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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제구(蓮堤區) - 현재 제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소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산시가 직할시 승격 당시 34개동이었으나 행정동이 증가하게 되자, 1980년에는 일부 지역이 해운대구로 분구되었고, 1988년에는 금정구가, 1995년에는 동래구의 연산동과 거제동을 중심으로 분구가 됩니다. 거제동과 연산동이 연제구의 관할동입니다. 연산동은 연산 1~9동까지 있습니다.
1) 연산동(蓮山洞) - 낮은 늪지대였기에 수련이 많고 배산과 황령산쪽은 산지로 되어 있어서 연산이라는 설도 있고, 금련산이 시발이 되어 연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연산동과 거제동은 낮은 지대라서 연꽃이 자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런 저습지나 늪지대에는 사람이 살기가 좋은 환경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곳입니다. 부산지역 단일지역의 동으로는 최대 규모입니다.
* 참고로 동래 정씨가 중앙정계에 진출을 하며서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앞서 적었었죠?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정서란 분이 동래로 유배되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려가요중 유일하게 작가가 분명하게 밝혀진 노래로 기억이 되는데 맞는가요? 그 분이 옛날 소일삼아 참외를 심었던 장소에 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토곡에서 연산 1동과 8동을 지나는 길을 '과정로'라고 한답니다. '정과정곡'을 잠시 감상해보시죠?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가사군요... *^^*
내가 임(임금)을 그리워하며 울고 지내니
산에서 우는 접동새와 내가 비슷합니다.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말들이 사실이) 아니며 거짓이라는 것을,
아! 지는 달과 새벽 별은 아실 것입니다.
죽어서 영혼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 (임에게 나를 귀양보내야 한다고) 우기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이여!
슬프도다.
아! 임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아, 임이시여!
다시 (마음을) 돌리시어 나를 사랑해주소서.
2) 거제동(巨堤洞) - 조선시대때는 거벌리(居伐里)라고 했다고 합니다. 큰벌, 넓은 들을 말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습지였기에 상습 침수지대였기에 일제 시대때 이곳에 하천 제방을 쌓아 수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큰 제방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거제리란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온천천에 제방을 쌓고 수영천과 합류하게 했는데 큰 제방을 샇고 거제리란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동래구에 편입되어 있다가 연제구 관할이 됩니다. 참고로 '홰바지'란 곳이 있는데 옛 전차정류소 지역과 그 인근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5일 장날이 매 4일과 9일에 열리는데 인근 촌락 사람들이 짐을 싸 짊어지고 팔고 오면 해가 졌기에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2. 수영구(水營區) - 광안동, 남천동, 망미동, 민락동, 수영동 등이 관할동입니다. 조선시대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은 균역법 시행 후 군량미 부족으로 1895년 7월에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존재했던 조선 시대 중요한 군사시설이 있던 기지였습니다. 좌수영의 선소(船所)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남구로 편입되어 있다가 1995년 수영구로 분구되었습니다.
1) 광안동(廣安洞) - 넓은 해안과 모래 벌판을 가진 곳이라 넓은 해안이란 뜻의 광안(廣岸)이라 하려고 했으나 풍수상으로 광안(廣安)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경상좌도의 수군들이 바다를 방어하던 곳이라 바다가 널리 평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2) 남천동(南川洞) - 금련산(金蓮山)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내(川)인 남천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지금의 남천동 아파트 단지가 생기기 전에는 남천포라고 불렀고, 지금의 부경대 대연 캠퍼스쪽으로 내리는 내가 남천포라고 합니다.
3) 망미동(望美洞) - 배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선 김겸효가 살았다는 겸효대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배미산신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어 아직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에 있는 산을 망산(望山)이라고 하는데 망미동은 망산의 망(望)과 배미산의 미(美)가 합쳐서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설은 동래부의 고읍성이 있던 자리라서 좌수영의 수사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임금님께 올렸다는 뜻으로 망미인(望美人)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4) 민락동(民樂洞) - 여민동락(與民同樂), 여민해락(與民偕樂)의 생략된 말로 임금은 즐거움을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수영각의 어귀에 있어 경관이 매우 좋은 곳인지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치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민락동 회센타가 생각나는군요... 간만에 겨울바다를 즐기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5) 수영동(水營洞) - 수영동에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고 언급했었습니다.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절도사영의 약칭으로 관아명이 동리를 가리키게 된 것 같습니다. 수영성이 주위 1193척(1척-대략 30cm : 357.9m), 13척(3.9m)정도의 규모라고 하는데 이 성의 내부를 수영동이라고 하다가 점차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남수동(南壽洞)이라고도 했었고 수영동으로 오늘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3. 사하구(沙下區) - 조선시대에는 중요 군사 지역이었고, 부산포 진관이 설치되었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의 다대포 전투로 유명한 곳입니다. 1983년 서구에서 분구되어 사하구가 되었고 이 때 북구에 속했던 을숙도와 일웅도가 편입되었습니다. 관할동은 괴정동, 당리동, 하단동, 신평동, 장림동, 다대동, 구평동, 감천동 등이 있습니다.
