, 지배층에 속하지 못했던 보통의 일본인 다수에게도 비슷한 고통을 선사했다. 일본제국 당시 폭주하던 군부와 이를 방치한 히로히토 일왕 및 관료 세력이 이 범죄의 주역이었다면, 당시 군국주의 교육에 세뇌된 일본 국민 대다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매우 애매한 처지에 놓였다. 이들은 주변국 국민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범죄에 적극 가담한 주범이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광기에 휘말려 자신들의 인생과 생명 전부를 파멸로 몰아넣는 희생자로 전락했다.
일본의 전후세대 가운데는 이 참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반정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들은 극우 파쇼 군국주의 정치 유산에 반대하는 사상적 근거를 주로 좌익 사회주의에서 찾았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을 그들의 반전(反戰), 반전체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문화, 미디어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이어지는 일본 대중문화의 폭발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일본 대중문화계에는 좌익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했던 인물(특히 60년대 말 전공투 소속)이 많이 포진돼 있고, 꼭 좌익 사상이 아니더라도 우익 파쇼 전체주의에 반발해서 개인의 인권을 존중할 책임을 앞세우는 콘텐츠 제작자들이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토미노 요시유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 등이 대표적이고, 영화 편에서는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 〈울트라맨〉 시리즈의 사사키 마모루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보고 자란 후속 세대 제작자 또한 좌익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진보적이면서 일본 내 우익 세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영화 〈어느 가족〉, 〈브로커〉 등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대표적이다.
〈플랜 75〉의 감독인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2018년부터 고레에다 감독과 협업하면서 영화 연출 경력을 쌓아 왔다. 하야카와 감독의 작품 또한 일본 미디어 업계에 널리 퍼져 있는 진보적 정치 성향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는 〈플랜 75〉와 관련된 감독 인터뷰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하야카와 감독은 “생산성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위기가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플랜 75〉를 연출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 비인간성, 그리고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배태된 강압적 속성과 폭력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이로써 하야카와 감독은 사회와 인간 개개인에 대한 자신의 진보적 윤리관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고 있다.
일본 전통의 종교적 생명 존중 사상에 입각한 대응책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영화 〈플랜 75〉의 메시지는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근본 정서로 삼는 일본 고유의 신토 정령신앙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 카쿠타니 미치(바이쇼 치에코 분)가 작품 마지막에서 안락사를 포기하고 끝내 삶을 이어가기를 선택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미치는 의지할 가족이 한 명도 없는 고독한 노년의 여성으로 호텔 청소 일을 하면서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역시 노년에 접어든 직장 동료들과의 친분이지만, 호텔 측에서 이들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이유로 미치와 동료들을 모두 함께 해고하면서 그녀는 커다란 어려움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치는 그녀의 동료 중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해고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고독사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미치는 직장을 구해 보려 하지만 헛수고로 끝났고, 살던 집이 철거될 시기가 다가오지만 임대할 방조차 구하지 못한다. 고독사를 우려한 집주인들이 방을 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의 엄혹함에 지쳐버린 그녀는 안락사 프로그램인 플랜 75에 신청서를 쓰고 며칠 동안 삶을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 며칠의 시간 동안 작은 삶의 활력소를 찾게 된다. 플랜 75 지원자에게 제공되는 하루 15분의 전화상담 서비스가 그녀에게 사람과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 미치를 담당하는 젊은 상담 직원 나리미야 요코(카와이 유미 분)는 자신과의 상담 통화를 통해 활기를 찾는 미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치에게 작은 정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에는 상담받는 이와 개인적 친분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직원 규정을 어기고 미치의 추억이 담긴 볼링장에서 미치를 만나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 날, 미치는 며칠 동안의 즐거운 추억을 뒤로한 채 안락사가 이뤄지는 시설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지막 독극물 주사 직전, 그녀는 옆자리의 다른 안락사 신청자가 죽어 가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 길로 그녀는 안락사 신청을 포기하고 시설 밖으로 나선다. 미치에게는 여전히 고독한 노년의 삶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힘겨운 삶 위로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리 빈곤하고 고달픈 삶일지라도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 대한 감독의 존경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자연이 전해 준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적 정령신앙이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하야카와 감독은 노인과 사회적 약자의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일본 사회와 정부의 자본주의적 비인간성에 맞서 삶을 이어가기로 한 미치의 선택을 숭고한 것으로 묘사한다. 삶이 몇 년 더 남았을지 모르고 또 그 삶이 여전히 외롭고 고단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자연이 허락해 준 생명을 끝까지 충만하게 누리겠다는 미치의 의지는 일본의 정령신앙 입장으로 볼 때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고유의 종교 윤리를 지켜내는 결단으로 비춰진다.