1) 감천동(甘川洞) - 옛 이름은 감내(甘內)입니다. 예전에는 감내래리(甘內來里)라고 하였으며 연세 많으신 분들은 아직도 감내라고 부르시기도 합니다. '검'에서 온 것으로 검은 신(神)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천은 '내(川)을 한자로 적었다는 설과 물이 좋아서 감천(甘泉) 또는 감천(甘川)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선박들이 이 곳에서 급수를 많이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감천동에는 천마산, 아미산, 금티산 등이 있고, 감천항도 있습니다. 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사하구 승격시 분구되었습니다.
2) 구평동(舊平洞) - '구서평(舊西平), 구시평, 구평'이라고 불리웠는데 조선 초에 서평포가 설치되면서 군사상의 요충지이자 독지장이라는 장이 열렸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추후에 '성개'가 축성되면서 이곳을 서평진이라고 부르게 되자 원래의 서평은 구(舊)서평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독지장은 조선시대에 유명한 장이었는데 남겨진 자료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3) 괴정동(槐亭洞) - 구덕산, 시약산, 금티산 등이 바람과 해풍을 막아주고 고개만 넘으면 낙동강인지라 사람이 살기가 아주 좋았던 조건을 갖췄습니다. 괴정동은 조선시대에 국마(國馬)를 길러서 나라에 헌상하던 곳이었는데 어느 감독관이 감목행위가 너무 심하여 마을사람들이 팔정자 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팔정자나무의 하나가 괴목나무인데 이 나무가 있던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4) 다대동(多大洞) - 다대라원, 다다라원, 다다라, 다대진 등의 이름으로 고문에 나오고 있는데 사실 다대포와 일치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다라(多多羅)가 변하면서 다대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쨌든 다대포는 한일통교에 아주 중요한 요지였슴은 분명합니다. 아울러 경상좌도 7진의 하나였으며 국방상의 요새지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5) 당리동(堂里洞) - 북쪽은 승학산(乘鶴山), 동쪽은 산불량(山不良), 남쪽으로는 독뫼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이 곳은 승학산은 무학대사(왕건에 나오는 그 분!!!)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산세를 살피다가 학이 웅비하는 듯하다고 해서 승학산이라고 지었고, 산불량은 소백산맥의 줄기가 잘 나가다가 여기서 아깝게 끊어져 버려 못 쓸 산이라는 뜻에서 산불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리동에는 제석골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기우제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당이 있었는데 여신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주를 모신 당집의 곳이라 하여 당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름도 불량인 산불량....OTL
6) 신평동(新平洞) - 망후촌(望後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중기 임경업 장군의 조카가 이 곳으로 피신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김자점 일파때문에 9촌까지 일가몰살을 당하게 되자 그의 조카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려 올까봐 항상 뒤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망후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위치적으로 다대진의 후망소였던 까닭에 망후촌이라고 불리워진 것으로도 봅니다. 어쨌든 1939년 이곳에서 장림까지 제방을 쌓아 만입부가 농지로 변하게 됩니다. 신평은 '새로운 평지'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인 것 같습니다.
7) 장림동(長林洞) - 이 곳에는 안장림, 외장림, 보덕포(부득포, 비득포)의 3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형적으로 아미산 둘레에 길게 늘어선 동네라는 뜻으로 또 다른 설은 숲이 우거진 곳이란 뜻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외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을 갖추고 있었던 아주 조용한 반농반어(半農半魚)의 취락형태를 갖춘 마을이었습니다. 원래 안장림이 옛날의 장림이며 바깥장림은 부산과 다대간의 도로개설 이후 도로변에 집들이 새로 많이 생겨나게 면서 생긴 마을입니다. 보덕포는 안장림에서 두송산줄기가 북쪽으로 끝나는 능선을 넘어 낙동강 강가에 가면 응봉 봉수대의 북쪽 기슭에 있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장림이란 지명은 <동래부지>에 사천면 하단에 장림리로 다대진(多大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고다대(古多大)라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조선후기에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 장림동이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습니다. 1983년부터 급격한 인구 증가로 현재는 장림 1동, 장림 2동으로 분동되어 있습니다. (장보영님이 사시는 장림동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8) 하단동(下端洞) - 옛 이름은 평림리(平林里)라고 불렀으며 예전에는 동래구 사천면을 나눌 때 상단을 사상지역, 하단을 사하지역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낙동강 하류의 맨 아래쪽이었다는 뜻에서 하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구덕산은 용호머리인데 강을 향하여 뻗은 아래머리의 끝이라 하단이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4. 사상구(沙上區) -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따뜻한 기후 등으로 사람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1978년 북구출장소의 이름을 이어받아 북구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북구에서 분구되었습니다. 감전동, 괘법동, 덕포동, 모라동, 삼락동, 엄궁동, 주례동, 학장동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감전동(甘田洞) - 낙동강에 조성된 삼각주의 북쪽은 삼락동에 속하고, 남쪽은 감전동에 속합니다. 예전엔 습지로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사상공단 조성 때 매립되어 부산의 대표적인 공단으로 변신했었습니다. 원래는 감동(甘東)마을, 감동촌, 감동리(甘洞里) 등으로 불렸습니다. 감(甘)이라는 지명이 붙은 동네가 엄청 많습니다...^^;; 농토가 비옥해서 감전이라고 불렀다는 속설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감, 곰, 금' 등의 이름은 신(神)이란 의미로 곰(bear)을 토템으로 신성시하여 이런 뜻이 신이란 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괘법동(掛法洞) - 물이 고인 곳을 '괴내'라 부르다가 한자로 적다보니 '괘'가 되었고, 바닷가나 강가에 있는 마을, 물이 고여 있는 마을이란 말로 부르다가 얻게 된 이름 같습니다. 북구에 포함되어 있다가 1995년 사상구로 분구되었습니다.
3) 덕포동(德浦洞) - '덕개'라는 옛 이름이 있는데 언덕에 있는 포구를 의미합니다. 언덕 끝에 배를 대는 포구를 '득포 또는 덕포'라고 불렀는데 동리의 포구(浦口)였기에 덕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낙동강 제방을 쌓으면서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4) 모라동(毛羅洞) - 뒷산기슭에 모란꽃이 많이 피어서 모란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고, '모라'는 원래 마을의 우리나라 고대어라고 합니다. 동민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던 곳을 '마을', '마실', '모을', '말' 등으로 불렀는데 모라동은 말 그대로 마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왜 한자표기는 저렇게 했을까요? 머리털(사람)이 그물처럼 엮인 마을(?)이란 뜻일까요? -.-^
5) 삼락동(三樂洞) - 유래는 모래와 관련된 사락에서 온 것으로 보이며, 낙동강 서쪽에 형성된 삼각주에 위치한 까닭에 삼락동이란 동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군자의 삼락이란
(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在焉)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고,
(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
하늘을 우러러 사람대함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
(仰不愧於天俯不作於人二樂也)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得天下英才敎育之三樂也)
또한, 맹자의 삼락은 젊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년에는 스스로 가치관을 실천하고,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를 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존경하옵는 노자께서는 인생 삼락(三樂)을 쾌식<快食>, 쾌변<快便>, 쾌면<快眠>)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밥 잘 먹고, 변 잘 보고, 잠 잘 자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보셨습니다. 옆길로 좀 빠진 김에 불가에서는 오욕락(五欲樂)으로 수욕<睡浴>, 식욕<食欲>, 색욕<色欲>, 명욕<名欲>, 재욕<財欲>을 의미합니다. 과연 여러분이 추구하시는 인생의 삼락 아니 즐거움은 무엇이신지요? *^^*
6) 엄궁동(嚴弓洞) - 낙동강에서 바라본 모양이 활과 같아서 활궁(弓)을 붙여서 엄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엄광산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는 차원에서 엄을 따와서 엄궁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임시수도 당시 故 이승만 대통령은 이 곳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라고 좋아하셨기에 '평화촌'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95년 북구에서 사상구로 편입되었습니다.