이처럼 자연생태와 인간의 삶에 내려진 생명의 힘에 대한 경외감 또한 일본 대중문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중심 테마 가운데 하나다. 목숨, 생명을 뜻하는 ‘이노치’(命, いのち)라는 단어는 일본의 영화, 드라마 대사나 노래 가사 속에서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정서 속에는 목숨, 생명을 온전하게 누리는 것에 대한 염원과 바람이 짙게 배어 있다.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일본의 가수 타케우치 마리야의 노래 〈いのちの歌〉(생명의 노래), 아이돌 그룹 노키자가 46의 〈命は美しい〉(생명은 아름다워), 칸자키 이오리의 〈命に嫌われている〉(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화악기밴드의 〈生命のアリア〉(생명의 아리아) 등 생명에 대한 존중의 정서가 여러 노래 주제로 채택될 만큼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의 중요성이 일본인들의 인간 이해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무수한 전란과 지진, 화산 활동, 태풍, 해일 등으로 고통받아 온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민족 정서로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체에 대한 감사와 지족(知足)의 심정을 대변한다.
영화 〈플랜 75〉의 서사는 일본의 이런 전통적 민족 정서가 인구구조가 무너져 버린 작금의 일본 사회에 만연한 비윤리적 풍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하야카와 감독은 종교적 세계관의 시각을 빌려 인간 존재의 근본 차원을 들춰냄으로써 한 인간의 생명을 국가의 정치경제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소모품처럼 하찮게 취급하는 작태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시도한다. 작중 미치의 마지막 깨달음은 국가가 내세우는 자살의 미학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약자에 대한 멸시의 시선을 폭로한다. ‘제도’라는 명목으로 자살이 삶을 ‘깔끔하게’ 마감하는 인도주의적 방안인 것처럼 포장하는 행태가 실은 국가의 전체주의적인 틀 안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도태시키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플랜 75〉의 서사는 일본 에도 시대 산골 마을의 고려장을 소재로 삼는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의 서사에서 확인되는 윤리적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노파는 나이 들어 추운 산꼭대기에 올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관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가족과 마을의 만성적 식량 부족 문제 해결에 일조하는 결단을 내린다. 여기에서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불교적 자비심이 이 노파의 결단을 숭고한 것으로 비춰지도록 하는 사상적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플랜 75〉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의 윤리를 조명한다. 주인공 미치의 안락사 포기는 사회 전체에 대한 복지비용 부담 증가로 이어지며 특히 청년 세대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키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카와 감독은 〈플랜 75〉에서 일본 사회 전체에 부여되는 경제적 부담이 한 사람의 자살을 촉구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무방비함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플랜 75〉가 제시하는 안락사에 대한 종교윤리적 비판의식은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는 소망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랜 75〉의 주제 의식이 근래 기독교계 내부에서 자주 확인되는 자살에 대한 관대한 시선에 비해 훨씬 바람직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작중 안락사를 신청하는 여러 노인에 대해 영화의 시선은 분명 온정적이고 애처로운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플랜 75〉는 국가의 자살 권유가 비인간적 폭력이자 기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이런 자살 권유에 넘어가는 것 또한 부분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관점으로 안락사 신청자들을 비추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비판적 시선에는 누구든지 어떠한 경우라도 삶을 끝까지 연명하고 누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일본 신토의 종교적 의식이 반영돼 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런 신토의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삶의 책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삶을 누리게 됐으므로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할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한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받은 이들의 자기 생명에 대한 책임의 크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 교회 목회 일선에서는 목회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회 신자나 신자 가족들 선택에 대해 과도하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자살이나 자발적 안락사가 구원 여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려면 상당한 분량의 논의가 요구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짚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밝혀진 신약 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자기 육체의 생명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행위는 믿는 자의 육체와 영혼에 생명을 주시되 더욱 풍성히 주시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로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는 우리 내세에 어떤 방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는 이런 경각심이 더더욱 요구된다.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2명으로 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 한국 사회는 〈플랜 75〉가 묘사한 인구구조 붕괴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를 전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게 겪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은 합계 출산율 1.26명인 일본보다 훨씬 저조한 출산율(0.72명)을 기록하면서도 자살률은 월등히 높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보다 훨씬 더 크게 자발적 안락사 제도화 유혹에 노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당연하게도 개개인의 자살은 물론이고 자발적 안락사의 제도화를 적극적으로 방지하는 데 힘써야 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자살을 택한 신자나 신자 가족을 향한 기준 없는 온정이나 위로는 오히려 기독교적 생명윤리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 우울한 감정에 짓눌려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들과 병으로 사망한 이들을 같게 취급하는 처사에 깃든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 〈플랜 75〉는 이런 책임감과 경각심에 대해 되짚어 볼 기회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으로도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힘입는 데 최고의 소망을 둔 기독교회에서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를 대하는 태도가 일본의 신토나 실존철학에서 자살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무방비하고 무책임한 현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되짚어 봐야 할 문제점이다. 내세를 철저히 부정하는 실존철학에서조차 자살은 삶의 본모습에 부합하는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의 삶은 원래 애초 정해진 목적 같은 것이 없는 우연하고 공허한 것이므로 자살이 그 온당한 귀결이 돼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공허한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지는 부조리함을 감내하는 것을 그 본모습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내세에 대한 믿음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오늘날의 지배적 철학 사조조차 자살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에 대한 취약한 의식을 개선해 나갈 것인가? 영화 〈플랜 75〉는, 비록 기독교적인 방식은 아닐지라도, 삶의 가치와 그에 대한 우리 개개인의 책임감을 일깨우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임박한 목회적 중대 현안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반성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