7) 주례동(周禮洞) - 주례동이 사상구였군요...^^;; 저는 서면과 인접해서 착각을 했습니다. 말의 어원은 '두리'로 파악하고 있는데 '두레'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주례가 된 것이라고 봅니다. '두레'는 한 마을의 농사를 지을 때 품앗이를 하는 뭐 농촌사회의 공동체 단체 뭐 이런 거 아닙니까? 모라(=마을), 주례(=두레) 순 우리말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니 많이 사용해야 겠습니다.
8) 학장동(鶴章洞) - 엄광산 기슭을 따라 흐르는 시내를 따라 주례동과 학장동을 이어진 학성(鶴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성리와 장문리란 두 마을을 합하여 학장동(鶴場洞)이 되었다가 어감이 더 좋은 장(章)으로 바꾸어 학장동이 최종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김해 문화 토기 및 학장동 조개무지 등이 유명합니다. 북구에 속해 있다가 1995년 사상구 신설 때 편입되었습니다.
5. 금정구(金井區) - 1980년 동래구에서 분구되었으며 금사동, 금성동, 구서동, 남산동, 청룡동, 선동, 오륜동, 두구동, 부곡동, 서동, 장전동, 회동동 등이 있습니다.
1) 금사동(錦絲洞) - 일제강점 초기때 금천(錦川)마을과 사천(絲川)마을의 첫 글자를 합하여 금사동이 탄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금천, 사천, 회천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 주는 동네 이름이랍니다. 아마도 강가의 경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쁜 이름을 지었겠죠?
2) 회동동(回東洞)- 회동동은 회천(回川)마을과 동대(東臺)마을로 구성되어 두 마을의 첫글자를 합하여 동명이 된 것입니다.
3) 금성동(金城洞) - 금정산성안에 자리잡은 동네라는 뜻입니다. 사적 215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하나 오늘날 남아 있는 성은 조선시대 때 축성된 것입니다. 성의 둘레는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어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이었습니다. 금성동에는 국(鞠)씨와 두(杜)씨의 성을 가진 두 가족이 이 마을의 터를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산성 막걸리가 유명하였기에 술을 만드는 누룩이 이 마을의 대표적인 특산물이었으며 산성 누룩 제조에 따라 동래와 부산지방의 쌀값이 좌우되었다고 합니다.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4) 구서동(久瑞洞) - 구세동거(仇世同居)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지는데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라는 사람의 집에 9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는 고사로 집안이 화목했기에 가능했겠죠? 이 곳이 바로 그러한 고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란 설도 있고, 효자효녀조에 나오는 구주성(俱周星)의 성씨를 따서 구세(九世)로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설은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금정산 번우암이 있어 기우소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던지라 여기에서 굿을 자주 벌였기에 동네 이름이 구세가 되어 나중에 뜻이 좋은 한자음으로 바꾸면서 구서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5) 남산동(南山洞) - 조선시대부터 계속 사용된 이름입니다.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짓는다고 남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범어사의 사전(寺田)이 많아 범어사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남산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동래에는 물이 좋아 순서를 매겼는데 1등 남산, 2등 초읍, 3등 연지라고 했는데 청룡동에 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수질이 많이 나빠졌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6) 노포동(老圃洞) - 노포라는 뜻은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농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을 칭합니다. 노포동이란 당연히 농사가 잘되는 마을, 다른 동네에 비하여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끔 오래된 채밭이라는 뜻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7) 두구동(杜邱洞) - 임진왜란 전 동래의 읍지를 물색할 때 초읍동과 두구동, 수안동 등이 후보였다고 합니다. 읍지를 초(抄)한 곳은 초읍동이라 했고, 두고 보자고 점찍은 곳이 두구동이라 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어쨌든 평탄하고 좋았던 지형임은 분명합니다. 1968년 종합 양계단지로 지정된 후에 양계사업이 발달하여 부산시내의 달걀과 육계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동래구에 있다가 1988년 금정구가 분구되면서 관할이 됩니다.
8) 부곡동(釜谷洞) -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넘어가는 산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기찰(수상한 사람을 색출하는 지금의 경찰?)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구월산을 등지고 산업도로가 지나고 있는 동네입니다.
9) 서동(書洞) - <동래부지>에 보면 동래부 동상면 서리(書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상면의 중심마을인 서리, 금사리, 회동리를 합하여 서동이라 호칭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 동상동으로 부르다가 1974년 서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섯골(書谷)마을과 내곡마을의 2개 마을중 이름이 섯골이 더 나아서 서리마을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상동이란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영도구의 동삼동과 혼동이 많았던 까닭에 서동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0) 선동(仙洞) - 조선시대부터 선동이라 불리웠습니다. 동네에 선돌(立石)이 있어서 이를 표지물로 삼아 동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란 설도 있고, 선돌을 선동으로 음을 부르기 쉽게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제시대때는 선리로 불렸습니다.
11) 장전동(長箭洞) - 장전이란 의미가 긴 화살이라는 뜻으로 금정산의 죽전마을과 같이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2) 청룡동(靑龍洞) - 청룡이란 것이 28수(宿) 가운데 동방에 있는 일곱성숙을 총칭하며 사신(四神)의 하나로 동쪽하늘을 맡은 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범어사의 동편마을이란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풀이됩니다. 계명봉이 계룡의 형상으로 산의 중턱에는 계명암이 있고, 서단을 마주 대하여 미륵암이 있고, 동단에는 용의 머리가 있다하여 청룡동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6. 강서구(江西區) - 낙동강의 영향으로 퇴적물이 쌓여 이뤄졌으며 넓은 삼각주 평야를 이루고 있는 강의 하류지역이다. <삼국유사>에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초행길로 많은 전설과 유적을 남기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왜구의 노략질의 대상이었던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해전의 격전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안골포 해전과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한 가덕도 해전이 강서구 쪽에서 이뤄진 전쟁입니다. 또한 가덕도에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세워진 척화비가 있습니다.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이를 마땅히 나아가 싸우지 아니하고 화평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잃으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한다'라는 글귀입니다. 요즘 FTA 때문에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유서깊은 가야문명의 발상지이자 가락국 건국터전으로서 역사변천에 따라 금관군, 김해소경, 김해부, 금주군, 금주현, 김해도호부, 김해군 등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어 왔으며,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어 부산시대를 열었습니다. 1989년 1월 1일 가락, 녹산, 천가동을 추가로 편입시켜 구세를 확장하면서 자치구로 승격하였습니다. 김해와 인접하고 있어서 편입된 동네도 많고 하여 몇 곳만 소개를 하겠습니다. 강동동, 녹산동, 눌차동, 대저동, 명지동, 천가동, 구랑동, 대항동, 동선동, 미음동, 송정동, 범방동, 봉림동, 생곡동, 성북동, 식만동, 신호동, 죽동동, 죽림동, 지사동, 천성동, 화전동 등이 있습니다. 우편번호에만 있는 동네 수가 22개인가요? ^^;;
1) 가락동(駕洛洞) - 김해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서낙동강의 서안에 아담하게 솟아 있는 죽도를 거점으로 500년동안 무인도였다고 합니다. 김해군 가락면이었다가 1989년 부산시에 편입되어 가락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이 낚시를 즐겼다는 3층 바위도 있는데 어쨌든 가락국의 영향으로 가락동이 된 것 같습니다. -.-^
2) 강동동(江東洞) - 낙동강의 본류인 선암강의 동안에 위치한다고 하여 강동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곳이었으며, 특히 갈밭이 많아 한때는 갈자리와 갈대꽃을 뽑아서 만드는 청소용 빗자루가 특산물로 알려졌던 곳입니다.
3) 녹산동(菉山洞) - 봉화산 동쪽의 지형이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지라 녹산(鹿山)이라 하였던 것을 녹산(菉山)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4) 대저동(大著洞) - 대저동은 원래 대부분이 갈밭이었습니다. 현재 대저동의 자리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낙동강 물길에 실려온 토사가 쌓여서 삼각주의 섬이 되어 대저도가 되었다가 대저동으로 바뀌었습니다. 큰 물가란 뜻이 그래서 된 것인가 봅니다.
5) 명지동(鳴旨洞) - '명지, 명호(鳴湖)'라고 불렀는데 농지로 사용되기 전에는 온 섬이 갈대밭이었다고 합니다. 바닷바람 소리와 해면에 가까운 갈대 섬의 바람소리가 울린다는 어귀로 명지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6) 천가동(天加洞) - 천가동은 가덕도와 눌차도의 2개의 유인도와 11개의 무인도를 포함한 13개의 섬으로 이뤄진 부산시에서 제일 큰 섬으로 영도의 1.6배의 크기입니다. 눌차동, 대항동, 동선동, 성북동, 천성동 5개의 법정동과 17개의 자연마을을 가지고 있습니다.
7. 북구(北區) - 낙동강을 끼고 있어 지리적 조건과 기후 등이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일찍부터 정착하여 생활하기 좋은 곳이었다. 구포의 남창이 유명했고, 구포장(매 3, 8일)은 장타령이란 민요로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이 1912년 6월에 구포지역에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구포동, 금곡동, 화명동, 덕천동, 만덕동 등이 있습니다.
1) 구포동(龜浦洞) - 구포라는 말은 '거뵈개(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를 한자로 적은 말인데 '거뵈개'는 낙동강 물 이름인 '갑우내'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구하구하(龜何龜何)' 즉, '거북아 거북아(신이시여 신이시여)'라는 뜻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동래온천도 예전엔 구야(龜也)온천이라 했습니다.
2) 금곡동(金谷洞) - 금정산의 골에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금정산에서 떠오르는 해를 따라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보는 설도 있고, 금정산의 서쪽 골짜기에 금이 많이 나와서 금곡동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3) 덕천동(德川洞) - 낙동강변의 덕천천 하구에 자리잡은 덕천동은 구법곡이라 불리기도 했고, 감동포, 감동진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덕곡천이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덕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4) 만덕동(萬德洞) - 임진왜란 때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을 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해서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 도둑이 심하기로 으뜸인 곳이 만덕고개였고, 다음이 모너머고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 하였다고 해서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5) 화명동(華明洞) - 대천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화명은 해붉이에서 온 것이 해(日)가 화(華)가 되고, 붉이(明)이는 명(明)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참고로 용당마을은 파평 윤씨를 중심으로 낙동강변에 형성된 동족마을인데 원래 용두골이 용등골로 불리다가 용당이 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8. 해운대구(海雲臺區) - 1980년 해운대구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우동, 중동, 좌동, 반여동, 석대동, 반송동, 재송동, 송정동 등이 있습니다.
1) 반송동(盤松洞) - 소나무 형상이 소반처럼 펑퍼짐해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반송이 많았다고 합니다. 6.25전쟁 이후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그 울창했던 소나무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1950년대 초기에는 부산지방의 땔감나무 시장의 나무공급을 거의 반송에서 도맡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2) 반여동(盤如洞) - 지형이 소반처럼 동그랗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반여동 고분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1972년 부산시의 정책이주지역으로 시내 고지대 철거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동네였습니다.
3) 석대동(石坮洞) - 아마도 이 석대동 일대에 풍류를 즐길만한 좋은 자리(반석)가 있었기에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에는 영양 천(千)씨의 집성촌으로 5효자 1효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이후 해운대구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4) 송정동(松亭洞) - 광주 노씨의 선조가 완만한 백사장이 내려다보이고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정(一本亭)이라는 노송이 마을의 상징처럼 있었는데 6.25이후 병사들이 사격연습을 거기다 하는 바람에 고사해 버렸는데 이 노송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설은 임진왜란 전까지 송정을 가라(加羅)라고 불렀는데 임란 때 일본군이 파병군사들에게 "조선에 가면 <松>자를 조심하라"고 해서 <송>자가 붙은 마을에는 접근하지 않으므로 재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송정으로 바꿨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5) 우동(佑洞) - 해운대의 중심가로 변모한 중동 일대의 옛 온천지역인 귀남평원을 가로질러 동백섬 옆 수영만으로 흐르는 춘천천이 있었는데 오른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우동이라 불렀습니다. 우동(右洞)에서 일제 시대때 도울 '우(佑)'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엔 멸치의 황금어장으로 손꼽혔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6) 중동(中洞) - 해운대 중심부에 위치한 동리라는 데서 붙여진지명으로 해수욕장, 온천지역 등이 모두 중동지역입니다. 청사포(靑沙浦)는 원래 청사포(靑蛇浦)였으나 뜻이 좀 꺼림직하여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7) 좌동(佐洞) - 우동과 같은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합니다. 좌동에는 해운팔경 중 하나인 장산폭포가 있는데 장산마을과 세실마을 등이 좌동의 모태가 되는 마을입니다.
9. 기장군(機張郡) - 현 기장이란 이름은 통일 신라시대 경덕왕이 제정했고, 기장으로 부르기 전에는 갑화양곡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1973년 경상남도 양산군에 통합되었다가 1995년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 기장읍(機張邑) -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었습니다. 기장은 큰 벌이라 불렀고 큰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산에 둘린 마을이란 뜻도 있고 변두리 마을이란 뜻도 있습니다.
2) 장안읍(長安邑) - 장안은 성내라는 뜻으로 잣안이 장안으로 바뀐 것입니다. 장안사라는 절도 있습니다.
3) 일광면(日光面) - 일광산에서 유래되었으며, 일광산이란 이름은 그 주봉되는 백두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주봉은 백토로서 토박하여 풀이 제대로 자생하지 못하여 백색의 화강석만 널려 있어 백설이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이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4) 정관면(鼎冠面) - 지명은 소두방재에서 유래하였는데 소두방재를 정관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정관면 사람들이 동래로 내왕하는 유일한 관문이 소두방재였기 때문에 정관면이라고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소두방은 솥뚜껑을 지칭하는 방언입니다. 솥뚜껑을 쓴 갓이라는 작명인가요?
5) 철마면(鐵馬面) - 철마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옛날 이곳은 큰 홍수와 해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는데, 미역 바위의 용굴에서 동해 용왕의 명을 받은 용마가 나와서 물을 다스리고 나서부터 물이 없어 용마는 환궁하지 못한 채 햇볕에 말려져 점차 굳어져서 작은 쇠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흔적을 보고 쇠로 된 말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철마산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10. 남구 - 뭔가가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남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허전했나봅니다. OTL~ 남구의 관할동은 대연동, 용호동, 용당동, 감만동, 우암동, 문현동이 속합니다. 1975년 남구로 성격되었고, 1995년 수영구와 분구가 되었습니다.
1) 감만동(戡蠻洞) - 감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 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적들을 이 곳으로 유인해서 전멸시켰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오랑캐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감(戡)은 이기다, 죽이다, 치다의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니 조금 무서운 전설이 있는 이름입니다. 어쨌든 수군진영에서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2) 대연동(大淵洞) - 옛날에는 못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못골시장도 있습니다. 대연이란 지명은 큰 못이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못의 길이가 181척, 너비가 125척이었다고 합니다. 이 못을 이용해서 대연동 일대의 50만평의 넓은 논들이 경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에는 대일리, 대이리로 부르다가 해방 후 대연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남구에서 넓이가 가장 큰 동이고 배산임해의 지형을 이룬다고 합니다. 부경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명정보대학교 등 학교가 가장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부산시립박물관, 세계 유일의 아픈 역사가 담긴 UN공원도 있습니다.
3) 문현동(門峴洞) - 옛 이름은 찌께골이라고 했습니다. 지게골에서 나온 말로서 지게란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팎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이 곳 지형이 양쪽으로 산이 에워싸고 있어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4) 우암동(牛岩洞) - 천연의 포구가 있어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소모양과 같다하여 이곳 포구를 우암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 바다의 매축을 위해 산을 굴착하다가 이 바위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6.25전쟁으로 인한 다수의 피난민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증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5) 용당동(龍塘洞) - 용당이라 함은 옛날에 큰 못이 있었는데 이 못을 둘러싼 부근 산세(용마산)가 용의 모양과 같다하여 이 못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용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용당은 해신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왕을 모신 당집이 있어서 유래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용당리로 불리우다가 1959년 동명 개정 때 용당동으로 바뀐 뒤 오늘까지 그렇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6) 용호동(龍湖洞) - 장산봉 아래에 호수 같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하늘을 오르지 못한 용이 이무기가 되어 있었다고 해서 용호동이라고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용호동 분개염전은 전국적으로 품질이 우수하여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이기대, 오륙도 등이 있습니다.
사실 부산의 이름 유래를 정리하면서 때아닌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래가 다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정통 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어떤 연유에서 지어졌나 정도를 알아주는 애향심을 가진다면 더욱 더 좋은 동네가 될 수 있겠죠? *^^*